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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성 토마스 사도 축일 / 오상선 신부님 ~

2021년 7월 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2021.07.03.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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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말씀은 사도들과 우리의 결속을 이야기하십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하필 자기가 없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다니, 토마스는 참 서운하고 속이 상합니다. 그저 일상적인 평소의 때라도 스승의 방문을 놓쳤다면 아쉽고 송구할 터인데, 처참한 죽음으로 잃었던 스승이니 더욱 힘이 들 겁니다. 게다가 자신은 스승의 마지막 모습조차 지키지 못한 처지니까요.


동료들에게 한 토마스의 말은 그의 불신이나 완고함에서 나왔다기보다 스승의 현존을 놓친 아픔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스승을 버리고 도망갔던 자신에 대한 자책, 그분의 수난과 죽음의 고통스런 현장을 그저 소문으로 접해야 했던 죄책감, 그런 자기들을 다시  찾아 주신 스승과 눈을 맞추고 화해하지 못한 아쉬움이 참 컸을 겁니다.

그렇다면 모든 걸 아시는 예수님께서 왜 하필 그 시간에 오셨을까요? 그가 없다는 걸 모르실 리 없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토마스의 부재 상황은 미래 신앙의 후손으로 살아갈 오늘의 우리 모두를 위한 주님의 숨은 계획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여드레 뒤에 다시 모인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또 나타나십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토마스도 함께였지요. 예수님은 며칠 전 마치 그 자리에서 토마스의 볼멘 항변을 직접 들으신 것처럼, 그가 바라던 것들을 하나씩 친절히 허용하십니다. 감각적 확인을 전제한 조건적 믿음을 위해 당신 몸을, 그 내밀한 상처를 만지도록 허락하신 것이지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토마스는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지고 듣고 체험하지 못했으면서도 그분을 믿고 사랑하고 따르는 길로 초대된 우리 모두의 원형입니다. 토마스는 우리 안에 믿음이 형성되기까지 딛고 가도록 마련된 디딤돌로 자리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우리의 관계를 건물에 비견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이돌이십니다."(에페 2,20)
오늘 교회 안에 존재하는 우리는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홀로 외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이천 년 동안 차곡차곡 하느님의 거처로 쌓아올려지고 있는 영적 성전의 일부분입니다. 우리를 떠받치는 밑둥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고, 우리를 연결하는 모퉁이의 머릿돌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뿌리가 되어 주고 디딤돌과 발판이 되어 주는 사도들, 예언자들, 성인들을 관상합니다. 한 걸음 떨어져서 무심히 보면 다들 나약한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너무도 대단하고 완벽한 인물들이 아닐까 싶지만, 성경이 솔직히 전하는 그들의 모습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주지요. 그렇다고 그들 모습에 실망을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희망을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이지요.

사실 우리 신앙의 DNA 안에는 늘 좋고 훌륭하고 긍정적인 것만 들어있지는 않지요. 그 안에는 토마스의 의심과 베드로의 경솔함, 야고보 요한 형제의 야심도 끼어 있습니다. 또 이사야의 두려움, 예레미야의 탄식과 후회, 요나의 회피와 불평도 사이사이 스며있지요. 어디 그것 뿐이겠습니까? 스스로 알고 또 함께도 아는 셀 수도 없고 다 표현할 수도 없는 모양새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많습니까!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2)
그토록 부족한 사도들이고 또 우리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그리스도를 입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위에 성령을 받으면 온전히 다른 존재로 변모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후 달라진 제자들의 모습이 이를 증거하지요. 예수님 생전에 그분과 함께 지내면서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우둔함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믿지 못해 꾸중까지 들을 정도였던 모호함, 그리고 거듭 넘어지는 약함도 성령을 통해 하느님 거처를 이루는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기반 위에 쌓아올려지고 있는 우리 역시 완벽한 지지기반이 되기는 역부족입니다만, 엉성하고 부실한 채로라도 겸손히 그 자리에 머물다 보면, 우리 위에 또 얹혀질 후손들을 위해 그런 대로 쓸만한 구성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거처는 우리 힘으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지향과 그리스도의 현존, 성령의 힘으로 지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토마스 사도와 더불어 주님께 이 깊고 그윽한 고백을 바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부족한 믿음, 나약한 의지, 갈라지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당신 몸을 만지라고, 당신을 먹으라고 허용하시는 분이시니 용기를 내어 그분께 다가갑시다. 완벽하게 된 뒤에 하려면 영영 그분과 하나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께 의탁해, 토마스 사도처럼 나즈막히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며 겸손하게 믿음을 고백하시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