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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 파르잠의 성 콘라도 수도자 / 성 안셀모 주교 학자 기념일 +++

 

축일:4월21일         

파르잠의 성 콘라도 수도자, OFM Cap.
San Corrado (Giovanni Evangelista) Birndorfer da Parzham Cappuccino
Venushof, Parzham, 22 dicembre 1818 - Altötting (Bassa Baviera), 21 aprile 1894
Etimologia: Corrado = consigliere audace, dal tedesco
= audacious councilman, from the German
Saint Conrad of Parzham
Also known as : Conrad Birndorfer, Hansel Birndorfer, Johann Birndorfer, Johannes Birndorfer, John Birndorfer, Konrad av Parzham, Konrad from Parzham
Born : 22 December 1818 at Parzham, Bavaria, Germany as Johann Birndorfer
Died : 21 April 1894 in Altötting, Bavaria, Germany of natural causes
Venerated : 15 August 1928 by Pope Pius XI (decree of heroic justice)
Beatified : 15 June 1930 by Pope Pius XI
Canonized : 20 May 1934 by Pope Pius XI

 

 

 

곤라도(1818 - 1894)는 바바리아 지방 빠르잠 근처의 농촌에서
가난하지만 독실한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복되신 동정녀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매일 로사리오를 바쳤다.

 

젊은 시절을 농촌에서 보낸 후 하느님과 보다 깊은 일치를 위해
자신의 상속권을 포기하고 까푸친회에 평형제로서 입회하였다.

서원 후에는 유명한 "자비의 어머니 마리아" 성지인 알떼팅에 파견되었다.

그는 여기서 성지를 찾아 오는 가난한 순례자들에게 봉사하는 짐꾼의 직책을 받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40 여년 동안 자신의 직책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곤라도는 특히 성체성사에 집중하는 끊임없는 기도 생활로 이름 높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성 콘라드는 파르챰의 바바리아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배우지 못한 시골 사람이지만 매우 신심이 깊었으며, 아홉 자녀를 두었는데, 콘라드는 막내둥이였다.

어릴 때부터 그는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께 대한 깊은 신심 속에서 성장하였다.

양친을 여읜 후, 31세의 나이로 카프친회 평수사로 입회하여 1852년에 서원을 발하였던 것이다.

 

그후 그는 40년 동안 문지기 수사로서 봉사했는데, 순례자들의 무리가 끊임없이 몰려들었으므로,

애덕과 인내를 실천하며 사도적 정열을 불태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것이다.

그는 특히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은혜를 받았고, 미래의 일을 알리는 은혜를 입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사후 40년이 되는 1934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콘라도는 1818년 독일의 바바리아 주 바쏘 교구이 작은 촌 파르잠(Parzham)에서 소박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경건한 모친은 교육을 받아 어려서부터 성덕에 출중해 그 당시는 아주 드물게도 7세에 첫 영성체를 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어렸을 때부터 벌써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누구도 그의 앞에서 예의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자는 없었다.
  그는 어려서 양친을 잃어 일찍부터 고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세상 재물에 휩쓸리는 일은 없이 소년 시절을 깨끗한 백합화같이 보냈다.그것은 물론 그가 신심 생활에 열심했기 때문인데,세속을 떠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답을 지키며 끊임없는 기도로 하느님과 영적 교제를 해 온 덕분이다.참으로 그는 기도를 극히 즐겨 노동으로 피곤해졌음에도 여전히 무릎을 끓고 밤을 새운 적도 여러번 있었다.

 

   이 열심한 청년은 1851년 9월 17일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본받아 카푸친회 평수사로 입회해 수도회의 가난한 수도복을 걸치게 되었다.그리고 1852년에 엄숙한 서원 의식을 마치고 나서는 장상의 신임이 유난히 두터워 중책임인 알도에팅에 있는 성녀 안나 수도원의 문지기 직책을 맡아보게 되었다.

 

 

 

  그는 이 직책에 충실히 근무한 40여 년 동안, 세월의 흐름에 따라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대단히 힘든 때도 있었던 문지기를 조금도 불쾌한 안색을 보임이 없이 성심 성의껏 완수하며, 그 유명한 영지를 찾는 모든 방문객에게 온화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미소로서 접대하여 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콘라도는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라 고요한 수도 생활을 보내며 기도와 고행으로써 숭고한 완덕에 도달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았다. 그리고 그들을 도와 줄때는 무슨 좋은 말씀이나 훈계를 권면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의 애덕은 자신의 양식을 절약해 궁핍한 자에게 베풀어 줄만큼 대단했다. 특히 가난한 이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아이들 측에서도 그를 따르게 되어 그의 훈계를 잘 따랐고, 그도 그들을 만날때 마다 항상 마음을 터놓고 재미있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빵 같은 것을 나누어 주기 전에는 그들에게 기도를 바치도록 했다. 이는 아직 죄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의 기도야말로 하느님께서 풍부한 은총을 내려 주시기 때문인데, 콘라도는 사실 그들의 기도에는 많은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몇년 후 그 아이들 중 몇명은 사제가 된 자도 있었는데 이는 오로지 콘라도의 착한 지도와 기도 덕분이라 하겠다.

 

 

 

  "우리는 기도해아 한다!" 이는 늘 콘라도가 했던 말씀이다. 그는 그 말과 같이 실지로 기도를 많이 했다. 새벽 3시만 되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를 바치기 위해 성당으로 급히 갔다. 그리고 그가 기도에 몰두해 하느님과의 상통으로 말미암아 만사를 잊고 있을 때 그의 입에서 불꽃이 나오며 그의 몸에서 후광(後光)이 비치는 것을 본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수사 콘라도는 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기도했다. 그는 또한 수난하신 주님께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매일 십자가의 길을 바치며 때로는 몇시간이나 십자가 앞에 무릎꿇고 있을 때도 있었다.  수사 콘라도의 생애는 고요히 지나가, 마침내 하느님께서 1894년 4월 21일 이 충실한 종을 영원한 나라로 부르셨다. 때는 마침 토요일 저녁이었고 삼종소리가 읍내를 지나 은은히 먼 들로 사라지는 때였다. 그의 죽음을 전해서 들은 사람들은 모두 "성인이 돌아가셨다"고 하며 그의 죽음을 섭섭히 생각지 않은 이 없었다.

 

  살아 있었을 때 자선사업을 많이 행한 콘라도는 사후에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많은 가난한 사람들, 고생하는 사람들은 그가 천국에 있으면서 계속 자기들에게 도움을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때로는 그의 묘지를 순례하고, 때로는 그의 전구를 구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풍부한 효험이 있는 것을 보고 콘라도에 대한 신뢰의 정은 점점 높아졌다. 그의 전구로 많은 은혜를 받은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1930년 6월 15일 복자품에 오르고, 다시 1934년 5월 20일 성령 강림 대축일을 계기로 장엄한 예식의 거행중에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맥주 맛을 잘 아는 거룩한 문지기, 파르잠의 성 콘라도     

 

맥주와 성덕
"맥주 두 조끼 말이오? 독일 출신 처녀라면 맥주 두 조끼로 술이 취할 리가 없지 않소!" 당시 뮌헨 대주교는 시성조사 심문관에게 웃으면서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 시성조사 심문관이 젊은 여인들을 포함한 모든 형제회 손님들에게 맥주 두 조끼씩 마실 것을 줌으로써 여성 혼취를 조장했던 것 같은 그 시성 후보자의 성덕에 이의를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그 시성 후보자가 카푸친회의 거룩한 문지기였던 '파르잠의 성 콘라도'였음을 알고 있다.

