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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尹(持忠)바오로가 기록한 글》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尹(持忠)바오로가 기록한 글》


① 나는 10월 26일(1971년) 저녁때쯤 진산관아(珍山官衙)에 도착하여 곧 저녁을 먹은 후, 郡守 앞에 압령(押領)되었다. 군수는 외쳤다.

“너는 그게 무슨 꼴이냐? 어쩌다 그 꼴이 되었느냐?”

“무슨 말씀을 물으시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하고 나는 대답하였다.


“네게 대해서 아주 중대한 소문이 돌고 있는데, 그것이 근거 있는 말이냐? 네가 이단(異端)에 빠졌다는 것이 사실이냐?”

“저는 결코 이단(異端)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天主를 믿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 그것이 이단(異端)이 아니란 말이냐?”

“아닙니다. 그것은 바른 길입니다.”

“그렇다면, 복희(伏羲) 때로부터 송조(宋朝)의 성현(聖賢)들에 이르기까지 실천한 것이 모두 거짓이란 말이냐?”


“우리 교회는 여러 가지 계명(誡命) 중에 다른 사람을 판단(判斷)하고 단죄(斷罪)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저는 누구를 비판(批判)하거나 비교(比較)할생각은 없고, 다만 천주교를 신봉(信奉)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너는 조상들에게 제사(祭祀) 올리기를 거절하는데, 사랑에는 짐승도 제 어미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하지 않느냐? 또 어떤 새들도 제사지낼 줄을 알거든(※예기(禮記)에 나오는 말), 더구나 사람이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 孔子의 글에서 이런 대목을 읽지 않았느냐?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모든 규칙을 따라서 그들을 섬기고, 그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모든 규칙을 따라 장례(葬禮)지내드리고, 끝으로 규정된 예식(禮式)을 따라 제사(祭祀)를 올리는 사람만이 자기가 효성(孝誠)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이 천주교의 책에는 씌어있지 않습니다.”하고 나는 대답하였다.


② 그랬더니 郡守는 孔子의 경서(經書) 중 다른 대목을 인용하면서 행실(行實)을 고치라고 내게 간절히 권고(勸告)하며 한 숨을 쉬며 말하였다.


“참 아깝구나. 네 집안의 명성(名聲)은 많은 세대를 내려오며, 너에게 이르기까지 줄곧 높아왔는데, 그것이 이제 완전히 무너졌구나. 너 자신도 재주가 많은학자의 명성을 가졌는데, 네 정신이 미숙(未熟)하고 경솔(輕率)하여 네 조상(祖上)들의 공경(恭敬)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구나. 네가 그렇게 하는 줄을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내가 즉시 가서 권고하고 네 눈을 뜨게 하여, 이런 극단에 이르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이다. 과거에 성현(聖賢)들도 불도(佛道)와 노자(老子)의 도에 오랜 동안 헤매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으면, 너는 아직도 그분들의 영광스러운 자취를 따라 걸을수가 있을 것이다.”


“제가 아직 마음을 바꿀 수가 있다면 애초부터 그렇게 할 것이지,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너를 더 나은 생각으로 끌어오기 위하여 아무것도 해 볼 것이 남지 않았구나. 나로서는 네 운명을 결정하기도 싫고 너를 자세히 신문하기도 싫다. 네가 감영에 가서 네 소행에 대하여 보고해야 할 것이다. 네가 부모에게서 받은 그 몸을 너는 어리석게도 형벌과 죽음을 당하게 하려느냐? 뿐만 아니라 너로 인하여  네 삼촌이 늘그막에 옥에 갇혔으니, 그것이 효도의 본분을 다 하는 것이냐?”


“형벌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덕을 닦는 것이 효도의 본분을 어기는 것입니까? 제 삼촌이 옥에 갇히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저는 밤에도 쉬지 않고 달려와 사또에게 자수하였습니다. 이것이 효도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랬더니 郡守는 나를 법대로 다루라고 명령하여, 나는 이내 무거운 칼이 씌워졌다. 그런 후에 그는 탄식하며 내게 말하였다.


