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2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쭙니다. 제자단 안에서, 밀려드는 군중 사이에서, 사사건건 트집 잡는 종교 기득권자들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민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로마제국과의 사이에서 나름 고심하다 여쭙는 듯 보입니다. 그가 제시한 일곱 번은 그가 참고 참아낼 수 있을 최대의 수일 것입니다.
"가엾은 마음이 들어"(마태 18,27)
예수님의 비유 속의 임금은 만 탈렌트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빚진 종을 용서해 줍니다. 그를 놓아 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지요. 이유는 단 하나, 갚을 테니 좀 기다려 달라고 호소하는 그에게 "가엾은 마음이 들어서" 입니다.
용서는 자신이 피해를 당하고 손해를 입은 측면에 시선이 고정되면 참 어려운 일이지만, 그 시선을 자신이 아닌 상대에게 향하면 가능하기도 합니다. 약함과 죄악에 휘둘리는 상대에 대해 가엾이 여기는 마음, 그에 대한 연민이 굳은 마음에 틈을 벌려 용서를 끌어올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마태 18,33)
아마 베드로가 훗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십자가 처형 때 줄행랄을 놓은 자신을 자각한 뒤였다면 "일곱 번"이라는 수는 떠올리지조차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부끄럽고 가련하고 당혹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던 순간에 용서 받은 받은 체험은 더 이상 용서의 빈도수도 경중도 대상도 따지지 않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모세가 죽은 뒤 후계자 여호수아가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강을 건너는 장면입니다.
"주님의 계약 귀를 멘 사제들이 요르단강 한복판 마른땅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동안, 온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건너서, 마침내 온 겨레가 다 건너간 것이다."(여호 3,17)
때는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강을 건너는 행위는 처음 이집트를 나올 때 갈대바다를 건넌 파스카 사건과 마찬가지로 민족 전체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공동 체험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 요르단강을 건넌 뒤, 계약의 표지인 할례를 행하고 첫 파스카 축제를 지낼 것입니다. 그리고 예리고 성읍 탈환이 이어지게 되지요.
강을 건널 때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이 멈추어 서서 강물의 흐름을 멈추게 했다고 합니다. 이 놀라운 장면을 관상하며 그 안에 깃든 의미에 머무릅니다.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탈출 19,6)
이스라엘이 시나이 산에 도착했을 때 하느님께서 계약 체결을 약속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하느님에게서 당신 백성으로 선택되었듯,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자녀인 그분의 백성입니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이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 2,9)
교회는 직무 사제직만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이며 자녀인 우리에게 보편 사제직을 부여합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깨끗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찬미의 제사를 올려드립니다.
보편 사제직을 통해 교회의 신비에 참여하는 우리는 오늘 독서 속의 사제들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휘감아 흐르는 온갖 탐욕과 반목과 죄악의 물결 속에 단단히 서서 그 격류를 멈추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온 인류가 격랑에 휩쓸리지 않고 무사히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마지막 한 사람이 구원될 때까지 십자가를 내려놓지 않고 강 한복판에 굳건히 서 있어야 합니다.
이 사제직의 소명은 특별한 능력으로 수행된다기보다, 모든 피조물에 대한 연민이 있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 잔잔히 연민이 흐른다면, 모든 피조물이 지닌 한계와 실존을 이해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용서도 유대도 포용도 가능할 것이고, 이 연민은 이 세상에 어둠과 절망과 증오의 악이 침투할 틈을 촘촘히 메워나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모두는 저마다 주님에게서 용서 받은 체험을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일회성 체험으로 끝나지 않고 자주 반복해 용서 받으면서 살아간다고 해야 맞을 듯 싶네요. 그렇다면 자비를 입은 존재인 우리에게 용서는 의무일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 대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애끓는 연민을 지니고 계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과 형제를 향해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연민을 거부하지 않고 표현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겁니다.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하느님에게서 용서 받았으니 우리도 용서하고, 또 우리가 용서하니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연민과 자비, 용서의 이 거대한 챗바퀴 안에서 후회없이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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