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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규만 주교님] 마리아 공경의 신약성서적 근거 3 - 마르코 6,1~6

3) 마르 6,1-6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 가셨다. ...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을 행하는 것일까? ... 저 사람은 목수가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

 

 

 

고향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메시아라는 사실에 눈이 가리어진 상태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친구의 진실,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적이 많을 것이다.  사실 예수가 처형된 것도 메시아에 대해서 백성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야 하는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 사제들, 율법학자들, 경건한 신앙인들에 의해서였다.

 

 

 

    1) 목수, 마리아의 아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일종의 격언이 예수의 가족 관계를 설명하는데 도입되었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당신의 가족과 친척들, 고향 사람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의미가 3,20-35에 확대되어 나타난다. 한 집안이 스스로 갈라지면 그 집안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1-3절은 전승부분이요, 5-6절은 현실을 드러내는 부분이며 4절은 이 두 가지를 잇는 부분으로 격언이 이용된 것으로 본다. 고향인들의 놀라움, 또는 몰이해가 예수의 출신성분의 비천함과 예수의 놀라운 가르침의 격차로 설명되고 있다.

 

    마르코 6,3을 다른 복음과 비교해 보면,

 

    - 마르 6,3 : 목수, 마리아의 아들

 

    - 마태 13,55 :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부르는 사람이 아닌가?

 

    - 루가 4,22 :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 요한 6,42 :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우리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고 있지 않은가?

 

 첫째로 마르코는 예수를 목수라 부르고, 예수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다시 말해 예수가 마리아의 아들로 나타날 뿐, 목수 요셉의 아들로 나타나지 않는다. 우선 이 구절에서 왜 예수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앞서 본 3,31에서도 아버지 요셉을 등장하지 않는다.

 

이점에 대해서 L. Raurantin은 이 마르코 복음의 표현은 예수의 동정 탄생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고 설명한다. 한편 D. Edwards는 마르코 복음은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음으로써 예수의 탄생이 자연적이고 정상적인 방법들 따라서 이루어졌다는 표현을 제시하지 않고서는 예수의 아버지로서 어떤 남자를 언급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특별한 상태일 수밖에 없는 그의 탄생에 대한 설명을 오해의 소지를 안고 그의 텍스트에서 다루어야만 했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 혹자는 요셉이 이미 사망한 후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 왜 마르코는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로만 이야기하는가?

 

설명 1. 마르코는 예수를 인간으로서 특성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과장적이고 초자연적인 요구들을 거부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마르코에게 있어서 예수는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는 괴이한 존재라기보다 십자가에 처형된 한 인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설명 2. 예수의 동정잉태를 암시하기 위해서다. 루가나 마태오와 비교할 때, 어느 것이 원천적인 표현인지 가려내는 일이 어렵다. 그런데 루가나 마태오는 목수와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표현하는데, 마르코는 목수, 마리아의 아들로 이야기하고 있다. 마르코는 의도적으로 예수의 부친을 언급하는 일을 회피하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마태오와 루가는 이미 복음 첫머리 부분에서 예수의 동정잉태를 말하고 있다. 그런 상태에서 서슴없이 예수의 아버지로서 요셉, 목수를 이야기하고, 예수를 목수의 아들, 또는 요셉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반면에 전혀 예수의 동정잉태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 마르코로서는 예수를 요셉, 또는 목수의 아들로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점에서 동향인들의 입을 통하여 동정잉태와 동정탄생을 암시하도록 했다.

 

의문 1. 마르코가 단순히 표현만을 바꾸면서 동정잉태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논리가 아닌가?

 

의문 2. 만일 마르코가 예수의 동정잉태, 동정 탄생을 알았다면 왜 그가 그의 친척들에 대해서 언급하였는가?

 

의문 3. 마리아가 예수를 아버지 없이 잉태했다면 왜 마리아가 당신의 아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받아들이고 있을까?

 

의문 4. 예수의 동정잉태를 알고 있는 두 복음사가는 마르코에서 볼 수 있는 부정적 태도(예수가 미쳤다)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왜 그런가?

 

설명 3. 동향인들은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아는데, 예수의 아버지는 모른다. 동향인들은 예수를 아버지를 모르는 사생아로 취급한 것이 아닐까? 사마리아나 중동지방에서는 사생아일 경우 어느 여인의 아들로 말하였다. 그러나 성서의 용법에서는 이것을 증명할 길이 없다. 만일 마르코가 예수를 사생아로 이해했다면 왜 그의 형제들을 계속해서 열거하고 있는가?

 

설명 4. 요셉이 사망한 이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장 합당한 설명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부의 아들을 어머니의 아들, 즉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로 부르는 것이 정상적인 것인가?  루가 7,12에 보면,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동네로 가시는데 ‧‧‧ 때마침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주치시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큰 떼를 지어 과부와 함께 상여를 따라 오고 있었다.‧‧‧ 여기서는 분명하게 과부임을 밝히고 있다. 어떻든 이 설명도 만족한 것이 되지 못하고 있다.

