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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프란치스코) OFM

~ 부활 제 6주간 목요일 / 기경호 신부님 ~

 

예수성심께 바치는 자비의 기도에 관하여


부활 6주 목 요한 16,16-20(16.5.5)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You will grieve but your grief will turn to joy."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는 원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상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이별과 다시 만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6,16)

이 말씀은 육신의 죽음을 맞겠지만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을 이길 수 없고 죽이지 못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일으켜지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랑을 보여주시고

박해와 죽음의 상황에서도 살아갈 준비를 시켜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오히려 생명을 주고, 어둠에 빛을 밝히시며,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주시는 길이요 문이심을 보고 체험해왔음에도

 그분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절망하고 슬퍼합니다.

우리 또한 영적인 메마름,

 하느님의 부재 체험,

 무의미, 사회 부조리를 경험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며 절망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많은 순간 고통과 시련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그것 너머의 의미,

곧 그것을 통해서 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지나온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다고 깨닫는 것은 어리석음이 아닐까요?

우리도 고통 없는 인생, 불의가 닥치지 않는 평온한 삶을 원하고,

 또 그렇게 살다가 겪는 아픔과 시련과 슬픔에 대해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상황을 피하거나 부인하려 들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의미를 찾으려 하기보다는 거부하고 저항하며

 자기식대로 반응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특히나 내가 원하지 않은 고통과 빈곤, 육신의 병과

 영혼의 어두움과 불행을 겪을 때면 왜 하필이면 이런 것들이

나에게 주어지는지 묻곤 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상황에서 자비하시고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시는 것일까 하며 의심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세상에 의미없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행복은 고통과 환란을 거쳐 오는데

우리는 고통의 한복판에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제나 내 곁에서 서성대는 고통의 한복판으로 들어갈수록

 그 고통의 원인을 곧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고백록'에서 깊이 있게 성찰하였듯이

 고통과 죄악은 주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에서부터 나오는 죄로 기우는 경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근심 저편의 기쁨을 보지 못하는 것은

나의 교만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교만은 십자가 너머의 부활을 알아보는 눈을 가려버립니다.


그 결과 내 뜻대로 되지 않아 고통스럽고,

내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오늘도 교만과 탐욕, 자신만 아는 소아적 이기심을 벗어던지고

 십자가의 주님과 더불어 고통을 받아들임으로써,

근심을 기쁨으로 바꿔주시는 주님을 뵙고

다 함께 영원한 기쁨 안에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행복으로 가는 길이겠지요!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