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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부활팔일 축제 내 금요일 / 오상선 신부님 ~

2021년 4월 9일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2021.04.09.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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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의미 깊은 만남의 장이 펼쳐집니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요한 21,3)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뒤로 하고 몇몇 제자들이 다시 고기를 잡으러 생업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되살아나신 그분을 만난 놀라움과 기쁨은 잠시이고, 부활의 메시지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직 감을 잡지 못한 것 같지요.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요한 21,6)
한때는 고기잡이가 전문 영역이었건만 오랜만에 돌아온 제자들은 밤새 헛탕을 치고 맙니다. 그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일러주시지요. 그분은 전문 어부는 아니시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이십니다."(요한 21,7)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그분을 알아봅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전한 어부들의 부르심 대목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었지요.(루카 5,1-7 참조) 직관으로든 기억에 의해서든 요한이 그분을 알아봅니다. 사랑하는 존재를 알아보는 건 분명 사랑입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숯불과 빵과 물고기.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호숫가의 밥상은 참 소박하고 따뜻하며 온기 넘칩니다. 상을 차려놓고 누군가를 불러 음식을 나누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의 표현입니다. 밤을 지샌 노동으로 지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옛 삶을 기웃거리다가 빈 손에 실망한 이들에게야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예수님은 배반하고 도망가고 되돌아간 제자들을 탓하지도 다그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상을 차려 주시고 먹이시며 말을 건네고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지금 제자들을 어루만지고 치유하고 회복시킬 수 있는 건 사랑뿐입니다. 아울러 대개 사랑을 베푸는 이도 그 사랑으로 위로를 받기 마련이니, 예수님도 그러시지 않았을까 감히 상상해 봅니다. 

제1독서는 베드로와 요한의 최고 의회 증언 대목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사도 4,10)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켰는지 묻는 종교 지배자들에게 베드로가 "성령으로 가득 차" 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군에 넘겨 죽임을 당하게 한 이들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베드로는 에둘러 답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일은 치유 받은 이의 공로나 믿음에 의한 기적이 아니었지요. 제자들의 능력은 더더욱 아니었고요. 예수님의 신임을 받다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분을 부인했던 베드로는, 자신의 약함을 직면했던 부끄러운 시간을 통해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는 힘이 제 것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을 겁니다. 그 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흘러나온 것이었지요.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이 말씀을 근거로 타 종교를 배척하는 건 하느님 사랑을 너무 편협하게 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교회는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지만 진리와 사랑 안에서 충실히 살아가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배제하지 않으니까요.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구원을 보증하는 탁월한 길인 이유는, 그 이름이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그 사랑의 완성이며 절정이시니까요. 아무도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다정히 우리를 초대해 상을 차려 주시고 귀를 기울여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푹 잠기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두려움과 실패와 부끄러움을 아시는 그분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조촐한 사랑으로 당신도 위로받으시지요. 죄인인 우리에게 구원을 보증하는 사랑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벗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