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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사순 제 4주간 목요일 / 전삼용 신부님 ~

2025년 4월 3일 다해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요한 5,31-47)


복음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31-47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31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32 그러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34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35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36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37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38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40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41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42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44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45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46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47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의 강론




믿지 못하는 건 증거가 없어서 가 아니다

어제 심판이나 판단, 평가는 생존과 관계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평가에서 자유롭고 사적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평가를 하려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 사람이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평가를 위한 ‘증거’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무언가를 평가하려면 증거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젊을 때는 판단해야 하는 게 많았던 것 같습니다. 대학이나, 직장, 혹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결단은 인생을 좌우할 수 있기에 신중하게 고민합니다.

그러나 그 신중한 만큼 만족스럽지는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배우자를 선택하기를 정말 잘하셨습니까? 고해성사 때 들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분명 증거를 꼼꼼히 살펴보고 판단을 했을 텐데 왜 결국엔 배우자를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요? 분명 눈에 보이는 증거들을 무시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에서 개츠비는 데이지 부캐넌이라는 여인을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모든 삶을 그녀를 다시 얻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버립니다. 그의 사랑은 위대합니다. 그런데 정말 위대할까요? 그는 믿지 말아야 하는 증거들을 무시했기에 비극을 맞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이 개츠비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젊은 시절 군인이었을 때 데이지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신분 차이로 인해 그녀와 결혼할 수 없었고, 전쟁 후 돌아왔을 때 데이지는 이미 부유한 톰 부캐넌과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개츠비는 그녀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막대한 부를 쌓고 호화로운 저택에서 밤마다 파티를 엽니다.

개츠비의 이웃이자 이야기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는 그를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믿고 있었습니다. 데이지가 톰을 떠날 거라고. 오로지 사랑만으로 세월을 되돌릴 수 있다고.”

마침내 개츠비는 닉의 도움으로 데이지와 다시 재회하게 됩니다. 데이지는 처음엔 개츠비를 잘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결국 처음의 어색함을 지나, 두 사람은 다시 감정을 나누게 되지만, 개츠비는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데이지”를 되돌리려 합니다.

그는 닉에게 단호히 말합니다. “그녀는 톰을 사랑한 적 없어. 단 한 번도.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녀는 언제나 나만을 사랑했어.” 그러나 데이지는 진실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끝내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나는… 나는 그땐 톰도 사랑했어.”

개츠비는 돈 때문에 자신을 떠났던 것, 자신을 잘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 톰을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있다는 것 등의 증거들을 무시합니다. 자신의 사랑만 완전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결정적인 장면은 데이지가 몰던 차로 인해 마틀드 윌슨이라는 여자가 죽게 되고, 그 사건의 책임을 개츠비가 대신 지게 되면서 벌어집니다.

그는 데이지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합니다. 하지만 데이지는 아무 말도 없이 톰과 함께 집을 떠나버리고, 개츠비는 그녀의 전화만을 기다립니다. 닉은 그런 개츠비를 보며 말합니다: “그는 아직도 전화가 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 여자가 그를 구해줄 거라고.” 하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고, 대신 마틀드의 남편인 조지 윌슨이 찾아와 개츠비를 총으로 쏘고 자신도 자살함으로써 이야기는 비극적으로 끝이 납니다.

개츠비는 끝까지 데이지를 믿었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사랑에 감동하고, 자신과 함께 해 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데이지는 자신의 안위와 사회적 지위, 안정된 가정을 포기하지 않았고, 개츠비가 모든 것을 걸고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에게 그저 ‘잠시의 기억’에 불과했습니다.

닉은 결국 개츠비의 장례식에 참석한 유일한 친구가 되었고, 그를 이렇게 평합니다: “개츠비는 위대했다. 그가 그토록 순수하게 꿈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 꿈이 현실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개츠비는 사실 데이지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뿐’입니다. 데이지를 사랑하는 것도 결국 그 마음의 심연에는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수많은 증언과 증거에도 당신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마치 나폴레옹처럼 자기 자신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대부분이라 해도 될 것입니다. 자기에게 영광을 주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옳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옳음을 증명해가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 자신은 ‘뱀’으로 표현됩니다. 뱀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다니 될 말입니까? 겸손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뱀이 하는 수많은 잘못된 판단을 통해 배워나가야 합니다. 어차피 인간은 옳을 수 없다는 것을.