그는 남독일의 농부 아들로서 자기 민족의 장단점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어서 와, 한 잔 더 하십시오."라는 말로 콘라도 성인은 나름대로 물 한잔 주라는 복음의 권고를 형제회를 찾는 손님들에게 실천했다. 그러므로 순례자가 많이 올 날 아침이면 콘라도는 맥주 양조업자 형제에게 "오늘은 맥주 많이 만들어 두게나."하고 미리 대비하곤 했다.
 



신앙심이 깊은 젊은 농부
바르톨로메오 비른도르퍼(Birndorfer)와 게르트루다 니더마이어(Niedermayer)의 아들로 1818년에 태어난 콘라도는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출생지는 '파르잠(Parzham)'이라는 바이에른의 농촌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 성적이 좋았으나 어버이가 젊은 나이에 죽어서 요한은 농사에 집중해야만 했다. 그 시절의 요한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종교적인지, 얼마나 기도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는지 잘 알고 있다. 비바람을 무릅쓰고 성당에 다녔고, 미사에 참석하는 것 말고도 오래 동안 혼자서 기도하곤 했다. 그는 특히 성모신심이 깊었고 바이에른의 성모성지들을 걸어서 순례하기도 했다.


카푸친 평형제 되다
수도생활에 대한 매력을 느꼈던 요한은 결국 1849년에 농장에 대한 상속권을 포기하고, 알퇴팅(Altötting) 성모성지에 있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평형제로 입회하여 '콘라도'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때는 이미 만 31살의 성인이었다. 몇 년간의 양성을 받은 후에 그는 알퇴팅 형제회의 문지기라는 사명을 받았다.


 

수줍음이 많은 문지기
그로부터 49년 후 그가 죽는 날까지, 콘라도 형제는 매일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이 문지기 봉사에 최선을 다했다. 타고난 내성적인 성격 탓에 기도 하는 것과 고독한 생활에 매력을 느꼈지만, 알퇴팅 형제회의 정문 앞은 공교롭게도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하지만 콘라도는 이에 개의치 않고 본연의 의무를 충실히 했으며, 특히 멀리서 온 순례자들을 반갑게 환대했다. 그 누구든지 콘라도에게서 건강에 좋은 음식과 시원한 맥주가 담긴 '슈타인'이라는 독일식 큰 잔을 늘 받을 수 있었다.


스스로도 맥주를 마시기를 좋아함
콘라도 스스로도 매일 시원한 맥주 한 잔 정도를 즐겼다고 하는데,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로마 성성의 관리인들은 시성 후보자가 매일 맥주를 즐겨 마셨다는 사실에 놀라워 그 맥주를 조사하기로 결정하였단다. 그래서 콘라도 형제가 마셨던 맥주 한 통을 독일에서 로마로 보내라고 명명하였는데, 20세기 초였던 그 당시 맥주를 로마까지 보낼 수 있는 효과적 교통수단은 기차뿐이었다. 그 시절에 기차에 냉장고가 있을 리 만무했으니 한 여름 뙤약볕에 도착한 그 맥주는 시원하기는커녕 맛이 갈 수 밖에 없었다. 관리인들은 그 맥주를 한 입 맛보고는 '그 사람은 분명 이 맥주를 고행으로 마신 것이로구나!'하고 결론을 내렸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준 형제
콘라도 형제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준 형제였다. 특히 가난한 집의 어린 아이들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잊지 않았고, 그 아이들을 위한 덕담dmf 즐겨 들려 주곤 했다. 때로는 찾아오는 거지들이 그가 내어주는 소박한 음식에 불만을 터트리며 메뉴를 바꾸라고 귀찮게 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자비로운 콘라도 형제는 그들의 모든 요구를 기꺼이 응했다. 한번은 콘라도 형제가 그들에게 '오늘 우리는 빵과 국물 대신에 국물과 빵을 대접할 것입니다.' 라고 농담을 한적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건네받은 뜨거운 국물을 나이 많은 콘라도 형제의 얼굴에 던져버렸다. 너그럽고 인내심 많은 콘라도는 마냥 미소를 지으며 아무일 없는 듯이 얼굴을 닦고 계속 일을 했다.



욥과 같은 대단한 인내
인내심은 콘라도가 가진 탁월한 덕행이었다. 아이들은 그 인내심을 실험하려고 짓궂은 행동을 많이 했다. 초인종을 울리고 그가 나타나기 전에 도망간 적은 흔한 일이었고, 부재중인 사제들의 이름을 외우고 차례로 와서는 그 사제를 불러달라고 부탁하여 헛걸음을 하게 만들었다. 나이 든 몸인데도 불구하고 콘라도 형제는 아이들의 요구에 아무른 불평없이 끊임없이 계단에 오르내리며 확인을 했고, 그것도 모자라 그 어린 손님들에게 정중히 사과를 표하곤 했다. 그래도 그 철없는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콘라도에게 달려가서 예전에 그가 가르쳐줬던 짧은 기도를 함께 바친 다음 음식 몇 조각을 받아 먹곤 했다.



콘라도 형제의 매일 일정표 
콘라도의 일상적 하루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수년 동안 앓고 있었던 제의실 담당 형제를 대신하여 새벽 3시반이나 4시쯤에 성당문을 열었고, 4시 반이면 은총들의 경당(Gnadenkapelle)에서 5시 새벽미사를 하기 위해 사제를 깨웠다. 그리고 미사에서 복사 역할을 했다. 콘라도는 성체 신심이 매우 깊었는데, 다행이 영적지도자의 도움으로 그 당시 매우 드문 '매일 영성체'를 할 수가 있었다. 이외에도 매일 아침에 한 번 더 미사에 참석하여 기도에 대한 열성을 보이며 자주 묵상으로 빠져들었다.]

정식으로 문지기의 의무가 시작되는 아침 6시부터는 '미사예약일지'를 확인하여 신자들이 요구한 한 성물과 축복된 씨앗이나 약초로 만든 약을 정리했고, 신자들이 예물을 전할 땐 기도할 때에 기억해 주겠다고 약속을 하곤 했다. 미사를 위하여 재단을 준비하였고 늘 제의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방문하는 사제들에게 아침식사를 대접하는 일도 콘라도의 일이었고, 축복이나 고해 성사를 구하는 손님을 위하여 사제 형제들을 부르는 일도 콘라도의 일이었다.

그 지역에는 손님이 왔을 때 맥주와 먹을 것을 내어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한 형제회 수호자가 이 풍습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것을 끝내려고 했다. 그러자 순례자들의 불만이 드높아졌는데 이 모든 불만을 문지기인 콘라도 형제가 다 들어주어야만 했다.


 

오전 11시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수프를 받으러 오곤 했는데, 그럴때마다 콘라도는 부엌에 가서 국물과 고기 완자를 요리사 형제한테 달라고 부탁했다. 한번은 콘라도가 나타나자 주방장 형제가 "모든 냄비들을 덮어라! 아니면, 그가 모든 것 다 빼앗아갈 거야!” 하고 농담을 했는데, 그러자 콘라도는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너그럽게 갚게 될 것이오."하고 대답하곤 했다. 콘라도의 가장 행복한 시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과 수프를 먹여줄 때였다.
 

