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2.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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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의 희망을 현재형으로 확인시켜 주십니다.
"행복하여라."(마태 5,3.4.5.6.7.8.9.10)
어제 우리가 경축한 "모든 성인의 날"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떠난 모든 이를 기리는 "위령의 날" 첫째 미사의 복음 대목이 모두 행복 선언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도대체 우리는 이 각박하고 험한 세상살이 중 어디에서 "행복하라"는 주님 명령의 근거를 찾아야 할까요?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12)
여덟 개의 행복 선언이 "행복하여라 ... 할 것이다."로 반복되다가 마지막 말씀은 현재형으로 마무리됩니다. "행복하여라"도 아니고, "행복하게 될 것이다"도 아닌, "너희는 행복하다"는 단정적 표현이지요.
지금 이 자리에 나아오기 직전까지 삶의 악다구니 속에서 허덕이다 왔을 군중에게는 행복이 여전히 손에 잡히지도, 체험 영역으로 들어오지도 않았을 터인데, 행복하다고 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까지 하시니 어리둥절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자신감의 근거가 "말씀"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말씀이신 분의 입에서 "행복하여라"는 말씀이 선포되는 그 순간, 말씀은 이루어지니까요. 예수님 곁의 제자들과 무리를 이룬 군중들의 귀에 말씀은 단지 소리로만 흘러들어가지 않고, 그 말씀이 존재를 관통해 그 안에 심겨지고 새겨져 완성태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행복하여라"는 말씀이 행복하게 만듭니다.
제1독서에서는 고통 받는 의인의 전형인 욥의 비장한 고백이 들립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욥 19,25)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으로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 19,27)
이 말을 하는 욥의 심상에 귀를 기울입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불행들을 영문도 모르는 채 속수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소중했던 가족과 재산, 건강, 친구마저 잃은 그가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죽기를 청하며 몸부림칠 때입니다.
욥에게 희망이 있다면 자신에게 엄청난 축복도 주셨고 또 처참한 재앙도 허락하시는 하느님께서 반드시 존재하신다는, 어쩌면 존재하셔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욥은 당장 자신이 당하는 모진 고통의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도 그분이 살아 계셔야 하며, 자신은 그분을 대면해야 합니다.
"기어이" (나를 이렇게 만든) 하느님을 뵙고야 말겠다는 욥은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버틸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기어이!"라는 말에는 하느님을 향한 그의 절규와 항변의 강도가 새겨져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고통의 이유를 물을 수 있는 마지막 보루시기에 반드시 계셔야 하고, 당신도 피하시지 않고 기꺼이 그 자리를 지키십니다. 그분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가는 우리들을 상대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 위 그 자리에서 더 참혹한 몰골로 기다리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희망을 말합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로마 5,10)
죄인을 위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돌아가신 성자 예수님으로 인해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졌고, 우리는 고통 중에서도 희망과 행복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는 희망에 묻어 있을지도 모를 세속적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떨쳐내려 "구원이 ... 더욱 분명합니다."라고 힘 주어 확신합니다.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이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먼 미래의 불확실한 if의 가정문이 아니라 현재형 단정문입니다. 욥처럼 현실의 벽이 만만치 않고 삶의 행로가 온통 뒤엉켜버린 상태에서 저 밑바닥 끝까지 내팽개쳐졌다 해도 우리가 하느님께 질문을 가지고 있고 그분을 기어이 뵙겠다는 결의와 열망을 놓지 않는다면 희망은 분명 현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주어진 생애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세상이 조장하고 유혹하는 그런 것들에 있지 않다는 걸 우리는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삶과 죽음에서 매번 확인하게 됩니다. 죽음으로 열리는 영원한 생명은 각자 고유한 삶의 밑그림을 가지고 저마다의 궤적을 지나는 중인 우리가 아프고 고되며 고통과 상처가 가득한 현실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희망하며 행복해야 할 이유입니다. 죽음에, 또 죽음 너머에 답이 있습니다.
구원의 희망은 우리가 확신하는 그대로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기에, 우리는 현재도 미래도, 이제와 또한 영원히 행복합니다. 현실의 무게를 넘어 기쁨과 행복을 선택하며,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성인들의 통공을 믿으며 서로의 구원을 위해 나아갑시다.
+주님, 세상을 떠난 모든 이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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