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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 성 엑스뻬디또 순교자 / 아스꼴리의 복자 콘라도 기념일 +++

 

축일:4월19일

성 엑스뻬디또 순교자

St. Expeditus

Sant’ Espedito di Melitene Martire

Espedito = che e ingegnoso, dal greco

= that and ingenious, from the Greek

 

 

 

엑스뻬디또란 이름이 몇몇 순교록과 달력에 나와 있으나,

이같은 순교자가 실재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과 시실리 지방에서는 18세기 이전부터 이 성인을 공경해 오는데,

특히 긴박한 상황에 처할때 이 성인에게 기도한다고 전해온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원래는 로마의 군인장교였다.

그러나 신앙을 고백한 후 4세기경 디오크레시아노의 황제의 박해시대때 순교당했다.

성인은 자동차 운전자들의 주보성인이시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순교자.殉敎者

라틴어 martyr

영어  martyr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친 사람. `증인’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증인’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만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복음의 내용을 보증한다는 특수한 의미로 사용되며(사도 10:41)

스테파노(사도 22:20)와 바울로(사도 22:15)에게 적용되었고 묵시록에서는 예수께서 증인이라 불린다(묵시 1:5,3:14).

그밖에 묵시록(6:9,12:17,19:10)에는 예언자의 신분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증언을 내는데 위험한 시대에 증언을 한 증인들이(묵시 2:13,11:3,17:6) 순교자가 된 것이다.

 

2세기 중엽부터 교회는 재판소에 끌려가서 말씀의 증언을 하고도 죽지 못한 자들을 증거자(confessor-es)라 부르고

피로써 증언을 낸 자들을 증인(mar-tyres)이라 불러 양자를 구별하였는데 이는 죽음 자체가 지니는 특수한 의미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순교자를 처음으로 증인이라 부른 것은 폴리카르포 주교의 순교전(165년경)에서였다.

여기서 순교자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곧 하느님의 아들의 그것임을 피흘려 증거한 자 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한편 110년경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스미르나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순교자란 피흘려 죽음을 당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의 실재성을 입증한다고 하여

예수의 죽음을 부정하는 가현주의 자(假顯主義者)들의 주장을 논박하였다.

 

2세기 말엽 이레네오도 순교자를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증인"를 배격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는 과정에서

교회내 순교자들의 특수한 지위를 확인하게 되었다.

순교자가 죽음을 당하면서까지 신앙을 증거할 수 있는 초인적 용기는 순교자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 때문에 가능하다

(디오그네토에게 보낸 편지),

순교는 모든 죄를 없애주는 행위이므로 제2의 세례이며(테르툴리아노)

순교자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므로 순교자는 죽은 후 바로 천국의 영광을 누린다(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

신앙 때문에 죽을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는 순교자는 악의 세력을 쳐 이긴 승리를 증거하고 다시는 고통이 없는 부활을 선포한다(오리제네스).

그러므로 순교자는 완덕(完德)에 이른 자이며 이들로 인하여 역사상 그리스도 교인의 숫자가 놀랍게 증가하였다.

그래서 "순교자는 그리스도 교인의 씨앗이다"라고 테르쿨리아노가 일찍이 설파하였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12월26일

*성 바오로 사도 축일:6월29일

*성 폴리카르포 주교 축일:2월23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축일:10월17일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축일:6월28일


 

 

축일 : 4월 19일

아스꼴리의 복자 콘라도
Blessed  Conrad de’Miliani of Ascoli
Beato Corrado (Miliani) di Ascoli Religioso 
Ascoli Piceno, settembre 1234 - Ascoli Piceno, 19 aprile 1289

 

   아스꼴리의 성 콘라드는 귀족 출신인데 농부 출신인 예로니모 마쉬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는 예언을 들었다.이들은 이때부터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어 프란치스칸이 되었고,수련과 서원도 함께 하였으며, 페루지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도 같은 날에 받았다. 콘라드는 그후 로마에서 설교자로 출발하여 선교지로 뛰어들었고, 예로니모와 함께 리비아 선교단원이 되었다.북 아프리카에서 행한 그의 선교는 대성공이었다. 수천명이 그의 설교와 기적으로 개종하였다. 

   이러한 외적 활동 외에도 그는 극도로 엄격한 생활과 더불어 수난하시는 주님께 대한 특별한 신심으로 불타고 있었다.그는 때때로 가시관을 쓰신 주님을 뵈었을뿐만 아니라,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기까지 하였다.

   그후 건강상의 이유로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예로니모와 함께 프랑스의 교황 대리로 일했고, 예로니모는 신학을 가르쳤다.그후 예로니모는 니꼴라오(니콜로) 4세의 이름으로 성 베드로의 좌를 계승하여, 그가 어릴 때 받은 예언이 성취된 것을 목격한 후 운명하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이탈리아의 아스콜리피체노에서 태어난 콘라두스(Conradus, 또는 콘라도)는 귀족 출신으로 농부 출신인 히에로니무스 마쉬(Hieronymus Masci)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는 예언을 들었다. 이들은 이때부터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어 작은 형제회 회원이 되었고, 수련과 서원도 함께 하였으며, 페루자(Perugia)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도 같은 날에 받았다. 콘라두스는 그 후 로마(Roma)에서 설교자로 출발하여 선교지로 뛰어들었고, 히에로니무스와 함께 리비아 선교단원이 되었다. 북아프리카에서 행한 그의 선교는 대성공이었다. 수천 명이 그의 설교와 기적으로 개종하였다.