보통 12시가 되면 공동체 기도에 참석하고 점심식사를 하는데, 식사 때에 초인종이 울릴 때면 콘라도는 한사코 먼저 일어나 정문으로 갔다. 돌아오면 음식이 다 식은 상태일 때가 많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12시 반부터 오후 2시가지 쉬는 시간이었지만 콘라도는 쉬지 않고 정원에서 산책을 하거나 은총들의 경당 제단 앞에서 기도를 하거나, 아니면 계단 밑에 있는 작은 창고에 들어가 감실을 향해 조용히 묵상을 하곤 하였다.


 

오후가 되면 고해성사를 받으러 오는 사제들을 맞아들였고, 틈틈히 신자들이 털어놓는 고민들을 들어주며 할 수 있는 만큼 그들을 위로해주곤 했다. 오후 4시쯤에는 학교를 마치고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빵 조각을 쥐어 주기도 하고, 그 사이에 시간이 있으면 성경 구절을 읽었고,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과 같은 여러 종교서적을 읽곤 했다. 오후 7시, 저녁 식사후 손님이 없을 경우, 성체조배를 하거나 묵주를 만들곤 했고, 저녁 9시가 되면 성당문을 닫은 다음, 하느님과 시간을 홀로 가지곤 했다. 그러다가 가끔 기도에 지쳐 깜빡 잠에 빠진 일도 있었다. 


 

콘라도의 침묵과 기도
침묵과 기도와 묵상은 그에게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음으로써 침묵의 분위를 계속 유지하려 노력했다. 말해야 할 때에는 가능한 한 하느님이나 거룩한 일들에 대하여서만 이야기하곤 했고, 항상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도록 노력했다. 시사나 뉴스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1873년, 아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콘라도 자신의 내면생활을 대해 묘사한 구절이 있다.


 

"나의 생활방식은, 사랑하고 고통받고, 경탄하고 흠숭하며 나같이 불쌍한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해 감탄하고 놀라워하여 마지 않는 거야. 이토록 큰 하느님의 사랑을 헤아리다 보면 끝이 없게 된다. 여기에 나를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 이럴때 난 좋으신 하느님과 아주 밀접히 결합되어 있단다. 내가 해야 할 수많은 일 중에서, 분주하면 분주할수록 나는 하느님과 더욱 일치되어 있음을 느껴. 이때 나는 마치 사이 좋은 부자지간처럼 그분과 아주 다정하게 사랑을 나눈다. 나는 그분께 내 마음을 짓누르는 나의 온갖 사정을 호소하고 도움을 청하지. 그리고 마치 천진난만한 아기처럼 이러저러한 은총을 주시라고 부탁드린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다시 용서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고, 나는 아주 착한 아이가 되고 싶기 때문이지. 난 그분을 정말 사랑하고 싶다....(중략)... 나는 하느님 안에서 항상 만족하고 행복하다. 나는 기쁨이건 고통이건 그 모두를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으로 발아들여. 그분은 내게 무엇이 제일 좋을지를 아시니까. 이렇게 나는 하느님안에서 항상 행복하다. 나는 그분을 올바로 사랑할려고 노력해. 내가 그분을 그토록 적게 사랑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야. 이것만이 나의 유일한 슬픔이다. 그래, 나는 사랑에 불타는 세라핌 천사가 되고 싶다. 나는 좋으신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모든 피조물을 불러 도움을 청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께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매일 십자가의 길을 바치며 때로는 몇 시간씩 십자고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같은 편지 안에서 이에 대하여서 다음과 같이 썼다.

"십자가는 나의 책이지. 십자가는 한번 쳐다보기만 해도 여러 가지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가르쳐 준다"
 



문지기 콘라도는 천국의 문 앞에서 환영을 받다
1894년 4월 21일, 마지막 순간까지 의무를 다한 파르잠의 콘라도 형제는 "이제 영원을 위하여 준비해야지.." 하면서 병자성사를 받고 숨을 거두었다. 알퇴팅에 사는 한 사진가는 죽음 자매가 안긴 콘라도 형제의 시신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은 우리가 갖고 있는 콘라도의 유일한 사진이다. 콘라도는 빠른 시일에 1930년에 복자가 되어 1934년에 교황 비오 11세로부터 시성을 받았다.

40년 동안이나 지상에서 하느님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따뜻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던 거룩한 카푸친의 문지기는 이제 어린양의 천상 잔칫상에서 영원한 대접을 하느님께로부터 받고 있다.
(카푸친작은형제회홈에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ofmcap)의 뿌리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를 가장 닮아 "제2의 그리스도" 라고 불리우는

아씨시의 작고 가난한 성 프란치스코에게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철저하게 따랐으며

그의 형제적 사랑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물에게까지 이르는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1209년에 성 프란치스코는"작은 형제회" 또는 "더욱 작은 형제들"이라 불리우는 수도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이"작은 형제회"안의 개혁 운동으로 시작 되었는데

1528년 7월 3일 교황 클레멘스7세의 대칙서’Religionis Zelus’에 이어,

1619년 교황 바오로3세에 의해"작은 형제회" 세 개의 가지

- OFM(작은형제회),OFMConv(꼰벤뚜알작은형제회), OFMCap(카푸친작은형제회)-중의 하나로 인가되었습니다.

 

카푸친 형제들은

관상기도,고행,엄격한 가난,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였으며 복음에 대한 열렬한 설교자들이었습니다.

형제들은 단순한 전례 성서에 기반을 둔 설교,가난하고 소박한 생활 양식때문에 보통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카푸친이라는 이름도 긴 세모꼴 두건(capuce)이 달린 갈색 수도복을 입었던 형제들에게

대중들이 붙여준 카푸치니(capucini)라는 별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

*성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9월17일

 

 

 

 

 

 

카푸친은 기도의 교사로서

 

플라비오 로베르또 형제(o.f.m.cap. 전 총봉사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기도의 사람이기도 하고, 기도의 교사이기도 했다.

첼라노의 토마스는 우리에게 프란치스코가 "기도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기도 그 자체가 된 사람이었다"

(2 첼라노 95)고 이야기해준다. 

 

성 보나벤뚜라는  프란치스코가 그 기도 안에서 찾게 된 관계를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한다.

 "현시를 봄으로써 그분의 영혼이 녹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상처들이 항상 그 눈앞에 있게되는

그 만큼 그리스도님의 수난에 대한 기억은 그 정도로 긴밀하게 그 분의 마음에 되새겨 있었다.........

프란치스코가 자기가 그 숨은 보물 , 그 값진 밝은 진주를 찾아냈다고 느끼게 되었다......."(대 전기 1.4)

 

프란치스코의 둘레에 있는 이들을 따뜻하게 하는 불은 기도의 결과인 그 불이었다: 

그 불을 다른 사람들이 매력적인 것으로 보아서 그 불은 그들을 이끌어

프란치스코를 기도의 선생님으로 삼아 그에게 찾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타인과 그 개인 경험을 나눌 수 있기 전에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발전하여 성숙해져야 했다.

고상 앞에서 바쳤던 그의 첫 기도에서 우리는 건전한 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님의 거룩하고 진실한 뜻을 실행하도록.....제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 주소서".

이 초기 때에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님으로 가득 차게 되었는데

 "사실 예수님께서 그분의 마음을 사로잡으셨다..."(1 첼라노 115) 

 

’주의 기도 풀이’에 이르렀을 때에는 프란치스코의 기도가 조금씩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자기에 대한 근심은 타인과 함께 기도하는 것으로 변모되어 있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지극히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

모든 이를 당신은 사랑하도록 저희이 힘이 닿는 대로 그들을 이끌어...

저희 몸과 같이 저희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노래"에서 그 기도의 사회적 일면은 더욱 더 깊게 된다.

