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루카복음의 유명한 엠마오 제자들과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주간 첫날 바로 그날!"(루카 24,13)
복음사가는 안식일 다음 날, 즉 예수님께서 돌아가신지 사흘째 되는 날이라는 시간적 배경에 "바로 그날"이라는 수식을 붙여 그 제자들의 심정에 대해 복선을 깔아 줍니다. 그들이 스승을 잃고도 사흘이나 더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것이, 아마 돌아가시고 사흗날에 부활하시리라는 예수님 말씀을 믿고 기다린 게 아니었나 봅니다. 바로 오늘 새벽 무덤에 갔던 여인들에게서 그분이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증언까지 들어놓고서는, 기뻐 뛰기는커녕 "바로 그날"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니 말입니다.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24)
이 말에는 실망감이 가득 담겨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발길을 돌린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복음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빈 무덤이나 천사의 발현과 전언 등 모든 정황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으로 무게가 기울고 있는데 정작 주인공들은 그분 죽음과 부활의 실마리를 놓친 채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보기"를 원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죽으셨던 예수님이 살아 돌아오시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못했으니 이제 다 끝났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우리와 달리 예수님과 실제로 함께 지내온 그들에게는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잡히는 실체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들에겐 그것이 부활일 테니까요.
아직 마음의 눈, 영의 눈을 뜨지 못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루카 24,27) 짚어주시면서, 말하자면 인텐시브 코스의 집중 교육을 시켜주십니다.
"그분을 붙들었다."(루카 24,29)
두 제자는 낙향길에 마주친 이름 모를 한 나그네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나 봅니다. 좀 더 함께 머물고 싶었고 그분 말씀을 더 듣고 싶었나 봅니다. 마치 사랑하는 이와 더 있고 싶은 연인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저물어가는 저녁 시간을 핑게로 그분을 붙듭니다.
누군가를 붙든다는 건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태도입니다. 마음에 든 상대에 대한 간절한 바람, 애원, 갈망 등이 깃들어 있지요. 우리가 하느님께 닿고자, 터치하고자, 붙들고자 그분을 향해 길이를 모를 정도로 영혼의 팔을 길게 길게 뻗치는 것이 기도의 한 단면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제자들도 살아계신 하느님을 붙들고자 그분께 마음의 팔, 육신의 팔을 뻗치고 있으니 어쩌면 그들의 실망한 영혼이 예수님을 만나 말씀으로 건드려져 그분을 갈망하는 기도의 상태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독서에서는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을 걷게 한 베드로, 요한의 일화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억 속에는 과거 어느날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었던 한 사건이 남아있지요.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을 때,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했던"(마르 8,32) 일 말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모든 걸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온 자기 처지가 망쳐지는 게 다급했던 나머지 그래선 안 된다며 예수님의 말씀과 사명을 뒤집으려 했지요. 그때 그의 '붙드는' 행위는 집착과 소유욕, 조종과 지배욕이 깔린, "사탄"(마르 8,33)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의 이 말을 들어봅시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사도 3,6) 지금 베드로는 무엇을 붙들고 있나요? 아니 무엇을 붙들어 이미 그것을 소유하고 있나요? 그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과거 예수님의 사명을 거부하려 그분을 꼭 붙들던 그가, 이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여 꼭 붙들고 있으니, 어쩌면 오늘 독서인 사도행전 3장이 보여주는 진짜 기적은 불구자였던 이의 것보다 베드로 자신일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오늘 치유를 받은 이는 복됩니다. 베드로가 "가진 것",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온전해진 것에 더해, 난생 처음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곳이 성전이었으니까요. "그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면서 ...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사도 3,8) 일생을 성전 문 곁에서 자선을 청하며 살아온 그는 치유에 대한 갈망 이상으로 성전 안, 그 깊은 지성소와 그곳에 현존하시는 분이 궁금하고, 또 가까이 모시는 이들을 부럽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는 이제 일생의 두 갈망을 다 이룬 채, 세상을 두 발로 딛고 서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다시 엠마오 제자들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 본"(루카 24,31) 그들은 그제야 "말씀하실 때 우리 마음이 타올랐음"(루카 24,32)도 깨닫습니다. 빵도 말씀도 현존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타오르는 마음 역시 그분의 현존이고요. 이렇게 물질세계의 원리와 육체적 실재를 넘어서는 진정한 부활의 의미를 깨달은 그들은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루카 24,33)고 하지요. 과연 "바로 그날" 예루살렘을 떠났던 성정답습니다!
많은 성경 말씀이 그런 것처럼 오늘의 독서와 복음의 대목들도, 영적 보화들을 특히나 더 무궁무진하게 담고 있기에 묵상하는 이에 따라 다양한 길이 펼쳐지리라 믿습니다. 오늘 제가 더듬은 길 역시 그 보화의 아주 작은 단편에 불과할 것입니다. 어느 길이어도 좋고 어떤 깨달음이어도 좋습니다. 우리게 다가온 말씀이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하고, 우리가 금이나 은, 자기 자아나 아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꼭 붙들어 소유하고 있다면 이처럼 말씀에 머무르는 기도는 우리를 반드시 그분께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마음껏 말씀의 바다, 그 대양에 풍덩 빠져 즐기십시오. 마음껏! 마음껏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냉담자가 엄청 많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접하고 감동하고 또 가톨릭 교회와 신앙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었는데 언젠가부터 신앙생활에 회의가 오고 성직자, 수도자, 교우들의 삶도 알아갈수록 더 실망하게 되면서 냉담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들을 어떻게 다시 아름다운 신앙생활로 되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 교회 구성원 모두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가 그 답을 제시해 줍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이 바로 한때 열심히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께서 힘도 못쓰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자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내려가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의 냉담자들이지요. 그런데 이 에피소드의 결론은 이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기쁘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먼저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며 함께 대화했습니다. 그런 대화 가운데 예수님께서 동행하시며 개입해 주십니다. 그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성경구절들을 들려주시며 묵상하여 깨닫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빵을 나눌 때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쁨과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히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다른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나눕니다.
그렇습니다. 말씀과 성체를 통해서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믿음의 눈이 열릴 수 있습니다. 오늘 미사성제를 봉헌하면서 냉담자들을 기억합시다. 그들이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함께 대화로 나누며 말씀과 성체를 나눔으로써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뵙고 신앙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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