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표징을 보여주신 다음 날, 군중들은 여전히 배를 채울 빵을 찾고 있습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들이 원한만큼 배불리 먹고도 남는 일을 체험한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의 욕구를 채울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군중들은 그런 경험에 기초하여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심지어 그분을 임금으로 삼으려고까지 합니다(6,15).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알아보아서가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그분을 추종하고 있는 것입니다(6,26).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빵은 우리의 욕구 충족과 현세적인 만족을 위한 먹을거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빵’이며 바로 당신 자신 전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모세가 준 빵도 실은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것이며 그 빵이야말로 참된 빵이며(6,32),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가르치십니다(6,33).
오늘 나 역시 군중들처럼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6,30) 하고 묻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우리도 군중들처럼 소유하고, 배고픔과 갈증을 충족시키기 위한 빵을 찾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면 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수록 하느님이 아닌 물질과 세상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 길은 불행과 죽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 참 행복을 바란다면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예수님을 믿고(6,35), 그분께 집중해야만 합니다. 생명과 관계를 맺어야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어떻게 ‘생명의 빵’을 나누고 있습니까? 믿는 이들과의 만남에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외모, 명품, 재물에 대한 관심, 다른 이들의 약점을 들추고 험담을 늘어놓으면서 생명의 빵을 나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신앙인들끼리의 만남이나 교회 활동에서 생각으로는 예수님을 중심에 모신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돈과 효율을 따질 때도 적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신앙인들 사이에서조차 돈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면 우리는 배를 채울 빵을 찾는 군중들과 무엇이 다를까 성찰해봅니다.
또한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드러나고 나누어져야 할 자리를 자신의 지위나 능력, 지식과 경험으로 채운다면 영원한 생명에 얻지 못할 것입니다. 사제, 수도자, 교회 내 지도자들과 봉사자들이 존경받고 대접받는데 익숙해져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 자리가 바로 무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도 참 행복, 영원한 생명을 위해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여 그분과의 생명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현세 욕구 충족과 소유에 목숨을 걸지 않고, 생명의 빵에 맛 들이며 생명을 호흡하는 행복한 날이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