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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성 예레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 오상선 신부님 ~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2020.09.30.mp3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주님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묻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루카 9,59)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1)

복음의 대목에서는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각각의 경우마다 사정과 정황이 다른 듯하지요. 그에 따라 예수님의 답변도 달라집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이들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우시고 자애가 넘치시는 예수님이시지만, 부르심과 소명에 대해서는 이처럼 단호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아마도 그건 제자들이 주님의 은총을 전하는 전달자로서 마냥 수혜자로만 머물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 파견하신 이, 그분의 대리자로서 그에 합당한 영혼과 정신을 가지고 소명을 수행해야 할 테니까요.

기껏 주님께 다가가 추종의 의사를 밝혔다가 냉정한 답변을 들은 이들 편에서는 다소 냉혹하기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장례나 가족과의 작별 인사조차 금하는 스승이라면 제자단 입문을 재고해야 할까 인간적으로 고민을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가만히 주님의 말씀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무슨 감정이나 편견을 가지고 답을 하신 건 아님을 알겠습니다. 그 사람에게 그렇게 답변하신 이유는 어쩌면 예수님과 당사자 둘만 알 겁니다. 이 말씀들은 그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갈망과 욕망을 모두 아시는 예수님의 개인 맞춤형 답변이지요.

주님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가에 대한 답은 사실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있습니다.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상처와 어둠, 두려움과 분노 등이 주님을 향한 시각에 필터로 지나치게 작동하면 올바른 하느님관을 지니기 어렵지요.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집착해 해석하는 것을 넘어서, 말씀하시는 분의 마음을 알아듣도록 애써야 합니다.

제1독서 대목은 삶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욥에게 친구들이 충고하자 욥이 답하는 내용입니다.

"분노하시어, 뒤엎으시는 분, 요동치게 하시는 분, 솟지 말라 명령하시고, 봉해 버리시는 분, 등을 밟으시는 분, 잡아채시며..."(욥 9,5-12)

욥의 말 안에 드러난 하느님 모습이 많이 낯설지요? 우리가 아는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욥 1,8) 욥의 목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가 말하는 하느님이 아주 폭력적이고 강압적이며 권위주의적으로 느껴지네요.

어쩌면 지금 가족과 재산, 건강까지 비극적으로 한꺼번에 잃은 욥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던 분노와 억울함, 서러움, 두려움이 한껏 끌어올려지는 것 같습니다. 욥과 함께, 묵묵히 듣고 계실 주님의 마음에도, 읽고 있는 우리의 마음에도 고통이 파고드는 것을 느낍니다. 욥은 지금 그 피폐해진 영육 안에, 불행이 뒤범벅 되어 절규하며 울부짖는 모든 인류를 담고 있습니다.

"내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리라고는 믿지 않네."(욥 9,16)

욥은 하느님께서 침묵하고 방관하신다고 여겨 더욱 슬퍼합니다. 하느님을 고통 중에 함께하시는 분으로 더이상은 믿지 않는 것. 이 오해는 주님께도 너무나 큰 아픔입니다.

앞으로 욥은 우리도 얼마쯤은 체험으로 알고 있는 시험의 시간을 통과할 것입니다. 상실과 시련, 가난 속에서 예전에 부유하고 행복하고 충만했을 때 가졌던 하느님관이 무참히 부서졌다가 이내 영적으로 거듭 정화되는 죽음과 부활의 영적 여정을 지나게 될 것입니다. 욥은 지금 황망함과 두려움으로 거칠어진 속내를 여과없이 내비칠지언정, 끝까지 하느님을 놓지 않습니다. 하느님도 고통받는 이에게서 흘러나오는 울분과 불평, 악담으로 욥을 내치지 않으시고요.

사랑하는 벗님! 나는 주님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살펴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자라온 환경과 배움과 사회적 만남 안에서 형성된 하느님관이 주님의 진심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는지, 혹은 도움이 되는지요? 우리를 각자의 자리로 불러 주시고, 각자에게 알맞게 권고하시고 이끄시는 그분 목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요?

복잡한 생각을 내려 놓고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분의 부르심에는 오직 사랑, 사랑밖에 없다는 걸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알게 될 것입니다.

성 예로니모,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