맨 처음으로 서방 그리스도의 영성에서

자연의 요소들은 "형제 자매" 라는 친밀한 용어로 묘사되는 존경을 받는다.

프란치스코는 그와 함께 기도하도록 온 누리(우주)를 초대한다.

같은 주제는 1221년의 회칙 23장에 영향을 끼친다.

형제들의 기도에 달려있는 그 기쁨은 그들과 함께 노래하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싶어했던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되기 시작했다.

 

프란치스코와 그 첫째 형제들은 교회에 새롭고 놀라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즉 그들은 수도승원에서만 찾게 되었던 그 기도와 하느님께 대한 그 경험을 장터에 가져 나갔다.

프란치스칸 샘들에서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은

어떻게 은둔을 찾았다가 그 은둔의 열매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주었느냐는 여러 개의 예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기도는 흘러 넘쳐서 다른 사람들을 향했다.

그들은 하느님께 접근하는 것에 관하여 새 교훈을 세상 만민에게 가르쳐 주었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제자들이 다른 이들에게 남겨 준 가르침의 초점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느님께 완전히 점령되도록 우리는 은둔의 분위기를 창조할 필요가 있다. .

(은둔소를 위해 쓰신 회칙; 제1회칙 7장, 인준 받은 회칙 5장과 8장,2 첼라노 96)

2. 기도는 사람이 하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이 되는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종들은 기도나 어떤 올바른 일에 항상 종사해야 합니다"(제 1회칙 7장)

3. 정신적 기도와 관상은 길러질 일이다.(보나벤뚜라 대 전기 4장3절)

4. 형제들의 첫째로 가는 성소는 기도하는 것이다.

   일과 학문은, 이들이 "거룩한 기도와 거룩한 신심의 영을 끄지 않을 그 만큼만"

(인준 받은 회칙5장, 안또니오 성인에게 보내신 편지) 허가 되어있다.

5. 기도는 인간 수고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은혜 또는 선물이다.(제 1 회칙 17장)

6. 깨끗한 마음과 단순한 의향은 기도 생활에 있어서 깊어질 조건이다.(인준 받은 회칙 5장,제1회칙 22장)

 

프란치스코는 이 교훈들을 형제들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말로써 가르쳤다.

그러나 이 가르침들을 가장 많이 입증하는 것은 그가 살았던 기도 자체였다.

 

프란치스코가 기도와 은둔에 집중한 바로 그것은 16세기의 카푸친 개혁의 회원들이 가장 소중히 여긴것이었다.

첫 카푸친 형제들이 알바치나에 있는 산타마리아 델라콰렐라라의 성지에서 1529년에 모였을 때에

그들은 기도와 관상과 관련되어 있는 프란치스코의 가르침과 생애의 전면에 온전히 집중하였다.

 

"은둔 생활 양식의 더욱 작은형제들의 회헌"은 공동체를 도전하며 정신적기도에 4시간을 지내게 하는것이었다.

이러한 생활의 틈새를 마련하기 위해 성무일도는 노래와 장식없이 바쳐야 했고, 과도한 음성기도는 피해졌다.

형제들은 외딴곳에 살아야 했으며 개인기도와 신비적 관상은 개혁의 중심거리가 되는 것이었다.

수도생활의 관상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은

포쏨브로네의 루도비꼬의 개인적인 인격과 가말돌리회의 은둔 수사들의 영향을 드러낸다.

 

로마에 있는 성 에우페미아 수도원에서 1645년 11월에 형제들이 다시 모였을 때에

관상과 봉사의 조화를 제안했다.

그러나 기도가 아직도 그들의 생각에서 우선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기도가 형제들의 영적인 교사이므로 ,그리고 신심의 영이 미지근해지지 않도록...

우리가 미지근하고 미온적인 이들을 위해서는 적어도 2시간의 기도를 제정하는데

과연 참으로 영적인 형제들은 늘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1535년 회헌 41조)

알바치나 문서에서 보게 되는 4시간의 묵상을 의무적인 2시간으로 줄였으며

은둔-관상의 일면을 수도회의 사도적 부르심과 균형에 두려는 노력이 있었다.

 

관상은 형제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설교하는 이들로,

신적인 친밀감에 성장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이들이 될 능력을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활동주의에 대한 조심은 언제까지나 카푸친회 은사의 특성으로 남게 될 것이다.

다음의 원칙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카푸친 전통의 일부로 재확인 될 것이다.

 

카푸친은 자기 자신이 기도함으로써 기도의 교사가 될 줄을 배운다.

1536년의 문맥의 대부분은 아직도 우리 현 회헌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복되신 예수님 친히 그들로 하여금 그냥 말로만이 아니고 훨씬 더 많이 실행으로,

사랑의 충만에서부터 말하게 자극시키실 수 있도록 설교자들은 그 예수님을 그들의 마음에 새겨서

그분께 평화로운 점유권을 드리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

 

카푸친들이 반종교 개혁의 운동에 이바지한 초점은 영적 쇄신을 이루려는 그들의 노력이었다.

그들은 개인 기도와 관상의 교실에서 배웠던 그 교훈들을 말과 모범으로서 설교하고 가르쳐 주었다.

 

21세기의 카푸친들도 그 똑 같은 초점을 현대 세상에 전해 주기를 계속해서 소원하고 있다.

이것은 1973년에 떼제에서 확인 되었는데 거기서 제3차 수도회 전체 공의회는 다음의 구절들을 긍정했다.

"성령의 자극을 받아서 기도는 인간 마음의 지극한 필요를 표현하는 것이며,

사랑의 호흡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6조)

"형제들은 어디서나 신자들 가운데와 특히 우리 형제회들과 온 프란치스칸 가족에서 일하게 될

특별히 수련을 받은 기도 및 영성 생활 고무자들을 필수적으로 경험하고 있다"(24)

1982/1990년의 회헌은 이 모든 점을 모으기도 하고 확장하기도 한다.

"기도 , 특히 내적인 기도의 영을 하느님 백성 가운데서 극진히 기릅시다"(56조 6항)

"우리는 그 분의 사랑의 증인들로서 모든 이들을 하느님께 대한 찬미에로 초대하여 평화와 참회를 전하면서

 세상을 두루 다닙시다"(46조 7항)

현대 세상은 카푸친이 품는 다음의 가장 깊은 소망을 이루어짐에 준비된 상태로 있다:

즉 기도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 할 줄도 가르치려는 그런 소망 말이다 

(카푸친작은형제회홈에서 www.capuchin.or.kr)


 

 

축일:4월21일

성 안셀모 주교 학자

St. Anselmus, Archiep. et D

St. ANSELM of Canterbury

Sant’ Anselmo d’Aosta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Born:1033 at Aosta, Piedmont, Italy

Died:21 April 1109 at Canterbury, England; body believed to be in the cathedral church at Canterbury

Canonized:1492 by Pope Alexander IV

Doctor of the Church in 1720 by Pope Clement XI.

Representation:Benedictine monk admonishing an evildoer;

archbishop; ship; with Our Lady appearing before him; with a ship

Anselmo = protetto da Dio, Dio gli e elmo, dal tedesco = protect from God, God and elmo, from the German

 

 

 

성 안셀모 주교 학자는 1033년 겨울 이탈리아 북부 아오스타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1059년에는 노르망디의 베크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도원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067년에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된 안셀모는 제자인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서 많은 작품을 저술하였고,

윤리와 종교 교육에 힘씀으로써 베크 수도원 학교를 명문 학교로 발전시켰다.

