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이 깊어지면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지나친 슬픔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파괴를 낳으며, 파괴는 죽음을 낳고, 죽음은 다시 슬픔을 낳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요?
슬픔은 사랑, 의존, 관계의 상실로 마음이 아파 울고 싶거나 또는 몹시 괴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자신이나 남의 불행과 실패가 떠오르거나 예상되어 억울하다고 느낄 때 수반되는 정서이기도 합니다.
대상을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신뢰할수록, 그리고 상실이나 관계단절이 돌이킬 수 없을 때 더 깊은 슬픔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통한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은 없겠지요.
성경에 따르면 두 가지 슬픔이 있습니다.
하나는 재물과 명예, 권력 등에 대한 염려나 소유와 관련된 현세적 슬픔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 뜻에 맞는 슬픔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를 자아내어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세적 슬픔은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 (2코린 7,10)
현세적 슬픔은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과 물질에 중심을 두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근심은 바로 현세적인 슬픔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그들은 “있고 없음”에 초점을 두었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영원성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16,20)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슬퍼하는 제자들의 ‘현세적 슬픔’을 ‘하느님의 뜻에 맞는 슬픔’으로 바꿔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보면 슬픔도 기쁨도 예수님 때문에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게 슬픔과 기쁨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갈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쁨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충족되었을 때 느끼는 흐뭇하고 흡족한 느낌이나 마음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하는 이 기쁨은 그 누구도 빼앗아가지 못하는 영원한 것입니다 (16,22).
슬퍼하게 되는 것도 기뻐하는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사랑해서 슬퍼하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현세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잃게 되면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게 되겠지요.
반대로 그런 것을 더 많이 얻고 누리게 되면 기뻐하게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재물과 권력, 명예 등의 소유와 관련해서 슬퍼하거나 기뻐하는 가련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소유와 감각에서 해방되어 예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해서 슬프고, 그분과 함께해서 기쁜 우리였으면 합니다.
우리에겐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없음이 슬픔이요, 사랑과 정의와 생명의 하느님을 소유함이 참 기쁨이며 행복임을 깨닫는 오늘이길 바랍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