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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3주간 토요일 / 송영진 신부님 ~

<연중 제3주간 토요일 강론>(2025. 2. 1. 토)(마르 4,35-41)


복음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의 복음강론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바람과 호수까지도(자연계까지도) 지배하시고 복종시키시는 주님”이라는 증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죽게 되었다고 무서워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편안하게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신 것은 제자들의 상황을 모르셨기 때문도 아니고, 관심이 없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바람과 파도 때문에 고생은 조금 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제자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눈앞의 위험만 보고 있지만,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십니다.


<나중에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희는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요한 16,30).”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요한 16,31-32).”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제자들의 믿음은 아직도 부족한 상태였고, 부활, 승천, 성령 강림 후에 믿음이 완성됩니다.>

2) 제자들은 죽게 되었다고 무서워하면서 예수님을 깨웠다가 믿음이 부족하다고 혼났지만, 나중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헤로데가 베드로를 끌어내려고 하던 그 전날 밤, 베드로는 두 개의 쇠사슬에 묶인 채 두 군사 사이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문 앞에서는 파수병들이 감옥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더니 감방에 빛이 비치는 것이었다.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두드려 깨우면서, ‘빨리 일어나라.’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쇠사슬이 떨어져 나갔다(사도 12,6-7).” 사형 집행 전날 밤인데도 베드로 사도는 아주 태평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천사가 옆구리를 두드려서 깨울 정도로 베드로 사도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는 것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또 ‘믿음의 완성 단계’에 도달했음을 나타냅니다.

3) 복음 말씀의 이야기를 해석할 때, “예수님께서 지켜 주시니 우리는 죽지 않는다.” 라고 해석하거나, “예수님께서 항상 우리를 지켜 주시고, 죽지 않게 해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너무 단순하고 초보적인 해석입니다. <혹시라도 “믿음이 있으면 죽을 위험에서도 살아난다.” 라고 해석한다면, 그것은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객선 침몰이나 비행기 추락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사고들의 경우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아서 그런 사고가 생겼을까? 그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들은 전부 다 믿음 없는 사람들이었을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지 않은 사람들이었을까?


그런 사고를 당해도 죽지 않고 사는 것만이 주님의 뜻일까? 물론 그런 사고로 죽는 것 자체가 주님의 뜻일 수는 없습니다. 어떻든 무슨 병에 걸렸을 때나 어떤 사고를 당했을 때 ‘주님의 뜻’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말도 너무 남용하면 안 됩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7-8).”



베드로 사도가 사형 집행을 앞두고서도 태평하게 잠을 잔 것은 ‘자포자기’도 아니고, 반드시 살아난다고 믿었기 때문도 아니고, 살고 죽는 것을 모두 주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생사를 초월한 모습입니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항상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 주님께서 원하시면 살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그대로 데려가시는 것이 주님의 뜻일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육신의 목숨이 아니라(‘무병장수’가 아니라) 영혼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고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