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3주간 월요일 / 정인준 신부님 ~

1월 27일 월요일  (녹)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에게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9,15.24-28
형제 여러분, 15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24 그리스도께서는, 참성소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곳에, 곧 사람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25 대사제가 해마다 다른 생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듯이, 당신 자신을 여러 번 바치시려고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26 만일 그렇다면 세상 창조 때부터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27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28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사탄은 끝장나게 될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2-30
그때에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25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의 강론말씀


“마귀와 베엘제불”


마르코 복음사가는 다른 공관복음 마태와 루카와는 달리 문체가 간결하고 표현도
매끄럽지가 못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한 부정적인 표현도 좀 더 완곡한
것보다 좀 더 노골적인 단어를 쓰기도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표현은 솔직하게 ‘미쳤다.’ ‘마귀들렸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툭툭 던진 말이 짧고 간단하기는 하지만 해석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베엘제불’이라는 단어입니다. 학자들은 이 단어를 풀어보면
‘바알’과 ‘제불’이라는 단어가 합해진 것으로 봅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 보면
이방인의 신들 중에 하나로 보는데, 마르코 복음사가가 알아듣기로는 악령을 제압하는
두목악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의 특징은 신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신을 숭배하는 관습이 있는데 여기에서
‘다신(多神 )’ ‘숭배(崇拜)’라는 말이 생긴 것입니다. 유일신(唯一神)의 신앙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여러 신을 숭상한다는 것은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기에 예수님을
욕할 때 이런 단어를 쓴다는 것은 비방과 모욕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정신 나간, 또는 마귀들린 사람으로 몰고 가는 표현에 예수님께서는
단순논리를 맞서시는 것입니다. ‘서로 힘을 합하지 않고 갈라지면 당연히 둘 다 망한다.’라는
일반사회의 현상을 들어 ‘바알과 베엘제불’의 관계를 들어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두목인 베엘제불이 왜 같은 편, 아니면 하위의 바알을 제압하겠는가?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결론은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마귀를 제압하는 것은 같은 편인
베엘제불이 아니라 바로 악의 세력을 대항하시는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힘’이시라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멀쩡한 예수님을 옭아매기 위해서 이렇게 혐오스러운 함정단어를 썼는데,
여기에 대한 주님의 강한 표현이 또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8-29)


예수님께서는 ‘일반적인 죄, 신성을 모독하는 죄’와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대비시켜
말씀하십니다. 전자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있지만 후자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고 못을 박아
말씀하십니다.


늘상 사람이 범하는 죄, 다시 말해 십계명의 죄들을 말 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거나 우상숭배를 해서 짓는 죄들을 묶어서 말씀하십니다.
율법학자들이 꼽는 구약의 죄들을 통털어 말씀하신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하시는 성자이신 주님의 일에 대해 율법학자들이
모함하는 것은 용서할 수가 없으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론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시는 마귀를 쫒는 일을 반대로 ‘마귀의 힘’에 의해서 마귀를
쫒아 낸다고 하는 터무니 없는 모함에 대해서는 용서 받기 어렵다는 강한 표현을 쓰신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의 메시지는 이제는 구약의 그물을 가지고 신약의 세계를 이해하거나
덮을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터무니 없는 말로 모함이나 누명을 쓸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결백하면서도 구차하게 변명하기에 바쁜 자신을 볼 때가 있습니다.
한 웅큼도 안되는 사람들의 동정이나 이해를 바라지는 말아야 한다는 쓰라린 경험을 얻을 때가
있습니다.


나의 결백함을 알아주시는 하느님께 의지하며 세상의 회오리에 휩쓸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이집 저집 기웃거리며 동정을 얻으려 하지 말고 침묵 중에 주님께 용기와 슬기를
주시도록 기도하는 편이 더 나은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나를 이해하고 편들어 줄 사람도 많지도 않습니다.
그들도 다 세상 편이거나 내 억울함을 재미있어 하니까요.


그리고 주님께서도 모함을 받으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좋은 일을 하고도 욕을 먹는 경우가 있기에 오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우쭐대기 보다는
늘 겸손함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정인준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