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이제껏 세상을 향하여 설교를 하셨으나 아무 결실 없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12,36-43).
이제 그분께서는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13,1), 당신 자신을 내어주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리고는 제자들과 최후만찬을 하시며 그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13,1-30).
그리고는 유다가 떠나가 버린 상황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34)
사랑하되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이 새 계명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이 어떠했는지 회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새 계명은 형제를 미워하거나 동포에게 앙갚음하지 않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레위 19,17-18)는 유다교 전통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곧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소극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자신을 사랑의 기준으로 삼는 것과도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계명은 사랑의 출발점과 기준을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께 두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습니다.
뿐만 아니라 새 계명은 예수님의 조건없는 자기 봉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사랑의 새로운 척도와 본질을 제시해줍니다.
그 사랑은 매우 적극적이며 모두를 사랑으로 아우르는 포괄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철저히 하느님의 뜻, 곧 자비와 선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오직 인간의 행복과 생명 공동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위한 사랑 때문에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치신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자기 봉헌이야말로 제자들과 세상에 대한 그분 사랑의 절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타자'에게 전부를 내어주는, ‘철저히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그래서 늘 자신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과 차별을 겪고 소외당하는 이들에게로 향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돈과 명예, 권력의 추구, 이해득실을 따지는 계산, 경쟁의 추구와는 무관합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공동선을 위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우선 선택하셨으며,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온갖 차별과 불평등을 철폐하는데 목숨을 거셨습니다.
그렇게 그분은 자신이 아닌 하느님의 자비와 선이 드러나도록 자신을 희생제물로 봉헌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감성적인 분노의 폭발이나 인간의 힘에 기댄 저항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실현하기 위해 '낮추고', '비우고', '작아지는' 철저한 가난을 통해서만 가능한 십자가의 사랑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려면 바보가 되어야 한다고 했던가요.
이제 자기만 알고 손해보지 않으려 하며, 오해받고 무시당하면 발끈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잘해주는 행동을 그만두어야 할 때입니다.
자존심이나 이익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 때문에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지...
오늘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예수님의 최후의 말씀을 나의 사랑의 궁극적인 근거로 삼아, 서로 앞을 다투어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15,13) 거룩한 바보의 사랑을 하는 우리이길 소망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실로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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