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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제 3장 辛亥(1791년)迫害 (원문 제1권 제 4장)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제 3장  辛亥(1791년)迫害 (원문 제1권 제 4장)


1. 윤지충(尹持忠) 바오로와 권상연(權尙然) 야고보의 순교


① 김범우(金範禹)토마스가 순교한 뒤 천주교의 적(敵)들의 아우성은 약간 가라앉았으나, 그들이 증오심(憎惡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천주교인들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늘 새로운 음모(陰謀)를 꾸미고 있었으며, 그들의 계략(計略)을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오직 그것을 더 무서운 것이 되게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특히 두 사람이 福音에 악착스럽게 적대(敵對)하는 태도(態度)를 보였으니, 그들은 홍락안(洪樂安)과 이기경(李基慶)이었다.


  홍락안(洪樂安)은 1787년과 1788년에 천주교인들을 공격하는 맹렬한 편지들을 발표하였고, 박해령(迫害令)을 얻어내기 위하여 王에게 탄원서(歎願書)를 냈다. 이기경(李基慶)은 이승훈(李承薰)(베드로)의 친구이며 同門으로서, 처음에는 신자들의 편을 들었으나 이내 물러났고, 1788년에는 洪樂安의 편에 가담하였다.


② 이 두 사람은 끊임없이 그들의 계획을 유리하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찾는데 전심하여, 천주교인들의 언행(言行)을 염탐(廉探)하면서, 그들에 대한 박해(迫害)를 일으키기 위한 좋은 기회(機會)만을 엿보고 있었다. 신해(辛亥)(1791)년에 윤지충(尹持忠)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이 천주교인이 喪禮的인 제사(祭祀)를 지내기를 거부하자, 드디어 기회(機會)가 왔다.


③ 윤지충(尹持忠)바오로는 해남(海南)섬 양반집안의 자손으로, 그의 조상들은 자주 벼슬에 올랐었고, 그 중 여럿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었다. 그의 아버지는 의학(醫學)공부에 성공하여, 전라도(全羅道) 진산군(珍山郡) 장구동이라는 동네에 자리를 잡았다. 윤지충(尹持忠)바오로는 그곳에서 1759년에 났다. 어려서부터 그의 총명(聰明)함과 단정한 품행(品行)은 단연 뛰어났었다. 그는 빨리 학문의 평판(評判)을 얻었는데, 1783년 그의 나이 25세 때에 과거(科擧)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자 그의 명성(名聲)은 더욱 커졌다.


④ 다음 해(1784년) 겨울동안에 서울에 올라가 金(範禹)토마스 집에서 천주교서적 두 권을 발견하고 그것을 가지고 가서 베꼈다. 3년쯤 뒤에 자기의 사촌 정약전(丁若銓)에게서 천주교의 전체에 대해서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결정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그 본분(本分)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⑤ 천주교인들의 박해(迫害)가 시작되었을 때, 그는 겁이 나서 자기 책의 일부를 불살랐으나, 그래도 비밀히 본분(本分)을 지키는 것은 계속하였다. 그가 교우들과 드러나게 많은 접촉을 했다든가, 미신자(未信者)의 교화(敎化)에 힘썼다든가 한 일은 발견할 수 없다. 죽은 부모(父母)를 위한 제사(祭祀)와 다른 미신(未信)을 금한 북경(北京) 주교(主敎)의 답변편지로 인한 배교(背敎)와 이탈(離脫)의 소용돌이도 그의 용기(勇氣)를 흔들지는 못하였다. 그는 즉시 복종(服從)하여, 나라의 풍속을 따라 자기 집안에 모셔두었던 신주(神主)를 불살랐다. 이러는 중에 辛亥(1791)년 여름에 그의 어머니 권(權)씨가 세상을 떠났고, 윤지충(尹持忠)바오로는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祭祀)를 지내지 않았다.


⑥ 주위의 온갖 비난(非難)과 협박(脅迫)이 쏟아졌으나, 尹(持忠)바오로의 용감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고 결국엔 사회에서 매장(埋葬)을 당하게 되었다. 결국 이 소식은 홍락안(洪樂安)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는 즉시 전권(全權)을 쥐고 있던 정승 채제공(蔡濟恭)에게 청원서를 내어 尹(持忠)바오로를 사형(死刑)시키라고 청구하였다. 동시에 그는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편지를 보내어 가택 수색을 하고, 죄인을 체포하라고 재촉하였다. 정승은 정승대로 전라도 감사에게 이와 비슷한 명령을 내렸다.


진산군수가 尹持忠바오로와  그의 조카 권상연(權尙然)야고보를 체포하기 위하여 윤지충의 집으로 갔을 때, 한 사람은 광주(廣州)로 또 한 사람은 한산(韓山)으로 갔었으므로, 군수는 尹持忠의 삼촌을 볼모로 잡아가두었다


⑦ 권상연(權尙然)야고보는 원래는 경상도(慶尙道) 안동(安東)이 고향이지만, 얼마 전부터 공주(公州) 고을에 와서 사는 집안의 자손이었다. 그 집안은 대대로 높은 양반은 아니었으나, 그 일가 중에는 유명한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권상연(權尙然)은 문학(文學)과 윤리(倫理)를 공부하다가 자기 사촌인 尹持忠바오로에게서 천주교를 배웠다. 그는 이내 敎에 들어왔고 충실히 실천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尹(持忠)바오로의 어머니인 고모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자기 사촌의 용감(勇敢)한 행동을 보았고, 權(尙然)야고보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제사도 올리지 않았다. 그는 尹(持忠)바오로와 함께, 친척과 친구들로부터 비난(非難)과 욕설을 참아 받았고, 尹(持忠)바오로와 함께 불행(不幸)에 휩쓸렸다. 아니, 오히려 그의 행복(幸福)을 나누어 가졌다.


⑧ 그들에게 체포령이 내려졌다는 것과, 尹(持忠)바오로의 삼촌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은 신사원(申史源) 군수(郡守)에게 자수하기 위하여 함께 떠나 밤낮으로 길을 가서, 辛亥(1791)년 10월 26일 저녁에 진산(珍山) 관아(官衙)에 도착하였다.


⑨ 신문(訊問)은 곧 시작되었고, 그 신문내용(訊問內容)은 尹(持忠)바오로 자신이 한문(漢文)으로 기록한 글로써, 나중에 조선말로 번역한 것이다. 필자는 그 문서를 전부 여기에 게재(揭載)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에게 보존(保存)되어 내려오는 그런 종류의 글로는 최초(最初)의 것이며, 또 그것이 다른 어떠한 설명(說明) 보다도, 조상숭배(祖上崇拜)에 대한 조선민족(朝鮮民族)의 사상(思想)과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그 무서운 편견(偏見)을 더 잘 이해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제 3장 辛亥(1791년)迫害 (원문 제1권 제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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