 

1078년에 수도원 원장이 된 그는 박학다식과 성덕에 대한 소문을 듣고 수많은 청년들이

베크 수도원으로 몰려들자 그들을 한 곳에서 교육할 수 없어 프랑스와 영국 여러 곳에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대주교로 임명된 안셀모는 영국 국왕의 교회 직무에 대한 간섭에 반발하고 교황의 권위를 위해 투쟁하며

성직자들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국왕은 물론 다른 많은 주교들로부터도 배척을 받았다.

1093년까지 베크를 떠나지 않던 그는 국왕 윌리엄 2세와 격렬한 논쟁을 하였고

1097년 영국을 떠나 로마로 망명했다.

그는 영국 국왕을 상대로 하여 교회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 바치면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서, 그 당시 이미 위대한 신학자이며 ‘스콜라 학파의 아버지’란 칭호를 얻고 있었다.

그는 1109년 4월 21일 캔터베리에서 운명하였고 1720년에 교황 클레멘스 11세가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성 안셀모 주교의 [프로스로기온]에서

(Cap. 14.16.26: Opera omnia, edit. Schmitt, Secovii, 1938, 1,111-113.121-122)

 

당신을 즐기도록 당신을 알고 당신을 사랑하게 해주소서

 

내 영혼아, 네가 찾고 있던 것을 발견했느냐?

너는 하느님을 찾고 있었는데,

하느님은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높으시고 그분보다 더 좋은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너는 그분이 생명 자체이시고 빛이시며 지혜이시고 선이시며 영원한 행복이시고 복된 영원이시며

어디에나 언제나 계시는 분이심을 알게 되었다.

 

나를 형성하시고 또 변모시키신 내 주 하느님이시여,

갈망하는 내 영혼에게 당신은 내 영혼이 본 것과 다른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이 영혼이 갈망하는 것을 환히 보게 해주소서.

내 영혼은 보는 것 이상으로 보고파 애달아 하지만 그가 본 것 외에는 어둠밖에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아니, 그는 어둠도 보지 못합니다. 당신 안에는 어둠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은 자신의 어둠 때문에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여, 당신이 거하시는 빛은 진정코 다다를 수 없는 빛입니다.

그 빛을 꿰뚫어 거기에 계신 당신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빛은 나에게 너무도 강렬하여 나는 그것을 직접 보지 못하오나,

나의 연약한 시력이 태양 자체를 직접 바라보지 못하면서 태양의 빛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보는 것처럼

나도 무엇을 보든지 당신의 그 빛으로 말미암아 보는 것입니다.

 

나의 지성은 그 빛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그 빛 자체는 너무 눈부시어 내 지성은 그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내 영혼은 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내 영혼의 눈은 그 빛의 광휘로써 눈부시고 그 충만성으로 압도되며 그 광대함으로 인해 당황하고

그 넓이로 말미암아 어리둥절해집니다.

 

오, 높으시고 다다를 수 없는 빛이시여! 오, 완전하고도 복된 진리이시여!

나는 당신과 이렇게도 가까이 있는데 당신은 나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계신지요!

나는 당신의 시야 안에 들어 있는데 당신은 내 시야에서 얼마나 멀리 계신지요!

당신은 온전히 처처에 계시오나 나는 당신을 보지 못합니다.

당신 안에서 나는 움직이고 당신 안에 나는 머무르면서도, 나는 당신께 가까이 이를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내 안에 계시고 내 주위에 계시어도 나는 당신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 하느님이시여, 비오니, 내가 당신을 즐기도록 당신을 알고 당신을 사랑하게 해주소서.

그리고 이 현세에서 마음껏 즐길 수 없다면 그 즐거움이 충만에 이를 때까지 내가 매일매일 진보하게 하소서.

이 현세 생활 중에 당신에 대한 지식이 내 안에서 자라나 하늘 나라에서 완성되게 하소서.

당신에 대한 사랑이 이승에서 내 안에 자라나 저승에서 실제로 소유함으로써 완전히 되도록 해주소서.

 

주여, 당신은 우리가 성자를 통하여 당신께 청하도록 명하시고,

아니, 오히려 권고해 주시면서 우리 기쁨이 완전하게 되도록 우리가 청하는 바를 받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주여 비오니, 당신께서 우리의 놀라우신 조언자를 통하여 권고해 주시는 대로

내가 당신께서 약속하신 것을 당신의 성실하심을 통하여 받게 해주시고 내 기쁨이 완전하게 되도록 해주소서.

성실한 하느님이시여, 간절히 비오니, 내 기쁨이 완전하게 되도록 당신이 약속하신 것을 우리가 받게 해주소서.

 

그때까지 나의 정신이 그것을 묵상하고 내 혀가 그것을 말하며 내 마음이 그것을 사랑하고

내 입이 그것을 전하게 해주소서.

내가 마침내 주님의 기쁨으로 들어갈 때까지 내 영혼이 그것을 애틋이 찾고,

내 육신이 그것을 열렬히 구하며, 내 존재 모두가 그것을 갈망하게 해주소서.

삼위 일체이신 주 하느님,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아멘.

(가톨릭홈에서)

 

 

 

 

성 안셀모 주교의 「프로스로기온」에서

(Cap. 1: Opera omnia, Edit. Schmitt, Seccovii, 1938, 1,97-100)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욕망

 

하찮은 사람아, 자, 네 바쁜 일을 잠깐 떠나고 네 생각의 소란에서 잠시 너를 감추어라.

이제 무거운 걱정들을 멀리하고 네 수고로운 번잡을 뒤로 미루어라.

하느님께 잠시 몰두하여 그분 안에서 쉬어라.

네 영혼의 내실에 들어가 하느님과 또 하느님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배제시키고, 문을 걸어 잠근 채 그분을 찾아라.

내 마음아, 이제 열성을 다하여 하느님께 이렇게 아뢰어라.

"주여, 내 당신 얼굴을 찾사오며 당신 얼굴을 뵙고 싶나이다."

 

주 내 하느님이시여, 내 마음이 어디에서 어떻게 당신을 찾고,

또 어디에서 어떻게 당신을 찾아낼 수 있는지 가르쳐 주소서.

주여, 당신이 여기에 안 계신다면 부재하시는 당신을 내가 어디서 찾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이 어디서나 계신다면 왜 내가 현존하시는 당신을 뵙지 못합니까?

당신은 진정코 다다를 수 없는 빛 가운데 거처하십니다.

그런데 다다를 수 없는 이 빛은 어디에 있고 또 내가 어떻게 그 빛에 접근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그 안에서 당신을 뵐 수 있도록 누가 그 안으로 나를 이끌고 또 인도하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표시로, 어떤 모습 아래 내가 당신을 찾겠습니까?

주 내 하느님이시여, 내 당신을 뵌 적이 없사옵고 당신 얼굴을 알지 못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주여, 당신의 것이지만 당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유배지의 나는 무엇을 하리이까?

당신께 대한 사랑에 애타고 있지만 당신 얼굴에서 멀리 내던져진 당신의 이 종은 무엇을 하리이까?

나는 당신을 간절히 뵙고자 하지만 당신의 얼굴은 내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나는 당신께 가까이 다가가려는 열망을 지니고 있으나 당신의 거처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찾아내려 하지만 당신이 거처하시는 곳을 알지 못합니다.

나는 열렬히 당신을 찾으려 하지만 당신의 얼굴을 알지 못합니다.

 

주여, 당신은 내 하느님 내 주님이시고, 나는 당신을 뵌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나를 창조하시고 재창조하셨으며 내가 지니고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당신이 나에게 주신 것이지만 아직 나는 당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뵙도록 나는 지음받았으나 나는 지음받은 그 목적을 아직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 주여, 언제까지, 우리를 언제까지 잊어버리시고, 언제까지 우리에게서 당신 얼굴을 외면하시리이까?