   이러한 외적 활동 외에도 그는 극도로 엄격한 생활과 더불어 수난을 받으신 주님께 대한 특별한 신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가시관을 쓰신 주님을 뵈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기까지 하였다. 그 후 건강상의 이유로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히에로니무스와 함께 프랑스의 교황대리로 일했고 히에로니무스는 신학을 가르쳤다. 그 후 히에로니무스는 니콜라우스 4세(Nicolaus IV)의 이름으로 성 베드로(Petrus)의 좌를 계승하여 교황이 되었다. 그래서 콘라두스는 그가 어릴 때 받은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목격한 후 운명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83년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해 승인되었다.
(가톨릭홈에서)

 

교황 니콜로(니꼴라오) 4세
아스콜리의 예로니모라고도 불리우는 예로니모 마쉬는 1227년경 아스콜리 피체노의 리솨노에서 탄생하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마르케 지방 관구의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들어갔으며,

1271년 성 보나벤뚜라에 의해 달마치아 관구장으로 임명되어,

다음해 10월 세 동료와 더불어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의 명에 따라

그리스 교회와의 일치와 관련된 의견을 나누기 위해 비산쵸로 파견되었다.

1274년 5월, 비산쵸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리용에서 있었던 총회에서

세라핌 수도회의 총장인 성 보나벤뚜라의 후임자로 선출되었다.

 

1274년  교황으로부터 제2차 리용 공의회에 비잔틴에서 파견된 사람들과 함께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276년  교황 인노첸시오 5세에 의해 휴전 협정과 일치를 시도하기 위해 다시 비산쵸로 파견되었지만

           같은 해 6월 26일 교황이 서거하는 바람에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1276년  5월  파도바 총회에서 다시 수도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1276년  10월 15일  교황 요한21세는 그를 도메니코 수도회의 총장인 도메니코 다 베르첼리와 함께

           프랑스의 황제 아르디또 필립 3세와 카스틸리아의 알퐁소 10세간의 교황청과 관련한 화평 조약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1227년 12월 이 임무는 니콜로 3세 교황에 의해 재 확정되었다. 
1278년  3월 13일   예로니모 마쉬는 산타 푸덴치아나의 사제 추기경으로 임명되었지만, 교황의 뜻에 따라

           1279년 5월 아씨시에서 있은 총회 때까지 총장으로 있었다. 그는 또한 니콜로 3세 교황의 고문으로

           1279년 8월 14일 발표한 교령 "Exiit, qui seminat"의 작성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280년  7월  같은 교황에 의해 아스 부르그의 루돌포와 가를로 안지오간의 화평 조약의 책임을 맡았고,

           1281년 4월 12일 팔레스타인 교구로 파견되었다. 
1283년  9월 7일  교황 마르띠노 4세는 그로 하여금 약탈자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비테르보로 파견하였다.
1288년  2월    니콜로 4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되어, 1292년 4월 4일 로마에서 서거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현재 로마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모셔져 있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수도회홈에서)

 

 

 

 

 

 

 

 

 

프란치스칸 순교자들

 

 

 

Franciscan Martyrs-LICINIO, Bernardino
1524.Panel.Santa Maria Gloriosa dei Frari, Venice

 

축일:1월16일.

모로코의 순교자들 (+1220)

첫 순교자들: 성 베라르도 사제와 동료순교자
St.Berardus,St.Peter,St.Accursius,St.Adjutus,St.Otto
Santi Berardo, Pietro, Accursio, Adiuto e Ottone Protomartiri dell’Ordine Serafico

 

프란치스코는 1219년 총회 동안 6명의 형제들을 한 그룹으로 하여 북아프리카로 선교파견을 하였다.

그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Vitale, Berardo, Pietro, Accursio, Adiuto, Ottone.

이 그룹의 책임자였던 Vitale는 스페인에서 병을 얻어

무어인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모로코로 가려던 그의 결심을 포기해야만 했다.

나머지 형제들은 Berardo의 지휘 하에 모로코를 향해 여행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먼저 무어인들이 점령하고 있었던 스페인 남부의 Seville로 가서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전파하였다.

그들은 처음에 무어인 왕자 앞에 가게 되었는데, 그 왕자는 그들에게 북아프리카로 갈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그들은 모로코로 건너가서 Miramolin 왕 앞에서 설교를 하였다.

그 왕은 그들을 그 나라에서 추방하였지만

그들은 결의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을 설교하기 위해 다시 모로코로 돌아갔다.

1220년 1월 16일 그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왕의 손에 의해 참수를 당하였다.

교황 식스토 4세가 1481년 그들을 시성하였다.

이들의 순교사화는 Analecta Franciscana III권 579-596쪽에 나온다.

 

 

 

 

축일:10월10일

Ceuta의 순교자들 (+1227)

성 다니엘 사제와 동료순교자

San Daniele e compagni Martiri a Ceuta 
 

Calabria의 관구봉사자 Daniel은 1227년 6명의 동료들

(Angelo, Samuele, Donnolo, Leone, Ugolino, Nicola)과 함께 북아프리카 선교를 떠났다.

그들은 Ceuta에 당도하였는데,

그곳에서 장사를 하던 그리스도교인들이 그곳의 사라센인들에게는 설교를 하지 말라고 충고를 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경고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들이 감옥에 들어갈 때까지 두려움 없이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들은 거기에서 그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써서

그들이 복음을 위해 순교를 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렸다.

며칠간의 고문 끝에 그들은 감옥 밖으로 끌려나와 참수를 당하였다.

교황 레오 10세는 1517년 그들을 시성하였다.

이들의 순교사화는 Analecta Franciscana III권 613-616쪽에 나온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성 베라르도 사제와 동료순교자 축일:1월16일

*성 다니엘 사제와 동료 순교자 축일:10월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