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29주간 목요일 / 오상선 신부님 ~

2021.10.21.mp3

2.06MB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대립되는 의미의 단어들이 줄곧 등장하여 우리를 긴장시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너무나 뜻밖의 말씀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러 오신 분 맞지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한때 평화라 믿었던 현실이 안주와 고착으로 화석처럼 굳어져 버렸을 때, 누군가는 의문을 제기하여 현실을 흔들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진실이었던 것이 여전히 진실인지, 그때 도움이 되었던 것이 아직도 공동선에 유익한지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질문들을 용기 내어 입 밖으로 내는 이가 필요하지요. 그 안에서 질문을 일으키는 존재는 불, 곧 성령이십니다.


물론 그는, 견고한 카르텔을 형성해서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서로 이익을 주고받는 기득권자들을 불안하고 성가시게 한 죄로 표적이 되기 십상입니다. 자칫 사회부적응자나 반동세력으로 낙인 찍힐 수도 있지요. 그가 제기한 논점은 사라지고 질문을 제기한 자체로 상종 못할 인간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우리는 이제 그가 감히(?) 깨뜨린 평화가 진정한 평화였는지 의심해 봐야 합니다. 변치 않는 진리는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평화라 믿던 안위와 무탈과 야합의 가면을 찢고 진정한 평화에 이르려면 균열과 진동, 맞섬과 갈라짐의 분열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일 겁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세상을 이루는 두 진영을 선명히 대조시켜 줍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로마 6,19)
육을 따라 사는 사람은 더러움과 불법을 일삼고, 결국 죄와 악의 종이 되어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의 끝은 결국  죽음이지요. 그가 어떤 제도에 속한 어떤 신분의 사람이건 자기 선택에 따라 영혼에서 하느님의 모상성은 질식되고 악이 기승을 부리는 놀이터가 되고 말지요.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로마 6,22)
그간 죄와 맺었던 달콤한 동맹을 깨고 죄에서 갈라져 나와 그동안 주인이었던 죄와 맞서는 과정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이미 그 기울기대로 굳어져서 존재의 방향으로 틀어 올리려면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럴 가치가 충분하지요.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께 주인 자리를 다시 내어드린 이는 그간의 더러움이 어떠했어도 다시 거룩함의 여정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 구원 의지를 믿는 그 자체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화답송)
얕은 살얼음판 같은 거짓 평화가 깨지는 것이 두려워 예수님께서 영혼에 놓으신 성령의 불을 외면하고 있다면, 주님께 신뢰를 두는 이의 행복에 귀기울여 볼 일입니다. 시편 저자는 죄와의 오래되고 끈질긴 동행을 끊어내고 거룩함의 길에 들어서라고 용기를 북돋워 줍니다.


진리의 불길이 닿으면 당장 어떻게 될 것 같은 인간적 세속적 관계들에 얽혀 있다면 그 관계가 어디서 양분을 받으며 유지되는지, 이 관계가 우리 모두를 하느님 곁으로 모아 주는지, 궁극적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지 살펴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려는 진정한 평화를 향해 흔연히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