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3주간 토요일 / 정인준 신부님 ~

2월 1일 (녹)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제1독서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1-2.8-19
형제 여러분,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2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8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9 믿음으로써, 그는 같은 약속의 공동 상속자인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머무르면서, 약속받은 땅인데도 남의 땅인 것처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10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1 믿음으로써,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인 데다 나이까지 지났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약속해 주신 분을 성실하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12 그리하여 한 사람에게서, 그것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처럼 수가 많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셀 수 없는 후손이 태어났습니다.
13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14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15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16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리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도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17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18 그 외아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9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의 강론말씀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기도생활이 늘 기쁘고 열정으로 채워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 시간의 성체조배, 한 꾸미의 묵주기도가 때로는 분심과 무미건조로 채워져서
그 고통을 호소하는 교우가 있습니다.

미사 때에 다른 생각으로 또 형식적인 습관으로 이이어지다 보면 미사 후에
‘내가 지금 뭐하는 것인지?’하며 반문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특히 수도자들, 그것도 우리 교회의 보고하고 하는 봉쇄수도자의 호소 중에
하나가 ‘영성의 사막’이라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자신의 성소의 삶이 무미건조한 것이기에 갈등과 때로는실망으로 절어있지요.

그 시기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하느님의 부재’가 다가 오는 것이기에 때로는
수도생활의 의미를 물어 볼 때가 있고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성소를 떠나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비단 수도자, 성직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교우들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왔다고
자부하다가도 문득 이런 질문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정말 하느님은 계신 것인가?’ ‘이천년 전 이스라엘 한 귀탱이에 계시던 예수님과
연결은 되고 있는 것인가?’ ‘그분이 세우셨다는 가톨릭교회가 참다운 종교인가?’라는
별별 회의의 질문으로 자문하며 혼란과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신앙의 시험을 겪지요. 물이 없고 먹을 음식이 없는 마당에 하느님께서는
도와주지 않으시는 것 같은 의심에 그들은 불평하고 또 모세에게 대들기까지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를 받지만 ‘선택’의 어려움을 겪는 존재이지요. 내가 하느님을
믿고,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때로는 거기에 회의를 갖게 되고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노고 없는 결실은 없다.’라는 말이 있듯 고통과 회의를 거치지 않는 신앙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비자들의 교리를 하면서 또 세례성사 때에, 지금은 신앙의 기쁨을 누리겠지만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기에 ‘시련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굳데 신앙을 지키라’는
당부를 하게 됩니다.

신앙은 무지개 빛처럼 아름답고 낭만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히브리 서간의 저자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는 서간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히브 11,17)

히브리 저자의 말대로 아브라함에게는 시험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이냐?’
아니면 ‘아들에 대한 사랑이냐?’인 것이지요.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아들을 제단에 바치려 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에 감동하시며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이리 저리 선교여행을 합니다.
군중을 가르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기 위해 주님께서 배에 오르십니다.

제자들은 그저 주님께서 좋기만 합니다. 그분은 권위 있게 가르치시고 사람들이
그를 따르니 어떻게 보면 우쭐할 정도로 스승님께서 자랑스럽습니다.

그들의 배는 거센 돌풍을 만나 애를 먹습니다. 그런데도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참다못해 주무시는 스승님을 깨우며 외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

주님께서는 일어나시어 바다를 향해 호통을 치시고 조용해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바람이 멎고 바다는 아주 고요해 집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한 마디 말씀을 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40절)

그런데 그들은 아직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시련의 고통을
겪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그런 모습에서 우리는 ‘풋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씩 우리의 오류에 빠질 때가 있는데 그것은 신앙을 머리로 또 이론으로
이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공동체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보다는 인간의 한계에서 오는 것으로
뒤범벅이 되어 시끄러울 수 있는데, 이것이 어쩌면 더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배추를 가지고 김치를 담글 때, 양념이 골고루 버물고 시간을 두고 숙성시켜야
김치의 고유한 맛을 낼 수가 있습니다.

신앙에서도 시련과 고통의 단계를 거칠 때 비로소 ‘신앙의 맛’을 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신앙은 생각처럼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기다려
주시듯 우리도 자신과 이웃의 신앙을 기다려 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기다려주고 인내하면 우리가 받은 신앙은 더욱 성숙해지고 하느님 나라를
가까이 시작할 수 있게 되겠습니다.

-정인준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