증거를 통해 올바로 판단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합니까? 아이에게 진리는 부모입니다. 부모가 옳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시키는 일은 잘 따라 합니다. 그래서 아이는 쉽게 믿습니다. 그리고 올바로 믿습니다.

아이들이 어른을 잠깐 보고 판단할 때 그 판단은 틀리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생각이 굳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될수록 교만해지니 문제입니다. 진정한 성장은 자기 자신이 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어린이가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자기를 믿지 않게 되는 과정입니다.

앤터니 플루(Antony Flew, 1923–2010)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무신론 철학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 있어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주장을 이끌었던 대표적 인물이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일찍이 1950년대에 발표한 논문 「신학과 반증(Theology and Falsification)」은 “신은 존재한다”는 주장을 반증할 수 없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주장이라고 말하며, 이후 수십 년 동안 무신론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신에 대한 믿음은 과학과 이성에 반한다”는 확신 속에서, 신앙을 가진 철학자들과 수차례 공개토론을 하며 신의 존재를 반박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플루는 단순한 이론적 무신론자가 아니라, 매우 고집스럽고 철저한 논리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나는 항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신의 존재를 부정해왔다”라고 말하며, 철저하게 ‘증거에 따라 사고하라’는 과학적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그가 수많은 철학자, 신학자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공공연하게 무신론을 전파했던 인물이었기에, 그의 삶이 후반부에 보여준 변화를 세상은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2004년, 이미 81세의 고령이 된 플루는 전 세계 철학계를 놀라게 할 선언을 합니다. 그는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의 증거를 보며, 우주의 기원과 생명체의 복잡성을 단순한 우연으로 설명할 수 없다”며,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발표합니다.

그는 하느님을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 하느님(personal God)이라기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첫 원인(First Cause)” 혹은 “우주의 지성(intelligent mind)”에 가까운 존재로 보았고, 이를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신론적 신앙(deism)”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플루가 생각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과학적 진보와 철학적 성찰이었습니다. 그는 특히 DNA의 구조와 복잡성, 우주의 미세 조정(fine-tuning), 생명 현상의 통합성과 목적성 등을 살펴보며 “이런 정교한 구조가 무작위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은 비합리적이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증거를 따르는 철학자다. 그리고 지금, 그 증거는 나를 신의 존재로 이끌고 있다.” 이 말은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그의 입장 변화가 단순한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자신의 철학적 원칙 ― ‘이성에 따른 판단’ ― 을 그대로 유지한 채 나온 결과였음을 보여줍니다.

2007년에는 그의 사상적 전환 과정을 담은 책 『There Is a God: How the World's Most Notorious Atheist Changed His Mind』가 출간되었고, 이 책에서 그는 과거의 자신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나는 내 고집으로 세상을 보았다. 나는 내가 옳다고 믿었고, 내 방식이 가장 이성적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것이 나를 진실에 가까이 데려다주었다.”

앤터니 플루의 사례는 한 인간이 자기 신념을 얼마나 고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신념이 참이 아님을 인정할 수 있는 지적 겸손의 위대함을 증명합니다. 그는 살아오면서 자기가 평생 주장해 온 것을 바꿀 줄 알았습니다. 자기 영광을 더는 추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나이와 함께 익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증거의 문제가 아닙니다. 겸손의 문제입니다. 겸손해지면 증거가 보이고, 교만하면 증거를 무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린이처럼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자기 머리에 왕관을 씌우지 않고 부모의 머리에 씌웁니다. 그렇게 증거들을 통해 객관적으로 믿음으로 쉽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증거가 많아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는다는 것은 증거를 주는 이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따라서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자는 믿지 못합니다. 내가 뱀임을 믿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수많은 증거들을 통해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삼용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