 

 

 

    2) 예수의 형제, 자매들

 

    마르코 6,3에는 4명의 형제의 이름이 나온다.

 

        : 야고버, 요셉, 유다, 시몬 그리고 누이들.

 

이 언급은 적어도 마리아의 예수 탄생 이후 동정문제와 관련된다. 만일 이들이 마리아의 자녀들이라면 마리아의 예수 탄생 이후의 동정은 부정적이다. 만일 반대로 그들이 마리아의 자녀들이 아니라면, 마리아의 예수 출생 이후의 동정을 지지할 수 있게 된다.

 

문제의 초점은 첫째로 형제(adelphos)라는 단어다. 둘째로 형제들의 이름으로부터 추론해 낼 수 있는 결론이다.

 

설명 1. 마르 6,3의 형제(adelphos)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혈족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친척들의 관계까지도 의미한다. 예컨대, 로마 9,3에서는 동족의 의미로서 adelphon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마태오 5,22에서는 이웃의 의미로서 adelpho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마르 6,3은 적어도 동족이나 이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가지 중요한 용법은 이 단어가 이복형제, 사촌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마르 6,17-18에 헤로데가 동생(adelpho)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다고 해서 ‧‧‧ 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 필립보는 헤로데의 이복동생 이였다. 그리스어본(70인역) 창세기 29,12에서 야곱은 라헬에게 자신이 그녀의 아버지의 adelphos 친척이라고 말한다. 히브리어 ah가 혈족, 또는 친척을 의미하는 바 adelphos로 번역하고 있다(창세 24,48에서도).

 

        아울러 열거된 4명의 형제들은 왜 마리아의 아들로 언급되지 않고 있는가? 이것은 그들이 마리아의 자녀들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2세기 중엽에 쓰인 야고보 복음(9,2)이라는 외경에는 이 형제들이 마리아 이전에 결혼해서 낳은 요셉의 자녀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마태오 1,25;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 아내와 동침하지 않고 지냈다, 루가 2,7: 그 해산 할 날이 차서 첫 아들을 낳았다라는 표현들이 마리아가 예수 이후 자녀들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지 않은가.  이점을 마태오와 루가를 취급하면서 살펴보기로 한다.

 

 

 

설명 2. 야고보, 요셉(요세), 유다, 시몬이라는 이름이 복음서에서 어떤 여인들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 마르 15,47 :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를 모신 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 마르 16,1 :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야고보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 마태오 28,1 : 안식일이 지나고 그 이튿날 동틀 무렵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 마태오 27,56 : 그 중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있었고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

 

    - 마태오 27,61 : 그때에 무덤 맞은편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앉아 있었다.

 

    - 루가 24,10 : 그 여자들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요안나와 또 야고버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 요한 20,1 :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에 가보니 ‧‧‧

 

    - 요한 19,25 :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클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외하고 세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 살로메만을 언급한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모친을 언급하고 이어서 세 여자를 이야기 한다.

 

    이것을 정리하면;

 

        * 마리아 막달레나 - 모든 리스트에 분명하게 등장한다.

 

        * 살로메 - 마르코 복음에서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로 나타난다(마태 20,20).

 

        * 예수의 이모 - 요한복음에만 나타난다.

 

        * 다른 마리아 -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요, 클레오파의 아내로도 나타난다.

 

        * 요안나 - 루가 복음에만 나타난다.

 

(마리아라는 단어는 미리암, 마리암, 마리안마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이름이다. 60개의 의미가 있는 만큼 매우 정확하지 않은 이름이다. 귀부인, 고행, 바다의 별, 희망, 계시 ... 등. 이집트에서는 미르함 야우, 또는 므리티암 이라는 단어로서 하느님의 총아라는 뜻을 지니고, 메소포타미아에서 마르라는 용어는 귀부인을 의미한다.  현대어에서 Notre Dame, Nostra Signora, Madonna, Our Lady는 귀부인, 우리들의 부인, 우리들의 주인마님의 뜻을 지닌다).

 

 

 

두 번째 문제는 이렇다.  이 야고보와 요셉(마르 15,40)은 6,3의 야고보와 요셉과 동일한 인물인가? 동일이라면, 예수와 배다른 형제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또 다른 두 인물 유다와 시몬은 누구의 아들인가? 왜 마르코는 한번은 두 사람만을 언급하고 또 한 번은 4명을 언급하고 있는가?  더욱이 마르코는 15,40에서 작은 야고보(미크론)라고 수식어를 붙이고 있는가?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아닌가?

 

만일 마르 15,40에 열거된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일 인물이라면, 예수의 친형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마르코 복음에서 그의 어머니, 선생님의 어머니로 나타나고,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는 다른 공관복음에서 다른 마리아로 나타난다. 또 만일 이 다른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일시 될 수 없다면 이 야고보와 요셉이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요셉과 동일인물인가? 그렇다면 adelphos라는 용어는 친척, 또는 이복형제를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출처 : [조규만 주교님] 마리아 공경의 신약성서적 근거 3 - 마르코 6,1~6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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