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12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2021.07.12.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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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의 관계성을 하느님 중심으로 개편하라고 촉구하십니다.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마태 10,34-35)
예수님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만 들으면 마치 그분이 이 세상에 불화를 조장하고 가족 관계를 파괴하러 오신 것 같습니다. 사회의 기본이 되는 가정 공동체의 구성원인 아버지와 아들이, 딸과 어머니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맞서고 원수가 되어 갈라서면 세상은 함께 흔들리고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이어지는 말씀이 앞의 알쏭달쏭한 말씀을 이해하게 도와줍니다. 즉 관계의 우선이 혈연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가족을 우선하고 챙기게 마련이지요. 태초에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맺어주실 때부터 서로 끌리고 보완하는 사랑이 매개가 되어 가족이 형성되었으니까요.
그런데 남녀의 사랑이나 부모 자식 간의 사랑보다 우선하는 진정한 사랑이 있으니, 바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지으시고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대신 죽으시면서 사랑하십니다. 신앙인이라면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가 우선이지요.
하느님과의 사랑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려면 자기와 가족의 안위만 추구하는 육적인 애착에서 한걸음 나와야 합니다. 시야를 확장한다고 해서 가정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공고히 성숙한 사랑으로 결속될 수 있지요.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 10,41)
육적인 사랑이 성장하고 승화해 하느님과의 사랑 관계로 들어가게 되면 그와 동시에 하느님의 사람들이 눈에 보이게 됩니다.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하느님의 사람들, 즉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믿음이 끌리는 일에 투신하는 이들, 하느님의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여기에 이르면 이제 우리는 스스로 예언자나 의인이 아니어도 예언자와 의인이 받을 상을 받게 됩니다. 그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예수님을, 그리고 종래에는 하느님을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와 의인이 받을 상이란, 성삼위 하느님의 거처가 되어 사랑의 존재로 변모되어 가는 것입니다.
제1독서는 이집트에 몸붙여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닥친 위기 상황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탈출 1,10)
요셉의 치적을 모르는 새 임금이 등극하면서 이스라엘은 경계과 압박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사백삼십 년 전, 일흔 명으로 이집트에 들어간 이스라엘 자손이 이제는 이집트인들을 넘어설 만큼 더 많고 강인하게 번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탈출 1,12)
이집트인들에게 강제 노역으로 시달리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더욱 번성합니다. 이는 그들의 생명이 육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기인하기 때문이지요. 일찌기 하느님은 이집트로 떠나는 야곱에게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창세 46,3)고 약속하셨으니 지금의 번성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강제 노역과 사내아기를 죽이라는 말살 정책이 구체화되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큰 어려움 없이 잘 정착하고 번성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느님의 백성에게 결별의 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오랜 기간 이방 민족 안에서 누렸던 안락한 평화을 박차고 떠나야 하는 때가 무르익은 것이지요. 바야흐로 "칼"의 시간이 된 것입니다. 이 갈라섬, 떠남은 이스라엘이 하느님 백성으로 우뚝 서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할 단계입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칼을 주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인간적으로 익숙한 혈연, 지연, 학연은 물론 서로 영광과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 안에 파묻혀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고, 그 안에서 '우리만' 안락하고 평온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정도면 평화라고 여기며 안주하고 싶었을 수도 있지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좋은 게 좋은' 그런 관계가 하느님과의 사랑을 가리우고, 하느님의 사람들을 경시하고 무관심하게 만든다면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촉구하십니다. 육적인 차원을 넘어서 영과 육의 통합을 이루어 가라고 부르심 받은 신앙인이라면 우리의 모든 관계성은 하느님 중심의 관계성으로 재편성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화답송)
이 노래가 우리 관계성의 기준이고 평화의 바탕입니다. 내 근친, 지인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형제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평화가 옵니다. 평화는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존재하고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강물처럼 온 세상을 감싸며 아우르고 퍼져나가는 하느님의 충만함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사랑의 질서를 새로이 수립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느님이 첫째이시고, 모든 것은 그 관계에서 파생됨을 깨닫는 지혜와, 이를 실제 삶에 적용하는 용기와 결단을 주시길 함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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