언제 우리를 내려다보시고 언제 우리 말을 들으시리이까?

언제 우리 눈에 빛을 비추시고 언제 당신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리이까?

언제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오시리이까?

 

주여, 우리를 바라보소서. 우리 말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빛을 주시며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소서.

우리 일이 잘 되도록 우리에게 되돌아오소서. 당신없이 잘 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께 향하려 하는 우리의 노력과 수고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 없이 우리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주여, 당신을 찾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어 찾는 이에게 당신을 보여 주소서.

당신이 가르쳐 주지 않으신다면 당신을 찾을 수 없고

 당신이 당신 자신을 보여 주지 않으신다면 내가 당신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내 당신을 갈망할 때 찾고, 찾을 때 갈망하며, 사랑할 때 찾아내고, 찾아낼 때 사랑하게 하소서.

 

 

 

성 안셀모 주교의 기도에서

(Oratio 52: PL 158,955-956)  

 

동정녀여, 당신이 받으신 축복으로 모든 피조물이 축복받았습니다

 

마리아여, 하늘과 별, 땅과 강들, 낮과 밤, 그리고 사람의 유익을 위해 창조되어

사람의 권하에 속하는 모든 것들은 죄로 인해 잃었던 첫 영광을 당신으로 말미암아 되찾아 표현할 수 없는

새 은총을 얻게 되었으므로 서로들 기뻐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첫 목적은 하느님께 찬미 드리는 사람을 섬기고 그에게 유익이 되어 주는 일이었지만,

그들이 본래 지닌 이 목적의 품위를 잃어버렸을 때 죽은 채로 있었습니다.

만물은 안팎으로 파괴되고 우상의 노예가 된 사람들의 남용으로 말미암아 이그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상을 섬기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만물은 하느님께 찬미 드리는 사람들의 권하에 들어가 그들에게 유익한 것이 되었으므로

되살아난 듯 기뻐하고 있습니다.

 

새롭고도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을 입어 만물은 기뻐 용약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을 지어내신 하느님께서 하늘로부터 보이지 않게 다스리시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들 가운데 보이게 현존하시어 자신들을 사용하심으로써 거룩함을 나누어 주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렇듯이 큰 은혜들은 복되신 마리아의 복된 태중에서 태어나신 복된 열매로부터 나왔습니다.

마리아여, 당신 은총의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명부에 있던 이들은 해방되어 기뻐하고

지상에 있는 이들은 새로워져 기뻐합니다.

당신의 영광스러운 동정성의 열매이신 영광스런 아드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주는 그분의 죽음이 있기 전에 죽었던 모든 의인들은 그들의 포로 생활이 끝났기에 기뻐하고,

천사들은 반쯤 허물어진 자기들의 도성이 다시 세워지는 것을 보고 용약합니다.

 

넘치는 은총으로 충만하신 여인이여,

모든 피조물이 당신 충만함의 흘러 넘침을 입어 새싹이 트듯 되살아납니다.

복되고도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여,

당신이 받으신 축복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로부터 축복을 받고

창조주께서는 그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품안에서 태어나시고 자신과 같으시며

자신처럼 사랑하시던 외아드님을 마리아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본성상 하느님과 마리아의 유일하고 공통적인 아들이 되도록 마리아에게서 한 아들을 지으셨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같은 외아드님이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하느님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마리아는 하느님을 낳으셨습니다.

만물을 지어내신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분이 되시고 이렇게 하여

당신이 지어내신 모든 것을 재창조하셨습니다.

무에서 만물을 지어내실 수 있었던 분은 실추한 피조물을

 마리아의 도움 없이 재창조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창조된 만물의 아버지이시고 마리아는 재창조된 만물의 어머니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주형성의 아버지이시고 마리아는 우주 재형성의 어머니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만물이 창조된 분을 낳으셨고

마리아는 그를 통해서 만물이 구원된 분을 낳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치 못하는 분을 낳으셨고

마리아는 그 없이는 아무것도 제대로 존재치 못하는 분을 낳으셨습니다.

 

마리아여, 주님께서 참으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주님은 만물이 주님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당신에게도 큰 은혜를 입도록 하셨습니다.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홈에서)

 

 

 

안셀모는 ’하느님이 헬멧으로 쓰시는 남자’란 뜻이다.

젊은 시절에 종교에 무관심하던 안셀모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며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이성의 도움을 빌어 신앙의 진리를 분석하고 밝히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에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았다.

 

안셀모는 15세에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원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12년 후에 종교에 무관심하고 방종하며 여러 해 동안 세속 생활에 젖어 있던 그는

결국 수사가 되고 싶었던 소원을 이루었다.

그는 노르망디에 있는 베크 수도원에 들어간 다음 3년 뒤에는 부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5년 뒤에는 만장 일치로 대원장이 되었다.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사상가로 알려진 안셀모는 인내심이 많았으며

교양과 타인을 가르치는 기술 또한 뛰어났다.

그의 영도력하에 베크 수도원은 철학과 신학 연구에 있어 큰 영향을 발휘한 수도원 학교가 되었다.

한편 안셀모는 공동체의 요청에 따라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에 비교할 만한 그 자신의 신학 저술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안셀모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쿠르 데우스 호모’(Cur Deus Homo: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는가?)이다.

 

1093년, 안셀모가 60세가 되었을 때 그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캔테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다.

처음에 영국의 왕 윌리엄 로베르는 그의 대주교 임명을 반대하다가 나중에 승인하였지만,

교회 개혁을 위한 안셀모의 노력에는 협력하기를 계속 거부하였다.

결국 안셀모는 1100년 로베르가 죽을 때까지 자청하여 귀양살이를 하다가 로베르의 형제이며 후계자인

헨리 1세의 부름을 받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의 주교들을 서품하는 왕의 권한에 대하여 헨리 왕과 강경하게 대립하던 안셀모는

또다시 로마에서 3년 간의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의 관심과 염려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 미쳤으며, 교회 안에서 노예 매매를 반대한 첫 인물이 되었다.

안셀모는 국회로부터 인신매매를 금지하는 결의안 하나를 얻어 냈다.

 

 

 

안셀모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추종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했다.

그는 특히 정치 지배자들과의 갈등과 대립의 십자가를 졌다.

개인적으로는 온화하고 점잖은 사람으로서 평화를 사랑했지만

정의가 문제로 제기될 때에는 박해와 투쟁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다른 소망을 하늘에서 가질 수 없다.

한 사람의 바람은 모든 사람의 바람이 될 것이며,

모든 사람의 바람과 각 사람의 바람은 또한 하느님의 바람이 될 것이다."

(성안셀모,’Opera Omnis’ 편지 112)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그는 계시와 이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파의 변증법에서 이용하는 이성주의를 신학에 성공적으로 도입시킨 첫번째 인물이었다.

그는 완전한 존재에 대한 인간의 개념에서부터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한

일체성(Monologium)의 저자이다.

이 사상은 후대의 둔스 스코투스, 데카르트 그리고 헤겔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안셀모의 <왜 신인이냐?>는 중세의 강생에 관한 신학 논문 중에서는 가장 돋보이는 대작이다.

