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31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2021.07.31.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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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말씀은 두려움에 대해 일러주십니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태 14,4)
세례자 요한은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헤로데에게 지치지 않고 진언을 합니다. 혼인 관계에 관한 하느님의 뜻을 두려움 없이 전한 것이지요. 무소불위의 힘과 세력을 지닌 이에게 진리를 일깨우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위험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예언자들이 박해받고 죽음을 당한 것이지요. 결국 요한은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마태 14,5)
헤로데라고 뭐가 옳은지 그른지 모를 리는 없지만 욕정이 눈을 가리운 데다 주위 사람들이 문제 제기를 하지 않으니 어느새 옳고 그름의 기준마저 모호해졌을 테지요. 그렇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고 싶은 마당에 요한이 계속 양심을 건드리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을 겁니다. 불의한 권력자 해로데의 해법은 진리의 숨을 막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을 죽이려 했지요. (사실 병행구절인 마르코 복음에서는 헤로데의 나름 어쩔 수 없었던 입장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설명하기는 합니다만...)
여기서 헤로데가 요한을 없애는 데 단 하나 걸림돌이 있다면 군중입니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존경하기 때문에 후폭풍이 두려웠던 게지요. 천하의 헤로데도 두려운 존재가 있었던 겁니다. 안타까운 점은 그 두려움의 대상이 절대자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란 점이지요.
그는 인간의 눈에 들고 싶어하고, 인간에 의해 좌지우지되며, 인정받고 칭찬받는 데 많은 에너지를 쓰는 성향인 듯합니다. 그런 헤로데였기에 경솔하고 경박하게 맹세를 남발하다 결국 체면과 허세를 지키려 역사에 길이 남을 불의한 살인을 저지른 셈이지요.
여기서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 하느님의 사람과 악인, 예언자와 박해자 사이의 극명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바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와 사람을 두려워하는 이라는 차이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희년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레위 25,10)
희년은 말 그대로 기쁨의 해입니다. 그동안 삶의 질곡에서 얽히고섥히면서 잃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했던 본래의 자리를 되찾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공적으로 보장해 주는 장이라 할 수 있지요.
희년에는 어떤 이는 자기 소유지를 되돌려받고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며, 또 어떤 이는 그동안 자기중심적으로 축적하며 달려온 탐욕의 질주를 멈추고 과잉으로 축적한 것을 돌려주어야 하지요. 가나안 정착 시절 하느님께서 땅을 고루 나누어주시면서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를 부여해 주셨던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이기에 가능한 제도일 겁니다. 사실 현대의 자본주의적 경제 관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요. 가진 자는 세습을 통해 계속 부와 권력을 장악하고 싶어하고 오히려 제도가 이를 뒷받침해 주니까요.
"이 해는 희년이다. 그것은 너희에게 거룩한 해다. 너희는 밭에서 그냥 나는 것만을 먹어야 한다."(레위 25,12)
마치 일주일에 하루 있는 안식일처럼 그 해에는 파종이나 추수, 수확 등의 모든 생산활동이 금지됩니다. 이를 그저 게으르게 놀고 먹기만 하라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에만 온전히 의탁하라는 의미일 겁니다.
노동과 경제활동은 생계 유지와 자아 계발, 공동체 발전 등의 긍정적 효과가 있는 반면, 빈부격차의 심화와 차별 등의 불합리한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악이 사람 안에 깃든 하느님의 모상성을 자기중심성으로 비틀어 이기심을 부채질하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어느새 하느님에게서 골고루 나누어받은 재화에 대한 감사를 잊고 자기와 가족의 부와 안위를 위해 내달립니다. 그게 타인을 억압하고 해치고 짓밟는 일이어도 그렇게 하지요.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레위 25,17)
안식일 법이나 희년 제도는 결국 하느님 경외를 알게 해주는 장치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잊고, 눈에 보이는 사람을 의식하며 얕은 체세술과 끝없는 탐욕으로 제 이익만 추구하던 사람에게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 제대로 깨닫게 해 주는 시간이 곧 희년인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은 갑자기 새로 만들어내는 무엇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그동안 자기를 가려 주고 보호하던 장치들을 내려놓고 벌거벗게 되면 찾아오는 근원적 인식입니다. 하느님 백성이라면 어느 때건 반드시 맞게 되는 각성과 통찰의 때이기도 하지요. 그 때와 시간, 방법이 각자 다를 테지만 은총의 순간임은 분명합니다.
우리 각자는 누구를 두려워하는지 자신의 영혼을 잘 살펴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고 자녀라면, 그리스도의 벗이고 성령의 거처라면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해야 하는 존재는 주님이시지요.
희년의 실천이 세속을 살아가는 머리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쁨의 해, 희년 정신의 근본은 하느님 경외와 사람에 대한 사랑이니, 탐욕스럽고 방만한 물질주의 세상 안에서 부족하고 미약하나마 그 정신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일으켜 세우려 애쓰는 우리 모두는 참으로 복됩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복음 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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