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제자는 무덤을 떠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마리아는 홀로 무덤에 남아 울고 있습니다. 울면서 그제야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방금까지 빈 무덤이었던 곳에 두 천사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왜 우는지 묻는 천사들에게 마리아는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요한 20,13)라고 답을 하지요.
"저의 주님!"
사랑은 관계성을 정립합니다. 나에게 그가 누구인지, 그에게 내가 누구인지 압니다. 그리고 표현합니다. 예수님 주변에 많은 제자들과 군중이 있지만 이처럼 감미로운 호칭으로 그분을 부를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요한 20,29 참조)
이 말씀을 듣고 계실 예수님 마음이 참 행복하셨을 겁니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죽임을 당하셨지만 지금은 사람에게 위로를 받는 순간입니다. 그녀의 사랑이 예수님 마음에도 새 생명이 꿈틀하게 합니다. 부활입니다. 그녀 역시 예수님께는 "나의 마리아"입니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요한 20,15)
죽은지 사흘 지난 시신을 모셔간다니 역시 사랑은 사람을 대책 없게 만듭니다. 모실 무덤도 변변히 마련했을 리 없는 한 여인의 간 큰 제안에 예수님 마음은 또 한 번 사랑이 차 오르셨을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마음을 다해 "마리아야!"(요한 20,16) 하고 부르십니다.
"마리아"라고 불렀지만 '나의 마리아'로 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녀는 부르시는 분이 누구이신지 즉시 알아차립니다. 사랑은 이렇듯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요한 10,3 참조).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
예수님께선 왜 단순한 말씀을 이리도 복잡하게 표현하셨을까요? 굳이 "내"와 "너희"를 두 번씩, "아버지"와 "하느님"을 두 번씩 쓰시지 않고 한 번에 몰아서 말씀하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마리아를 통해 먼저 제자들에게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신 듯합니다. 실없는 소리 같지만 제자들은 자기들이 한 일이 있으니 예수님이 부활하셔도 걱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분이 오시면 자기들 꼴에 대해 어쩌면 화를 내시거나 실망하시거나 다그치실 수도 있다고 여겨, 영 면이 서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배신하고 부정하고 달아나 숨어버린 제자들이 이처럼 스스로 당신과 자기들 사이에 벽을 치고 관계를 단절하지 않도록, '일은 이렇게 되었지만 여전히 내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시고 내 하느님이 너희 하느님이심은 변함 없다'고 안심시켜 주시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나와 너희는 여전히 형제고, 또 그분은 아직도 나와 너희의 하느님이시라고 강조하시는 것이지요. 설령 너희가 나를 버리고 죽이더라도 이 관계성은 절대 변하지 않으니 괜찮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 우선 중요한 것은 제자들 됨됨이와 행실 추궁이 아니라 그들의 구원입니다.
또, "아버지"와 "하느님"에 소유격으로 "내"와 "너희"를 반복해 붙이심으로써, 방금 마리아가 고백한 "저의 주님"처럼 이 말씀을 듣게 될 제자들을 사랑의 관계성으로 다시 한 번 초대하시는 것이지요.
독서에는 유다인들을 향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가 계속됩니다. 베드로의 목소리 톤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다그치거나 따지거나 저주를 퍼붓고 있나요? "베드로는 ... 간곡히 이야기하며 ... 타일렀다"(사도 2,40)고 합니다. 이미 한 발 먼저 예수님의 화해와 용서를 체험한 그는 이미 화해와 용서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지금 베드로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 죽음의 탓을 유다인들에게 돌리는 단죄가 아니라 그들의 구원입니다. 이 역시 한 발 먼저 그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사도 2,39) 배움이 없는 한 투박한 어부의 입에서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흘러나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그 답을 미사 시작 때 집회서 저자의 목소리로 듣습니다. "지혜의 물을 마시면 굳세어지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지혜가 너희를 영원히 들어 높이리라."(입당송) "지혜의 물," 곧 성령을 마신 베드로는 누구보다 담대하게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성령은 지혜이고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활 시기 동안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하며 새 생명을 누리는 가운데 부활의 신비를 완성하는 성령 강림을 향해 달려갈 겁니다. 혹시 마음에 아직도 빛이 선명히 떠오르지 않은 것 같아 의기소침하고 있다면, 부활은 이제 시작이니 염려 말고 달려갑시다. 전례 시기의 풍부한 은총이 걸음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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