그의 저서 중에는 <성삼의 신앙에 대하여>, <동정의 개념>, <진리>,

그리고 편지와 기도 및 묵상에 관한 책들이 많이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 학자 축일:8월28일

 

 

 

 

중세기의 대학자이며 큰 인물이라고 칭찬 받은 성 안셀모는

1034년 이탈리아의 비에몬든 주 아오스타 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심행사를 좋아하며 수도원에 들어가서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혈기왕성한 청년기에 이르자 어느덧 그런 훌륭한 결심을 버리고 경솔하게도 방탕한 생활로 흐르게 되었다.

아버지도 가끔 권면했으나 아무 효험이 없었으므로 벼러고 벼르던 끝에 엄벌을 주려고 하니

안셀모는 집을 뛰쳐나와 프랑스에 가서 3년이란 기간을 정처 없는 방탕생활로 보냈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양심도 마침내 각성할 때가 돌아왔다.

그는 과거의 실수를 후회하고, 그 보속으로 그 후부터는 성심껏 학문의 연구를 시작해 목적 달성을 위해

당시 박학하고도 유명한 랑프랑크 신부가 수도원장으로 있던 노르만디 주 베크의 수도원을 방문했다.

랑프랑크는 통회의 정이 비상한 청년 안셀모의 입회를 허락했는데,

곧 그 정신적 재능의 뛰어남을 인정하고 학문 뿐 아니라 영적 방면에도 적절한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이리하여 안셀모는 오랜 시련과 많은 역경을 겪고 난 후 겨우 1060년 베네딕토회의 수도복을 입게 되었다.

때는 그가 26세 되는 해였다.

 

 

 

그 뒤부터의 안셀모는 전보다 배로 열심히 분발해 곧 모든 수사들의 거울로 공경을 받게 되어

3년후에는 일찍이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연소한 몸이었으나 비상한 총명과 수단으로써 전 수도원을 다스리며 훌륭한 성적을 올렸고,

아울러 동료에게는 극히 관대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했다.

그리고 주간에는 많은 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고, 야간에는 거의 기도와 묵상으로 시간을 보냈다.

또한 그는 거의 매일처럼 단식재를 지내고 십자가를 쳐다보고서는 늘 자신의 죄를 눈물을 흘리며 통회하고

주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힘을 다해 피했다.

 

그의 박학과 성덕에 대한 소문이 점차로 세상에 퍼지자 수많은 학생의 무리가 그 수도원으로 몰려들었다.

1093년에는 영국 왕 윌리암으로부터 그를 영국 제1의 대성전 켄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한다는 통지가 내려

국민들도 환영하며 그를 맞이했으나 안셀모는 노쇠해 그 임무를 맡을 수 없다고 이를 사퇴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를 무리하게 병석에 있는 왕의 자리에까지 모시고 가서

그의 손에서 주교 임명의 표지인 주교 목장(牧杖)을 받게끔 했다.

그러므로 안셀모도 왕이 몰수한 교회의 재산을 반환해 줄것과 정당한 교황 우르바노 2세를 인정한다는

서약을 듣고 나서 마침내 주교 취임을 수락했다.

 

그러나 이 주교직은 그에게 얼마나 많은 심적 고통을 주었는지 모른다.

왕은 병이 낫자마자 전의 약속을 잊은 듯이 매사에 교회를 압박하고 간섭했다.

안셀모는 이러한 왕의 비위를 거슬리게 되어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두 번이나 영국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의 예지와 아버지와 같은 사랑은 결국 교회와 왕의 사이에 평화가 깃들게 하는데 성공했다.

대주교는 여러 가지의 심로와 노력으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졌으나 마침내 승리를 거두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 후 곧 중병에 걸려 최후의 한 달 동안은 음식조차 취하지 못하고

1109년 성주간 수요일 마침내 한많은 세상을 떠나 주님의 품으로 달려갔다.

그 뒤 켄터베리 주교좌 성당에 있는 그의 묘에서는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고 독실하던 도리데니오 수도원장은 안셀모를

"그의 신앙은 극히 깊었고 예지는 뛰어나고 그의 행위는 거룩하고 마음은 경건했으며,

그의 웅변은 유창했고 생활은 타인의 모범으로서 충분했다.

그는 전력을 기울여 사업을 행하고 끊임없이 성서를 묵상하고 모든 덕에 있어서 출중했다."

하고 말했으니,이는 당연한 칭찬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720년 교회의 박사로 선언되었다.

단테는 신곡의 천국편((Canto ⅩⅡ)에서 태양권 안에 있는 빛과 힘의 영들 가운데 안셀모를 언급할 정도였다.

(대구대교구홈에서)

 

 

 

▶ 안셀모 
라틴어  Anselmus 
Anselmus(1033∼1109). 성인. 북부이탈리아 태생의 그리스도교 사상가.
그는 어머니를 여읜 뒤, 프랑스 각지를 편력하다가 당시의 석학인 랑프랑(Lanfranc, 1005~1089)이

부원장 겸 교사로 있는 베크 수도원에 들어가 철학 · 신학을 공부하고, 1060년 수도사, 1063년 부원장을 거쳐,

1078년에 원장이 되어, 철학적 신학적인 활동이 풍성한 가운데 많은 저작의 완성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1093년 잉글랜드 왕 윌리엄 2세에게 발탁되어 원하는 바도 아니었던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받고

나서 부터는 정치에 휘말려 갖가지 사건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는 로마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개혁이념을 받들어 교회의 자유와

권리증진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 때문에  윌리엄 2세로부터 1097년 추방되었다.

1100년 왕의 사망으로 뒤를 이은 헨리 1세의 초빙을 받고 다시 캔터베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평신도에 의한 성직자의 임직 즉 서임권(敍任權) 문제에 대해 왕과의 의견 대립으로 다시 추방을 당해

로마에 망명, 1106년 왕의 양보로 협정이 성립되어 또 캔터베리로 돌아와 교회와 국가 사이에

‘정교조약’(政敎條約, concordat)의 체결을 보았다.

그 이후 왕의 신임이 두터운 가운데 그는 영국에 되돌아온 지 4년 만에 타계하였다.

 

안셀모의 철학상의 입장은 아우구스티노의 "믿기 위해서 알고자 함이 아니고, 알기 위하여 믿는다"는

매우 주의주의적(主意主義的)인 명제로써 신앙이 앎의 전제라 하여, 신앙의 우위를 주장하면서도,

신앙자가 이성에 의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즉 ‘마음 속에서 터득하는 것’(intus legere)을

강조하였다.

 

그는 경건한 마음으로 진리 또는 실재(實在)를 다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하여 조용히

바라보는 사변(思辨)에 근거를 두고서, 정리신학(定理神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상세히 단독으로 취급하여,

뒷날 이 방면의 노작의 출현을 자극시켰다는 점에서 그가 신학발전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신앙은 지성을 바란다"(Fides quaerens intellectum)는 것은, '화해를 바라는 신앙'의 입장이며,

신앙의 사실이나 원리를 논리에 의해 해명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으며, 그의 관념과 이론에서 나온 수많은 해석 · 공식 · 분류 · 정의 · 개념구별 등의 용어가 비록

그의 창시는 아닐지라도, 오늘날까지 신학상의 관용어가 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의 주요저서를 보면,

성서의 의거하지 않고 이성만으로 신을 논한 ≪모놀로기온≫(Monologion, 1076),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되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신의 정의에서 출발하여,

그러한 신의 비존재(非存在)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데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명한 본체론적(本體論的)인 증명이 전개되는 ≪프로슬로기온≫(Proslogion, 1077),

이밖에 ≪진리론≫(眞理論, De veritate, 1080~1085),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Cur Deus Homo, 1098),

≪악마의 타락에 관하여≫(De casu diaboli),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

≪성삼위일체의 신앙에 대하여≫(De fide trinitatis), ≪말씀의 강생에 관하여≫(De incarnatione),

≪성모 잉태에 관하여≫(De conceptu virginali et peccato originali),

≪예지(豫知), 예정(豫定) 및 신의 은총과 자유의지와의 일치에 대하여≫

(De concordia praescientiae et praedestinationis nec non gratiae Dei cum libero arbitrio)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은 제자인 라옹의 안셀모(Anselmus de Laon, 1050~1117)를 중심으로 하는 일단을

비롯하여 상 빅토르학파, 13세기의 프란치스코회학파 등이며, 이 밖에도 아벨라르(Pierre Abelard, 1077~1142)

같은 사람이 부분적으로 그의 흐름을 수용하였다.

