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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서 만난 하느님께 굳이 이름을 붙여 드리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십니다.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마르 7,24).
예수님께서 가신 티로 지역은 갈릴래아 북쪽과 경계가 맞닿은 곳으로 여러 민족이 혼합되어 섞여 살면서 주로 이방 종교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교도들 사이에도 이스라엘에서 온 젊은 예언자의 소문이 금새 퍼진 것 같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마르 7,25).
이 여인은 불쌍한 딸을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려고 늘 준비 태세를 갖추고 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곧바로 소문을 듣고 당장 예수님을 찾아올 만큼 기민하고 적극적인 모습에 겸손까지 갖추었습니다.

제1독서에 드러난 솔로몬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이 입은 상처가 예수님 앞에 엎드린 이교 여인을 통해 치유되는 순간입니다. 솔로몬은 하느님의 총애를 받은 이스라엘의 대표적 임금 중 하나면서도 한분이신 주님만을 온전히 섬기지 않고 이교 신들을 추종한 오점을 역사에 남긴 바 있습니다.

"강아지"(마르 7,27.28).
예수님 입에서 다소 충격적인 비유가 흘러나오지요. 이교인들을 강아지에 비유하신 겁니다. 그런데 언어 통념상 흔히 "개"를 들먹이면 욕설처럼 들리기 십상이지만, 이 경우는 그런 의미로까지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또 반려견의 위상이 시대와 문화마다 다른데 당시로 보면 아무리 집 안에서 귀하게 기르는 강아지라도 먹을 것에는 차이가 있었을 것 같으니까요.

"그러나 ... 강아지들도 ...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여인은 담대하지만 불손하지 않게 지혜와 겸손을 다해 답을 합니다. 그녀는 자신과 가족이 믿는 이교 신이 여태껏 하지 못한 일을 예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 자기가 이교인이라 해서 다른 유다인들처럼 함부로 자신을 내치지 않으시리라는 신뢰도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능력에 대한 믿음과, 그분 인격에 대한 신뢰로 이처럼 청을 드리지요.

"네가 그렇게 말하니"(마르 7,29).
예수님은 그녀의 말에 힘을 실어 주십니다. 인간의 말에, 그것도 이교도 여인의 말에 하느님 말씀의 권능을 부여해 주시는 통큰 관대함이 놀랍습니다.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는 주체는 겸손하게도 예수님 당신이 아니라 여인의 말이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기까지 하는 이교도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준 사람에게 받은 만큼만 되돌려주는 장삿속이 아니라 모두와 전부를 대상으로 합니다. 그분이 어느 한 집단만을 전담하는 특정 신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주인이시기 때문이지요.

"다만 네 아버지 다윗을 보아서"(1열왕 11,12).
특별히 더 사랑하고 아끼는 이의 배반은 더 깊고 슬픈 상처를 남깁니다. 아마도 솔로몬의 우상 숭배가 하느님께 그러했을 것 같지요 당장 분노를 터뜨리셔도 모자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당신 자애를 거두시지 않겠다고 다윗에게 하셨던 약속을 기억하시어(2사무 7,12-15 참조) 징벌을 유예해 주십니다.

만일 하느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아니라, "그래서 하느님", "그러므로 하느님"이기만 하셨다면, 우리가 과연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삶의 질곡마다 우리에게 내리시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는 우리의 죄악을 뛰어넘는 반전의 역설이었음을 우리가 모르지 않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부스러기라도 좋다고 청한 이교 여인에게 그녀가 바라던 은총이 온전히 주어졌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엎드려 간청하는 우리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말을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말이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과 그분의 바람을 담고 또 닮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