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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주님 공현대축일 후 화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 4,7-8)

여러분은 하느님을 잘 아십니까? 잘은 모르겠는데 좀 알긴 안다구요? 하느님을 잘 알고싶은데 어렵지요? 성경을 많이 읽고 말씀묵상을 열심히 하는데도 잘 모르겠다구요? 사실 공부를 통해 하느님을 지식적으로는 조금 알 듯해도 하느님은 모든 지식을 초월한 분이셔서 다 담을 수는 없겠지요.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잘 안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 사람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껍데기만 아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내가 사랑하는만큼 비례해서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요.

내가 하느님을 잘 모른다면 그게 성경공부 부족이나 신앙 부족이 아니라 사랑 부족 때문이랍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니 오늘은 무조건 사랑합시다. 그래야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조건부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야~" 하는 유행가 노랫말을 흥얼거려 보는 오늘 되시길 빕니다.

무신론자들 중에는 가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봤냐고..." 신자들 중에서도 "하느님이 안 계시는 것같다"고 하면서 냉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결국 사랑을 제대로 못했다는 겁니다. 왜냐구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만나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을 통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게 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을 더 잘 알고 싶고 만나뵙고 싶다면 지금부터 더 열심히 사랑합시다.

사랑도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은 그래서 '거짓말쟁이'(1요한 4,20) 입니다. 오늘도 열심히 사랑합시다.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오늘 만나뵙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마르 6,34-44)는 바로 사랑이신 하느님의 참 아들이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들으려 몰려든 많은 사람들에게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하루종일 "많은 것을 가르치셨는데" 벌써 어둑어둑 해가 저뭅니다. "이제 그만 저들을 돌려보내자"는 제자들의 말에 "아니다. 그냥 돌려 보낼 수는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명하십니다. 우리 먹을 것도 없고 살 돈도 없는데 그냥 돌려보내어 각자 먹을 것을 해결하자는 제자들의 경제 논리 앞에, 예수님은 사랑 논리를 펼치시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적당한 사랑으로 만족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제자들의 모습이고, 끝없는 사랑을 보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빼닮은 것이겠지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상에서 바친 희생제사와 성체성사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제자들의 사랑의 간극은 실로 엄청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나무라거나 실망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사랑 안에 더 성장하도록 양성시키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볼멘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제자들을 참여시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누어 주셨고" 또 "나누어 주도록"(마르 6,41) 하십니다. 그러는 사이 또 어느새 한 뼘 제자들 안에 사랑이 자랐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광야에서 예상치 못한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들 안에도 믿음과 사랑이 싹트기 시작되었을 겁니다.

예수님과 사람과의 거리는 그분과 하느님과의 거리입니다. 아직 사랑이 영글지 못한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느끼는 거리 역시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거리일 겁니다. 그래도 그 거리는 미세하나마 차츰 좁혀지는 과정 중에 있고,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당신의 마음과 밀착될 날을 인내로이 믿고 기다리시며 제자들을 양성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 마음과 같아질 때 비로소 진정 사람의 마음을 읽어주고 필요를 헤아리고 고통을 품어주는 사랑의 마음을 지닌 목자가 되리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일 겁니다.

시간은 필요하겠지만 그건 확실합니다. 모든 사랑은 각자가 취향껏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1요한 4,7)이고, 그 사랑을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이미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음식 "열두 광주리"(마르 6,43)는 미래 세대인 우리를 위해 남겨주신 완전한 수량의 양식을 상징합니다. 이 열두 광주리가 전해졌음에도 세상에 아직 굶주림과 궁핍이 남아 있다는 건,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태어나 제자와 군중의 후예로 불리운 우리에게는 커다란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와 하느님 사이의 거리, 나와 이웃 사이의 거리가 아직 충분히 사랑으로 밀착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에 더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 또한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래서 요한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1요한 4,7)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을 잘 아시는 벗님을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