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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9주간 수요일 / 오상선 신부님 ~

2021년 6월 2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2021.06.02.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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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죽음"이 여러 차례 언급됩니다. 죽음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인간에게 가장 민감한 이슈지요.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마르 12,23)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역연혼을 들어 묻습니다. 우리가 듣기에 상당히 황당하고 당혹스러운 이 혼인의 목적은 한 집안을 지속시키고 죽은 이에게 상속인을 마련해 주는 것이라고 하지요.

사두가이들은 세상에서 맺은 혼인의 제도적 결속이 죽음 이후에도, 그리고 다시 살아난 이후에도 지속된다면 혼란이 야기되지 않을지 묻습니다. 질문 의도 안에는 부활 사상을 마치 비합리적이고 우스꽝스러운 교설처럼 비하하려는 저의도 깔려 있었을 겁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르 12,25)

사람들 사이에서 죽음은 이별을 수반합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좋은 연으로 맺어져 서로를 극진히 사랑했다 하더라도 유한한 인간들 사이의 육적인 상호관계는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딱 거기까지일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꿈꾸는 죽음 이후의 삶,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부활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예수님은 이를 천사들과 같아지는 삶이라고 하십니다. 더 움켜쥐려고 피 터지게 싸우는 욕망과 소유에서 자유로운 상태, 더 이상 자아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격정과 자기중심성을 벗어난 평정, 평화의 상태입니다. 이는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보편적 사랑으로 충만한, 담백하고 순수한 모습일 듯합니다.

"그분께서는 ...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르 12,27)   

지상의 여러 제도들이 그러하듯 혼인 역시 하느님께서 축복하시는 아름답고 유익한 제도지만, 혈연 관계의 유지와 종족의 보호를 위해 불가피하게 작동되어야만 하는 배타성이 존재하지요. 어쩌면 부활의 삶은 그마저도 해제된, 하느님 앞에 모든 인간이 너나 할것 없이 순수한 영으로 이어진 모습의 회복일 겁니다.

우리 모두는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서 숨 쉬고 존재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과거에 살다가 언제 죽은 누구 누구'라고 하는 것은 인간만의 표현일 겁니다. 하느님은 어느 시대를 살다가 세상을 떠난 이나 지금 숨 쉬고 살고 있는 이나, 모두를 사랑스럽고 귀한 자녀로 당신 앞에 두고 계시지요. 그래서 그분 앞에서 우리 모두는 살아있는 겁니다. 그분은 살아있는 이들의 주님이시지요.

제1독서에서는 죽음을 청하는 가련한 두 사람이 나옵니다.

삶의 나락에 떨어진 선한 사람 토빗과, 혼인날 번번이 신랑을 잃고 조롱을 당하는 사라는 주님께 간절히 자신들의 생명을 그만 거두어달라고 청하지요. 사람이 생명이신 하느님께 죽음을 간청할 때는, 생명을 지닌 채 견뎌야 하는 고통이 죽음의 두려움보다 더 위협적이고 모욕적일 때입니다.

구약의 백성은 죽음이 육체적 종말과 더불어 하느님과의 영원한 분리라고 여겼지만, 하느님은 의인들을 죽음에 넘기지 않으시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으며, 의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지혜서는 전하지요.(지혜 3,1.4 참조)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복음 환호송)

예수님은 이 희망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시고 또 몸소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부활의 희망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과 죽음은 하느님 눈 앞에서 연장선 안에 펼쳐져 있을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 현세에서 맺은 인연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면서 챙기고 돌보고 섬기는, 이리저리 엮인 우리들 말입니다. 그 중에는 너무 가깝고 잘 아는 것 같아서 예의와 존중을 잊고 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요.

무엇보다 그들은 나와의 인연에 앞서 하느님 앞에 자리한 소중한 존재임을 감탄과 존경의 마음으로 인정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려면 그가 영영 내 소유도 아니고, 그가 내 욕망을 대신하거나 채워줄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겠지요. 언젠가 함께 부활하여 하느님 앞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때, 참 고맙고 사랑스러운 형제자매요 벗으로 만날 테니까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1코린 7,30)라고 말합니다.

이는 종말의 가르침이지만 이미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희망이 시작되었으니 인간 실존을 지닌 채로 천사들처럼 깨어서 천상의 질서를 앞당겨 살아가라는 격려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 살아 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를 정도의 온갖 불행과 고통이 짓누르고  죽음이 우리를 덮쳐도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서 한때 살았고, 지금 살아가며, 앞으로 살아가게 될 모든 이들과 하나로 엮여 있습니다.

마땅히 사랑받고 존중받아야 하는 하느님 모상이며 귀한 인격체인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지상에서와 같이 천상에서도, 현세에서와 같이 부활의 삶에서도 좋은 인연을 이어가길 희망합니다. 우리를 이어 주시는 "산 이들의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