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5.mp3
3.12MB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지향을 다루시는 하느님의 콜라보를 보여 주십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루카 16,1)
예수님께서 들려 주시는 이 비유는 사실 우리를 좀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올바르고 정당한 결과를 기대하는 우리에게 등장 인물인 집사의 불의하고 얄팍한 꼼수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데 결과적으로 주인에게 칭찬까지 듣기 때문이지요. 성경에 등장하는 비유 속의 아버지나 주인은 대개 하느님을 상징하기 마련인데, 그렇다면 결과만 좋으면 하느님께도 다 좋은 것인가 반문하게 됩니다.
"집사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루카 16,1)
주인과 집사의 관계를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로 관상해 봅니다. 사실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그분의 재산(모든 피조물과 재화, 탈렌트와 권력, 명예와 관계 등)을 관리하는 집사일 뿐이지요. 이 재산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쓰는 횡령, 남용은 주인 입장에서는 낭비이고, 주인과 주인의 뜻을 위해 쓰는 것이 선용이지요. 우리는 그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어떻게 낭비했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릅니다만, 주인의 태도로 보아 그분의 뜻대로 쓰지 않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4)
당장 일자리를 잃을 처지에 놓인 집사는 꼼수를 씁니다. 주인의 재산으로 사람들의 환심이라도 사서 앞날을 보전하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이들, 즉 가난한 이들을 불러 그들의 빚 수량을 제멋대로 줄여 줍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지향의 순수성을 보신다고 배웠습니다. 아무리 결과가 그럴듯해도 동기와 과정이 모두 선해야 진정한 선이라고요. 그러니 그릇된 동기에서 시작된 집사의 선행(처럼 보이는 행위)에 후한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고 여깁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6,8)
그런데 동기와 과정과 결과가 모두 선해야 한다는 논리에 붙잡혀 있다면 이 구절에서 좌절 비슷한 심정이 됩니다. 주인은 바보인가? 자기에게 손해를 입한 사람을 칭찬하다니? 게다가 오히려 그의 처신이 영리하다고?
다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로 돌아가 봅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우리의 지향이 천사처럼 그저 마냥 순수하기만 했던가 되짚어 보면 답이 보일 겁니다. 저마다 고유한 부르심을 받아 살아가지만, 신앙의 태동, 봉사의 시작, 성소의 출발, 직분의 수락은 때때로 아주 허술하고 인간적인 지점에서 시작되기도 하니까요. 하느님은 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위해 맞춤형 그물을 던지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나약하고 죄인이기까지 한 우리를 당신 사업에 합류시키시면서 지향을 따져 묻거나 내치지 않으십니다. 그릇된 지향이라도 당신의 섭리 안을 걷다 보면 정화되고 성화될 수 있고, 그렇게 이끄실 자신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집사의 꼼수를 모르지 않으면서 인내하고 견디며 기다려 주는 주인의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집사는 자기가 살려고 거짓을 꾸몄지만 결과적으로는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가 평소 정의와 자선에 대한 지향이 있어서가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요. 여기서 우리는 집사와 결탁해 짐을 덜어낸 채무자들의 부정을 윤리적으로 비난하느라 주인의 큰 마음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주인이신 하느님은 누가 그릇된 지향에서 출발했더라고 그 굽은 자를 가지고 직선을 그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집사의 죄조차도 선익으로 돌려놓는 분이시지요.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맞습니다. 세상 물정에 영악한 이들은 서로 결탁해 정보를 독점하고 사회적 경제적 이권을 끼리끼리 주고받습니다. 거짓도 죄악도 불사하면서요. 하지만 길게 보면 결국 그 열매를 쓰시는 분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당하시는 손해는 아랑곳하지 않으시면서 끝내 선으로 흘러가게 하십니다. 그릇된 지향조차도 언젠가 좋은 열매로 바꾸시는 분이시니까요.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주인의 칭찬"은 구원의 동의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불의한 집사처럼 살아온 이들은 자신의 악도 선으로 쓰시는 하느님께 승복해 지향과 방향을 바꾸는 과정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기까지가 주인의 그림입니다.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받은 이방인 선교의 소명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 15,17)
사도는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께 뽑혀 그분과 삶을 나누지도 못했을 뿐더러 그분을 따르는 새로운 길을 박해하기까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다인 중 누구도, 바오로 자신조자도 자기 입에서 이런 고백이 흘러나올 줄 꿈에도 몰랐겠지요. 너무 다른 출발점이었지만, 결국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위해, 유다인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바오로를 쓰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주인이신 분은 그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집사로 불러 당신의 사람과 재산과 세상을 맡기십니다. 이기심과 탐욕, 자기 영광에 한눈 팔면 주인의 재산은 쉬이 낭비되고 말지요. 부족하나마 주인의 뜻을 헤아려 허락하신 영적 물적 재산을 지혜롭고 선하게 사용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께서 잘 써 주시도록 스스로를 기꺼이 내어놓은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오상선(바오로) 신부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연중 제 32주일 / 오상선 신부님 ~ (0) | 2021.11.07 |
---|---|
~ 연중 제 31주간 토요일 / 오상선 신부님 ~ (0) | 2021.11.07 |
~ 성 가를로 보르메오 주교 기념일 / 오상선 신부님 ~ (0) | 2021.11.05 |
~ 죽은 모든 이를 위한 위령의 날 / 오상선 신부님 ~ (0) | 2021.11.03 |
~ 모든 성인 대축일 / 오상선 신부님 ~ (0) | 2021.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