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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20주간 월요일 / 오상선 신부님 ~

2021년 8월 16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2021.08.1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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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을 따르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마태 19,17)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대해 묻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계명과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의 의무입니다. 그 의무만 충실히 이행해도 하느님 뜻 안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1)
스스로 계명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고, 실제로도 나름 잘 살아왔을 그 청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심 부족함이 느껴졌나 봅니다. 영원한 생명이 이 정도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에게서 지금처럼만 살아도 충분하다는 확인을 받고 싶었을까요? 사실 갈망은 부르심의 다른 이름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 더 하고 싶어 하게 마련이지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예수님께서 진복에 이르는 비결을 알려 주십니다. 이는 계명을 제대로 지키기에도 급급한 사람들에게는 발설되지 않는 비책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 부자 청년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자기와 식구들을 건사하며 살아야 하는 보통의 평범한 이들에게도 큰 도전을 줍니다.


과연 영원한 생명으로 표현되는 '구원'의 가능성은 재물의 양과 반비례할까요? 그렇다면 재산을 어느 정도 이상 지닌 이들은 누구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걸까요?

그 해답을 제1독서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알들을 섬겨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이신 주님, 저희 조상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주님을 저버리고, 주위의  민족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을 따르고 경배하여, 주님의 화를 돋우었다."(판관 2,11-12)
바알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리를 잡고 사는 가나안 땅의 신들입니다. 바알의 뜻은  "주, 주인"이기 때문에 야훼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러서는 안 되는 이름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백성은 땅의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는 바알에게 이끌려 그들을 받들어 모십니다. 왜 이스라엘이 굳이 하지 말라는 바알 신 숭배에게 빠져든 걸까요? 바로 바알 신이 재산을 증식시켜 주고 부을 축적해 준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이래라 저래라 요구조건이 많으신데 비해 바알은 실질적으로 손에 쥐어주는 게 더 많아 보이니까요.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이 베풀어 주신 약속의 땅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살아야 하는 본분을 잊고, 이방 민족들을 따라 재산과 재물을 탐욕하며 하느님과의 관계에 소홀해지고 맙니다. 성경은 내내 이 죄악을 "불륜"이라 칭합니다.

"제 스스로 덫에 걸렸네."(화답송)
이스라엘에게 재물과 하느님은 병립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어느 한 편을 선택하고 어느 한 편을 외면할 수 밖에 없지요. 하느님을 선택하고 섬김으로써 누리는 은총과 축복보다 눈에 보이는 재물이 더 귀하고 소중했던 겁니다. 이 덫은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걸려든 것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탐욕은 그만큼 드센 유혹거리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선택한다고 빈털털이가 되지는 않습니다. 당신을 믿고 의탁하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유형 무형의 온갖 축복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편에서 콕 집어 재물 축복을 달라고 요구할 수 없을 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는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니다.우리보다 더 우리를 잘 아시니까요. 차이는 그걸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에서 발생합니다.

오늘 복음 속 젊은이는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을 더 믿는지, 자기 손의 재물을 더 믿는지" 질문을 받은 것과 다름 아닐 겁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는 제 손의 것에 의탁하는 삶을 유지하기로 결심한 것이지요. 

하느님은 그 부자 청년을 처음에는 계명 준수의 윤리적 삶으로 부르셨고, 그 다음은 갈망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누려온 넉넉한 재물이 오히려 버림과 따름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결정적 순간에 그냥 그동안 살아온 수준에 머물기로 결심하지요. 사실 그만큼도 준수하니까요.

그 청년이 예수님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느낀 슬픔은 하느님의 마지막 부르심일 수도 있습니다. 이 복음서 뒷편에서 그가 어떻게 응답할 지 모르지만 이대로 끝이 아니길 빕니다. 그리고 그 결말은 우리 모두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입당송)
이 고백이 벗님의 것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 맛깔진 행복을  벗님이 꼭 맛보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