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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13주간 목요일 / 오상선 신부님 ~

2021년 7월 1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2021.07.01.mp3

2.85MB


오늘 미사의 말씀은 믿음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마태 9,2)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여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반드시 병자를 치유해 주실 거라 믿기에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지요. 믿지 않았다면 자칫 병세를 악화시킬 수도 있는 모험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마태 9,3)
하지만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지요. 군중 가운데 있던 율법 학자들은 병자에게 "죄를 용서받았다"고 위로하시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자기들이 배우고 가르치는 내용과 어긋난다고 여기고, 그저 냉정하기 짝이 없는, 차가운 잣대를 떠올립니다.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태 9,6)
경외심과 순종으로 하느님께 철저히 믿음을 증거하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을 믿고 목숨을 내놓는 아드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기 때문이지요.


제1독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닥친 시련의 이야기입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2)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이처럼 고통스런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토록 오랜 기다림 끝에 축복으로 허락하신 아들이고, 그를 통해 후손까지 약속하셨건만, 당신 말씀을 이렇게 뒤집으시니 인간적 생각으로는 참 막막하고 참담했을 것 같습니다.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
장작을 지고 가던 이사악의 질문에 아브라함이 답을 합니다.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아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임기응변이었을까요, 아니면 정말로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해 주셨던 이사악을 이제 그분 뜻대로 되돌려 드린다는 의미에서였을까요...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창세 22,12)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창세 22,18)
아브라함의 무한한 믿음은 하느님을 항한 경외와 순종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경외하기에 믿고, 믿기에 순종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여겼던 율법 학자들은 스스로 하느님을 경외한다고 여겼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세상에 오신 하느님을 하찮게 여긴 것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눈이 닫혀 있었기 때문이지요. 반면 중풍 병자를 데려온 순박한 이들은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경외하고 존중했습니다. 의심 없이 단순하게 믿었기 때문이지요.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마태 9,6-7) 
자기로 인해 촉발된 논쟁으로 뭔가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병자는 아마도 자기 몸에 일어난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말씀에 마음이 녹고, 그와 동시에 굳어 있던 몸이 녹는 것을 충분히 느꼈을 테지요.


그는 예수님께 순종하여 곧바로 일어나 평상을 집어들고 집으로 갑니다. 그분께서 하라고 하시니, 진짜로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떠보거나 간 보며 주저하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일어나 집으로 갑니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9,9)
모든 과정을 보고 들은 군중의 마음에 경외심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이 경외심이 찬양으로 이어지지요. 믿음은 하느님을 "경외함"에서 생겨나 "순종"으로 이어지고 "찬양"으로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히브 5,7-9)
오늘의 말씀이 히브리서의 이 대목을 소환합니다. 제1독서에서 장작을 진 이사악은 십자가를 진 예수님의 표상이지요. 아브라함은 아들의 죽음을 감수해야 하셨던 성부 하느님을 가리키고요. 창자가 끊어질 듯 고통스러우셨을 하느님의 마음을 아브라함의 침묵의 고뇌와 순명에서 읽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영육의 질병과 죄의 상처를 낫게 하시는 분, 당신을 제물로 바쳐 용서를 보장하신 분께서 이 모든 권한을 베풀고 싶어하신답니다. 주님을 경외함으로 더 충실해지고, 그분께 순종함으로 그분을 점점 더 닮아가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7월을 힘차게 시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