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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부활 대축일 / 오상선 신부님 ~

마리아 막달레가 사랑하는 예수님께 누구보다 먼저 달려간 시간적 배경을 복음사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직도 어두울 때에."(요한 20,1) 마태오와 루카는 "새벽 일찍이" 마르코는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이라고 객곽적으로 진술하는 것과는 달리, 복음에 신학적 · 영적 의미를 깊이 담아 기술하고자 한 요한복음사가는 굳이 "어두울 때"라는 표현을 넣습니다.

생명으로, 빛으로 부활하신 분의 자취를 가장 먼저 발견한 시간이 "아직도 어두울 때"라고 합니다. 요한 복음 머리글에도 빛과 어둠의 대비가 극명히 드러나는데 거의 뒷 부분인 부활 대목에서도 이 대비를 잊지 않은 복음사가의 섬세함이 느껴집니다.

우리같은 보통 사람에게 부활에 대한 이해가 어느 순간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짠~ 하고 펼쳐지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그 신비를 단번에 깨우치기 어렵지요.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되살아나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가능하지만, 유다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시체를 훔쳐갔다."(마태 28,13)고 믿으며 부활을 부정합니다. 또 많은 이들은 부활 사건이 진실이건 아니건 관심조차 없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시신에 예를 갖추러 무덤에 간 "아직 어두울 때"는 어쩌면 그녀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희망을 걸었던 고마운 님을 잃은 슬픔과 상실감이 여전히 마음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을 겁니다. 가누기 힘든 내적 고통을 추스려 첫 새벽에 무덤으로 향할 때 그녀 존재의 안과 밖은 다같이 어두웠겠지요.

그런데 도착해보니 더 기가 막히게도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지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습니다. 슬픔에 놀라움, 염려까지 더해집니다. 그래서 아직도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달려가 이를 알리지요.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아직 예수님께서 생전에 하셨던 예고를 떠올리지 못하는 그녀는 누군가의 소행이라 여겨 그렇게 전합니다. 아직 부활을 경험해보지 못한 이에게는 당연한 반응일 겁니다.

부활 증인들의 목격담은 빈 무덤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무덤에 돌이 굴러져 있고 시신은 없고 시신을 쌌던 수건이 개켜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것만 보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확신하고 믿을 수 있었을까요?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대로 누군가가 시신을 꺼내갔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요한 20,2 참조) 나쁜 의도로 그럴 수도 있고 제자들이나 광신도들 중에 누군가가 죽은 성인들의 유해를 신주 모시듯 하기 위해 유기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것을 부활의 증거로 믿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사실에 근거한 법적 확인이라기보다는 신앙에 근거한 모호한 확신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부활 증거라고 알린 제자들의 이야기를 웃기는 소리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의심없이 확신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누가 옳을까요? 아무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알려주신 깨달음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확실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 그 믿음을 보류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제자들의 어설픈 증언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믿으시겠습니까?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

달려간 두 제자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 현장을 확인하고는 보고 믿었다고 합니다. 무엇을 믿었을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말일까요? 아쉽지만 아직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저 마리아 막달레나의 전언을 믿었다는 말일 뿐입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요한 20,9)라는 서술이 이를 확인해 주지요.

제1독서에서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연설하면서 "우리는 ...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사도 10,39)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이렇게 달라졌을까요? 분명 그날 아침까지도 아직 깨닫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우리 중 그 누구도 예수님 부활의 순간에 함께하지 못했기에 오관이라는 육신의 감각으로는 체험한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다행인지 모릅니다. 누군가 실제로 봤다면, 그건 사실 자료나 데이타에 불과하니 믿음의 영역이 아닌 정보나 지식의 영역에서 취급할 문제로 전락해 버리니까요.

부활 신앙의 바탕은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을 속죄제물로 바치신 후 다시 일으켜지심으로, 그분을 믿는 모든 이는 죄와 죽음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온 존재로 믿는 것이지요.

믿음은 은총입니다. 한순간 번쩍 섬광이 내리듯 단번에 완전한 믿음을 얻는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대개의 경우 어두운 새벽에 여명이 밝아오듯, 차츰차츰 믿음이 형성됩니다. 그건 믿음이 단순히 지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삶의 경험을 근거해 기억과 의지까지 작용하는 문제이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단 한 차례의 부활 발현으로 끝내시지 않고 "사십 일 동안 여러번 나타나"(사도 1,3)셨음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과 여인들과 다른 몇몇 이들은 저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목격 증인이 되어 서로의 체험과 느낌, 깨달음, 인격적 만남을 나누고 성찰하고 종합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더 깊이 알아갈 것입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2)

세상에 빛과 어둠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처럼 부활 체험 역시 우리의 죄와 죽음, 어둠의 현실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빛의 현장으로 달려갈 때 안팎으로 어두움을 안고 있었듯이, 어쩌면 죄와 죽음, 어둠이 부활의 필수 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죽음이 없으면 되살아난다는 말도 무의미하니까요.

신앙의 길에서 아직 희미하고 뿌옇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더라도 여명처럼 차츰차츰 일깨워주시리라 믿으면서 우리가 할 일은, "땅"이라 표현된 자신의 죄와 어둠과 상처에 매몰되지 않는 것입니다. 해도 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제 몰골에 코를 박고 주저앉아 버리지 말고, 저 "위"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우리보다 먼저 이 길을 간 바오로 사도가 독려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 개인의 일로 끝나지 않으려면, 그분 부활을 믿고 우리 삶의 영역으로 끌어와 살아내야 합니다. 믿으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콜로 3,3)습니다. 죄와 어둠과 상처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콜로 3,1)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과제가 있다면 부활하신 분을 믿고 사랑하고 체험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화답송)

부활을 사는 사람은 땅에 있는 무덤을 생각하지 않고 위에 있는 하늘나라를 생각합니다. 부활을 사는 사람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희망찬 미래를 봅니다. 부활을 사는 사람은 부정적이지 않고 늘 긍정적입니다. 부활을 사는 사람은 죄 때문에 우울해하지 않고 구원과 용서에 감사하고 늘 기뻐합니다. 부활을 사는 사람은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빈 무덤이 곧 새로운 생명인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벗님이 바로 그 부활의 주인공이십니다. 그러니 기뻐하고 환호하십시오. 알렐루야를 노래하십시오! 벗님의 무덤, 죄와 허물, 온갖 욕심과 탐욕, 이 세상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던 그 죽음의 무덤이 텅 비었습니다. 새로운 생명과 희망, 구원과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 기운을 듬뿍 받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무덤이 비어 있더랍니다. 부활은 빈무덤에서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부활하려면 비워야 합니다. 우리의 에고를 버립시다. 우리의 아집을 내려놓읍시다. 우리의 욕심을 비웁시다. 오늘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50일간 비우는 연습을 합시다. 그래야 텅빈 우리를 보고 사람들은 믿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참으로 부활하셨구나! 비움의 연습을 통해 부활이 무엇인지 더 깊이 체험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 참으로 부활하셨네. 
알렐루야, 알렐루야. 나 참으로 부활하였네.
부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