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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부활 제 5주간 토요일 / 오상선 신부님 ~

💦 부활 제5주간 토요일(사도 16,1-10)(요한 15,18-21)

 

제1독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6,1-10
그 무렵 1 바오로는 데르베를 거쳐 리스트라에 당도하였다.
그곳에 티모테오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는 신자가 된 유다 여자와 그리스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서, 2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다. 3 바오로는 티모테오와 동행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에 사는 유다인들을 생각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베풀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리스인이라는 것을 그들이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 바오로 일행은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며,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이 정한 규정들을 신자들에게 전해 주며 지키게 하였다. 5 그리하여 그곳 교회들은 믿음이 굳건해지고 신자들의 수도 나날이 늘어 갔다.
6 성령께서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셨으므로, 그들은 프리기아와 갈라티아 지방을 가로질러 갔다. 7 그리고 미시아에 이르러 비티니아로 가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8 그리하여 미시아를 지나 트로아스로 내려갔다. 9 그런데 어느 날 밤 바오로가 환시를 보았다.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오로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것이었다.
10 바오로가 그 환시를 보고 난 뒤,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떠날 방도를 찾았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8-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20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21 그러나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요한복음 15장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사랑을 이야기하면서(15,1-12) 매우 감미롭게 시작되다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가장 큰 사랑' 대목에서(15,13-17) 뭔가 불길한(?) 복선이 깔립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는 대목에 이르면 어조가 완전히 바뀌어 '미움과 박해'가 언급되지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요한 15,18)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 15,20)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따르는 이는 당신이 겪으신 것을 그대로 겪게 되리라 하십니다. 사랑받고 신뢰받고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미움과 박해와 죽음까지 각오하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사랑하고 따르는 이들은 이미 한 배에 탄 것입니다. 같은 운명, 즉 "운명 공동체'가 된 것이지요. 그들 앞에는 사랑받든지 미움받든지, 살든지 죽든지 둘 중 하나의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내 이름 때문에"(요한 15,21) 모든 것을 겪을 것입니다. 그 이름은 우리에게 무한한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 되기도 하고 조롱과 수치와 죽음의 올가미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제자들을 박해하는 부류와 예수님 말씀을 지키는 부류는 예수님을 보내신 분, 즉 아버지를 모르고 아는 차이입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라던 예수님 말씀이 꽤나 심각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럴 땐 딱히 어떻게 대처하라는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그런 줄 알아라" 아니면 "기억하여라" 정도입니다. 정말로, 미움이나 박해, 죽음같은 그런 도전들이 닥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에 그 답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고장에 사는 유다인들을 생각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베풀었다."(사도 16,3)

티모테오는 유다인 어머니와 그리스인 아버지를 두었기에 실상은 유다 율법에 따라 할례를 이미 받았어야 했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굳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이 있었지만, 유다인과 이방인의 혼혈 자녀일 때의 적용에 있어서 바오로 사도는 '할례'를 택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 입장에서 의무가 아니더라도 자칫 그 고장 유다인들과 마찰을 일으킬 소지를 미연에 방지하여 선교의 걸림돌을 미리 치우려 한 것 같습니다.

"성령께서 ... 막으셨으므로 그들은 ...을 가로질러 갔다. ...로 가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 로 내려갔다."(사도 16,6-7)

바오로 사도 일행의 동선을 관상합니다. 그들의 길이 번번이 막히고 있네요. 그런데 그들은 개의치 않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 다음의 목적지로 발길을 돌립니다. 그게 또 막히면 또 다른 길을 뚫고 있네요. 분명 뭔가 순조로운 진행은 아닌데 그들은 꺾이거나 좌절하거나 주저앉지 않습니다. 제겐 그들의 움직임이 길을 몰라 갈팡질팡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말로 치열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고 있다고 보입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세상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예수님의 이름을 옷입은 이들이 새겨야 할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고수해야 할 본질이 아니라면 상대방의 믿음의 정도에 따라 대처하는 유연성, 그리고 가고자 하는 길이 막혀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최선을 다해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겸손과 충실성입니다.

하느님 뜻 앞에 유연하고 겸손하며 충실한 영혼은 자기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세상"에 대해 항거하거나 스스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미 그 길을 가신 스승을 기억하고 묵묵히 그분 뒤를 따르되, "세상"이 아버지를 알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이 몰라서 그러는 거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으니까요.(요한 15,21 참조) 그러니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를 알게 되면, 또 누가 압니까? 바오로 사도도 서러워 할 열혈 사도가 또 탄생하게 될지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러니 두려워하지 맙시다. 미움도 박해도 다 지나갑니다. 왜 미워하냐고, 왜 못살게 구냐고 맞서기보다, 그들도 우리와 하나가 되어 아버지를 알게 해주십사 기도합시다.

"아버지, 이들이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시고,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영성체송)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