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뭍에서 호수로, 호수에서 뭍으로>
그날 새벽 뭍에다 배를 대고
빈 그물을 씻고 있었지
초췌한 모습 허탈한 마음으로
밤새 나에게 아무 것도
베풀지 않은
쌀쌀맞기 그지없던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러나 이내 곧
다시 맞닥뜨려야만 하는
삶의 터전이요
고통의 현장인
호수를 등지고서 말이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만
무언가 해야만 했기에
그저 내 손가락들을
작은 물고기 삼아
그물코에 넣었다 뺐다
뜻 없는 짓을 반복하던
그날 새벽녘
낯선 그분이 다가와
배에 오르시어 말씀하셨지
뭍에서 조금 저어
호수로 나가줄 수 있겠소
뭍에서 호수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
평소 같았으면 그랬겠지
나에게 모든 것이었던
너무나도 익숙한 호수였으니까
그러나 그날은 그렇지 않았어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닌
너무나도 낯선 호수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그분의 까닭 모를 부탁을
흔쾌히는 아니지만
난 들어 주었어
뭍에서 호수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가던 길
먹고 살기 위해서
좋으나 싫으나
어쩔 수 없이 가야했던 길
그때 내키지는 않았지만
낯선 그분과의 첫 만남을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멀리도 아니고 그저 조금만
청하는 낯선 그분에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었으니까
이 정도는 해주는 것이
사람으로서 예의였으니까
뭍에서 조금 떨어진
그곳에서 잠시 머물러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를 마치신
조금은 익숙해진 그분은
또 다른 부탁을 하셨지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시오
아 어떻게 해야 하나
뭍으로 돌아갈까
깊은 데로 나아갈까
이분이 뜻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왜 처음부터 깊은 데로
나가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뭍에서 호수로
이번에는 얕은 데서 깊은 곳으로
다음에 또 무엇이 있는 것일까
그러면 다음에는 그 무엇일까
뭍으로 돌아가는 것도
깊은 데로 나아가는 것도
이제 나에게 달려 있는데
아 어떻게 해야 하나
짧은 순간 스치는
수많은 물음들을 가슴에 담고
난 한 걸음 더 나가고 있었던 거야
조금씩 그분에게 끌렸는지도 모르지
이미 시작했으니 되돌리기 싫었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라 그저 가는지도 모르지
아무튼 깊은 데로 나아갔고
아무튼 그물을 내렸어
그분이 하라는 대로
그리고
지난 밤 처절한 패배의 현장에서
난 다시 일어났어
아니 난 다시 일으켜졌어
일어났기에 기뻤지만
일으켜졌기에 두려웠어
이제 낯설진 않지만 아직은 잘 모를
나를 일으키신 그분 앞에서
이제 그만 여기까지만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해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강박 속에
내가 떠날 용기가 나질 않아
나에게서 떠나시라고 읊조리던
참담한 패배를 딛고
두려운 승리를 품었던
그날 새벽녘
첫 만남의 낯섦을 녹이고
서서히 어느덧 날 사로잡은 그분은
마지막으로 청하셨어
두려워하지 마시오
이제부터 사람을 낚으시오
그래 그랬던 거야
그분이 내게 원했던 것은 단 하나
물고기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되는 것
내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명을 맡기시려고
조금씩 당신을 내어주셨던 거야
조금씩 나를 가지셨던 거야
조금씩 나를 드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사람을 낚으시오
옆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나가 그물을 던지시오
뭍에서 조금 저어 호수로 나가시오
짧지도 길지도 않았던 시간 동안
그분이 내게 건넨 애틋한 청을
마지막에서 처음으로
곰곰이 되새기면서
어슴푸레 밝아오는 동녘을 바라보며
그날 새벽 나는 다시 뭍에 올랐어
여느 때처럼 호수로 나갈 채비를 하려
잠시 오른 것이 아니야
다시는 호수에 나가지 않으리라
이제 뭍에 뼈를 묻으리라
그분과 함께 하기 위해서
아직은 설은 다짐으로
아직은 뿌연 바람으로
그날 그렇게 뭍에 올랐어
그리고 난 지금도 뭍에 있어
그래서 난 지금도 뭍에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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