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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사순 제 4주간 토요일 / 오상선 신부님 ~

2021년 3월 20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2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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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예수님이 등장하시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의견만 무성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백성의 의견이 크게 두 축으로 갈립니다. 그분을 예언자나 메시아로 인정하며, 그 가르침을 놀라워하고, 그분에게서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보는 이들이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처럼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요한 7,40)
"저분은 메시아시다."(요한 7,41)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
긍정의 의견들에 머물러 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수석 사제들, 최고 의회 의원들이 보기에 군중은 "율법을 모르는 저주받은 자들"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경탄과 경외는 진리를 향합니다. 내내 문자에 고착되어 완고히 고집을 부리는 종교 지배층과 달리 그들은 직관적이고 진실된 영감에 충실합니다. 


"우리의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요한 7,51)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는 예수님 추종 세력 중 드물게 바리사이요 최고 의회 의원입니다. 식자층이라고 예수님의 신원을 무작정 거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의 문자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거부하는 이들 앞에서 니코데모는 조심스럽게 식별의 율법적 절차를 거론합니다. 물론 면박만 받고 끝났지만요.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요한 7,52)
예수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이들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바는 출신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탁월한 가르침과 놀라운 기적으로 백성의 희망이 되어 주셔도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베들레헴 출신이어야 한다고 율법 깨나 안다는 이들이 이미 결론을 내린 까닭입니다.


예수님을 긍정하는 이들은 성령께 마음이 열린 자유로운 이들입니다. 새로움을 옷입고 다가오신 진리를 전통이나 관습의 틀에 끼워넣지 않지요. 반면 예수님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이들은 목숨처럼 지키고 싶은 하나의 후렴구를 반복합니다. 완고히 굳은 마음에 빛이 스며들기란 참 어렵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고난 받는 주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 예레미야 예언자의 기도를 들려 줍니다.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예레 11,19)
이는 이사야 예언자의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도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모습입니다.(이사 53,7 참조) 이 표상은 예수님께서 흠도 티도 없는 순결한 어린양으로 의인들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 당신을 희생제물로 제단에 올리신 완전한 제사를 준비하지요.


최선을 다해 힘껏 주님의 말씀을 전했건만 예레미야에게 돌아오는 건 늘 모함과 공격, 조롱과 죽음의 위협입니다. 뻔한 패소의 결말을 전제하고 임하는 재판처럼, 이 세상에서의 순탄하고 무탈하며 전도유망한 영광은 언감생심 예언자에게 돌아올 몫이 아닙니다.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예레 11,20)
때문에 예언자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 드립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사람의 마음과 속을 다 아시는 주님께 변호인은 물론 판사도 되어 달라고 청합니다. 그가 주님 밖에는 의지할 이 없는 '주님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는 편협한 지식과 세치 혀로 예수님을 두고 왈가불가 하는 소음보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신 예수님의 침묵이 더 묵직하게 여운을 남깁니다. 모든 송사를 주님께 맡긴 이는 침묵으로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사순 제5주일을 준비하며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이 한층 더 큰 무게로 다가오는 오늘입니다. 이해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는 예언자의 심정, 예수님의 심정, 하느님의 심정에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각자가 처한 저마다의 상황이 우리를 더 깊은 공감과 일치로 이끌어갈지도 모릅니다. 십자가의 주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여러분의 발걸음을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