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9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2021.09.09.mp3
2.32MB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참 좋은데, 혼자 먹기엔 너무 많은 음식이 차려진 밥상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너무 많은 지침과 권고들이 쏟아져 들어오니 좀 버겁게 느껴질 수도 있지요. 원수 사랑, 축복, 기도, 조건 없는 희사 등등 애써 결심하고 다짐해서 그중 하나만 실천해도 대단히 뿌듯할 일들이 줄줄이 나열되니, 과연 다 따를 수 있을지 걱정마저 들게 됩니다.
우리가 들은 조항 하나하나에 코를 박고 했는지 안 했는지 따지다 보면 세심증에 걸리기 십상이지요. 또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그 잣대로 자기와 타인을 난도질 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
그래서 예수님은 그 모든 구체적 권고들을 이 말씀으로 묶어 주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권고 하나하나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그 모두를 아우르는 중심 해류에 몸을 실으면 여러 방향에서 다양한 크기로 몰려오는 파도들을 자연스레 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타인이 나에게 어떻게 해 주면 좋을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옵니다. 내가 좀 모자라도 감싸주기를, 잘못해도 용서해 주기를, 설령 나에게서 해를 입어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기를 바라지 않나요? 또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내밀어 주고, 곤궁할 때 말없이 주머니를 채워주며, 실패했을 때 추궁을 삼키고 기다려 주길 바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바로 그것을 남에게 해주라고 하시는 겁니다. 구체적 지침들이 이미 그 안에 다 들어 있지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그런데 우리가 타인에게 바라는 걸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건 이미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해 주고 계신 것들입니다.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실천하기 불가능하겠지만,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이니 마음의 방향만 바꾸면 영 못 할 일이 아닐 겁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를 닮아 타인에게도 아버지가 하셨듯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차이는 엄청나겠지만, 각자가 할 수 있는 깜냥 안에서 최선을 다해 아버지의 자비를 따라하려 까치발을 들며 애써 노력해 보라고 독려하시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 모든 실천을 한 단어에 뭉뚱그려 표현했습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콜로 3,12)
바로 "다움" 곧 하느님의 사람다움입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선택받았고 그분의 거룩함을 나누어 받았으며 그분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사람들이지요.
그 많은 가르침들을 지킬 수 있는지 없는지 머리로 따지며 지레 겁먹고 고민하기보다, 내가 누구인지 인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그 존재에 맞는 '다움'의 DNA는 이미 충분히 받았으니까요.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을 구체적으로 반영하시는 모범이고, 그분을 닮아가는 여정은 세례로 축성된 우리 존재 안에 진즉에 프로그래밍되어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콜로 3,15)
하느님의 자녀다움은 감사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의 어디를 눌러도 감사가 튀어나와야 합니다. 살아 숨 쉬는 생명에서 시작해 받아 누리는 모든 것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내 것인 양 착각해서 헛발질을 하기도 하지만 정신 차리고 제자리로 돌아와보면 우리 존재의 안팎이 감사할 일들로 온통 둘러싸여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다움을 보여 주는 것은 두둑한 재물이나 현란한 지식, 거창한 인맥, 겉꾸민 외모가 아니라 "감사"입니다.
하느님의 사람답게 우리가 마음속으로 바라는 바를 앞질러 행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자비를 얻고 싶으면 자비를 주고, 사랑을 얻고 싶으면 사랑을 주며, 위로받고 싶으면 위로하면서 하느님의 보폭을 힘껏 따라가 봅시다. 행하는 그대로 우리 역시 충만해 질 것이니 결국 우리가 드릴 것은 감사뿐일 겁니다. 오늘, 곳곳에서 우리가 행하는 이 작은 노력으로 이 세상이 좀 더 양선하고 따뜻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오상선(바오로) 신부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연중 제 23주간 토요일 / 오상선 신부님 ~ (0) | 2021.09.12 |
---|---|
~ 연중 제 23주간 금요일 / 오상선 신부님 ~ (0) | 2021.09.11 |
~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축일 / 오상선 신부님 ~ (0) | 2021.09.08 |
~ 연중 제 23주간 월요일 / 오상선 신부님 ~ (0) | 2021.09.06 |
~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학자 기념일 / 오상선 신부님 ~ (0) | 2021.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