  

[참고문헌] Aguirre, S. Anselmi theologia v.3, Salamanca 1679~1685 / J. Fischer, Die Erkenntnislehre

Anselmus von C., 1911 / F. Baeumker, Die Lehre Anselmus von C. uber den Willen und seine

Wahlfreiheit, 1912 / J. Slipyi, De principio spirationis in S.S. Trinitate, Lemberg 1926 / K. Fina, Anselm

von Havelberg: Untersuchungen zur Kirchen- und Geistesgeschichte des 12. Jahrhunderts, AnalPraem

32, 1956 / L.F. Barmann, Reform Ideology in the Dialogi of Anselm of Haverberg, ChHist 30, 1961.

(가톨릭대사전에서)

 

 

 

 

 

 

 

수도생활(修道生活, 라:vita religiosus,영:religious life)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교인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수도생활은 바로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여러 방법들 중 하나이다.

수도생활이란 그리스도를 보다 철저하게 따르기 위하여 자기를 포기하는 삶이다.

이 자기포기는 보통 가난, 정결, 순명의 세가지 서원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일컬어 수도자(religiosus)라 하며,

남자는 수사(修士), 여자는 수녀(修女)라고 한다.

 

다양한 수도회들

역사 : 교회 초창기부터 재산을 포기하고 독신을 지키며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개인의 욕망을 포기한 동정녀들과 금욕자들이 있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의 수도 생활이 시작된 것은 4세기 이후부터이다.

수도생활 운동은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하나의 반동으로 일어났는데

당시 열심한 신자들은 도시를 떠나 사막과 광야로 들어가 특수한 삶의 양식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 중 에집트의 성 안또니오(Antonius)가 대표적 인물로서 그는

은수생활의 창시자이자 모든 수도자들의 아버지라 불리운다.

초기 동방 수도생활은 외딴 곳에 홀로 사는 은수생활과 함께 모여 사는 공생수도생활,

그리고 서로 가까이 모여 사는 반은수생활 등 세가지 형 태가 공존하였다.

이 동방 수도생활은 서방에 영향을 미쳐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이 생겨났고,

이 규칙서는 이후 서방 수도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다.

 

수도승생활(修道僧生活, 영: Monastic life , Monasticism)

수도생활 초기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적인 수도생활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를 더욱 철저히 추종하고 오로지 하느님을 찾기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사막이나 광야로 들어간 은수자들이나 독수자들의 삶의 전통을 잇는 수도생활을 말한다.

 

수도승생활을 하는 수도자를 우리말로 수도승(修道僧)이라 하는데

수도승(Monachus, Monk)이란 말은 원래 불교 용어이지만

일반적으로 쓰이는 수도자(Religious)라는 개념에 포함되면서도 승려적 생활전통을 따르는

수도회들에 속한 수도자를 따로 지칭할 때 그리스도교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은 그리스어 ’monos’(홀로)에서 유래했는데 원래 ’결혼하지 않은 자’

또는 ’독신자’란 의미에서 ’홀로 사는 사람을’나타내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광야에서 살던 ’은수자’(Hermit, Eremita)나 ’독수자’(Anchorite, Anachorita)를 가리켰는데

점차 그 의미와 내용이 발전하면서 후에는 ’회수도승’(會修道僧. Cenobite, Cenobita)까지 포괄하는 단어가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수도승’이라 할 때 일반적으로 까말돌리회, 실베스트로회, 발롬브로사회,

올리베따노회 등 베네딕도회 연합에 속한 수도회들,

시토회, 트라피스트회, 카르투시오회에 속한 수도자들을 일컫는다.

 

베네딕도회

성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을 따르는 남녀 수도회들(congregations)의 연합체(confederation)를 말한다.

그 종류로는 솔렘 연합회, 수비아꼬 연합회, 몬떼까시노 연합회, 오딜리아 연합회, 올리베따노 연합회,

까말돌리 연합회, 실베스트로 연합회, 발룸브로사 연합회 등이 있다

시토회와 엄률시토회(트라피스트)는 베네딕도 수도규칙을 따르지만 베네딕도회에는 속하지 않는다.

 

성 베네딕도(480-560년경)는 이탈리아의 누르시아에서 탄생하였다.

그는 진실로 하느님을 찾고자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비아꼬 동굴에서 3년 동안 은수생활을 한 후,

몬떼까시노에 수도원을 세우고, 거기서 수도규칙서(Regula Benedicti : RB)를 저술하였다.

이 규칙서는 이후 서방 수도승생활의 초석이 되었다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회홈에서)

 

*성 베네딕도 아빠스 축일:7월11일

*에집트의 성 안또니오 아빠스 축일:1월17일

 

 

 

로마 안셀모 대학교

 

자유

켄터베리의 주교였던 성 안셀모는 신학자로도 유명하지만

그가 이룬 가장 뛰어난 업적 중 하나는 1102년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의회에서 노예 매매 금지법을 통과시킨 것이다.

인간을 가축처럼 사고 파는 행위의 부당함에 대해 아무도 의문시하지 않았을 때

그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위해 결연히 일어난 첫 번째 투사였다.

 

자유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인간의 기본권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단순히 노예 상태에서 풀려 나는 자유뿐 아니라 두려움과 억압, 의심과 비판에서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태어날 때 하느님에게서 부여받은 신성한 권리다.

그러므로 자유가 억압된다면 언제 어디서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투쟁함으로써 스스로 그 권리를 얻어 내야 한다.

 

오늘 당신의 자유를 위해 투사가 되라.

앞으로는 그 어떤 부정적인 습관이나 그 어떤 부정적인 견해에도 얽매이지 않겠다는 확고한 자세를 확립하라.

그리고 걱정과 의심의 족쇄, 절망의 쇠사슬을 벗어 버리기로 작정하라.

마지막으로 성인들의 도움을 구하라.

특히 성 안셀모에게 죄에 얽매인 것들을 깨뜨려 버릴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한다면

진리와 영원한 하늘나라의 자유로 가까이 가게 될 것이다.

나쁜 습관이나 부정적인 사고의 노예가 되지 않는가?

나는 그 어떤 것,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은 자유인이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O Lord our God,

grant us grace to desire Thee with our whole heart;

that, so desiring, we may seek,

and, seeking, find Thee;

and so finding Thee, may love Thee;

and loving Thee, may hate those sins

from which Thou hast redeemed. Amen."

-Saint Anselm

 

Prayer for All Classes of People

"O Lord, we bring before you the distress and dangers of peoples and nations,

the pleas of the imprisoned and the captive,

the sorrows of the grief-stricken, the needs of the refugee,

the impotence of the weak, the weariness of the despondent,

and the diminishments of the aging. O Lord, stay close to all of them. Amen."

-Saint Anselm of Canterbu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