 “그게 무슨 꼴이냐? 칼을 쓰고 쇠사슬에 묶여 죽는 것은 죄인으로 죽는 것이다.“

그리고는 나를 옥으로 데려가게 하였다. 그러나 나를 가두기로 되었던 방이 무너진 채로 아직 고치지 못하였으므로, 나는 다른 감방(監房)에 갇히게 되었다. 그날은 그렇게 끝났다.


③ 27일은 별다른 사건이 없이 지나갔다. 28일 조반 때 내 사촌 권상연(權尙然)야 고보가 옥에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도 신문(訊問)을 당하였는데, 그도 같은 질문(質問)을 받았고, 나와 똑같이 대답하였다. 정오에 郡守가 내 삼촌을 불러다가 길게 조위(弔慰)의 말을 한 뒤에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아는 아무개 아무개처럼 해서 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막을 수가 없었단 말이요?”

삼촌은 한마디 대답도 하지 않고 관아(官牙)에서 나갔다. 삼촌은 즉시 석방된 것으로 생각한다.


④ 해가 질 때쯤 나와 내 사촌은 다시 불려갔다. 큰 칼이 벗겨지고 작은 칼이 씌워졌다. 군수는 우리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全羅道 감사(監司) 정민시(鄭民始)가 있는 전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할 작정이냐? 선비들의 도를 따라 즐거운 길을 가지 않고, 스스로 불행을 불러들이다니 이게 무슨 짓들이냐?“ 그런 다음 내 사촌 권상연(權尙然) 야고보를 내려다보며 말하였다.

“너는 네 모든 친척들 가운데서 살면서 그들에게 그 미신을 퍼트렸느냐?”


우리는 둘 다 침묵을 지키고 있었더니, 郡守는 대답을 듣지 못하자 우리들을 내보냈다. 우리는 형사문제(刑事問題)를 담당하는 사령(使令)과 포졸(捕卒) 한 명과 옥리(獄吏) 한 명에게 동반되었다.  그들은 우리를 곧 떠나보내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우리가 관아에서 나왔을 때는 벌써 밤이 되었으므로 길을 떠날 수가 없어, 면임(面任 ; 營邸吏)집에서 잤다.


  29일 첫 닭이 울 때 우리는 길을 떠났다. 신거런※1) 주막에서 처음으로 쉬며 조반(朝飯)을 먹었다. 그 다음은 개바우※2) 에서 쉬며 말을 먹였다. 해가 질 무렵에 안덕※3) 에 있는 고간들의 여인숙 근처를 지나서 조그만 산등성이를 넘자, 우리를 데리러 오는 감영 나졸들을 만났다. 수많은 포졸들이 큰 고함을 지르면서 전진하여 오는데, 어찌나 소란을 피우든지, 우리를 잡는 것이 마치 큰 도둑이나 잡는 것 같아 보였다.


⑤ 우리는 남문 밖에 있는 감영(監營)으로 끌려갔는데, 아주 캄캄하고 밤이 이슥하였으므로 우리 좌우에 횃불을 켜놓고, 우리를 중군아문(中軍衙門)으로 끌고 갔다. 중군(中軍)이 우리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성명이 무엇이냐?”

우리는 성명을 댔다. “너희가 고발된 죄목을 아느냐?”

“저희는 무슨 영문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우리 군수기 우리를 감영으로 보냈으므로 그의 명령을 따라 온 것인데, 천만 뜻밖에도 도중에 도둑놈들처럼 붙잡혔습니다.“

“너희들이 늘 하는 일이 무엇이냐?”

“공부를 합니다.”

“무슨 공부냐?”

“천주교를 공부합니다.”

“너희들은 각각 어디로 따로 따로 피해갔었느냐?” “저는 광주에 가 있었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하였고, “저는 한수에 가 있었습니다.”하고 내 사촌 權尙然(야고보)가 대답하였다. “군수의 명령을 알고서 우리는 각각 즉시 길을 떠나 밤에도 쉬지 않고 돌아와서 그에게 자수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솔직히 대답하였다. 우리들 목에 18근 짜리 큰 칼을 씌우고, 그리고도 목을 쇠사슬로 얽고, 나무갈고리로 오른손을 칼 가장자리에 잡아매었다


⑥ 30일 새벽녘에 우리는 방을 또 옮겨야 했다. 그리고 날이 완전히 밝자 우리는 감영(監營) 감옥(監獄)으로 압송(押送)되었고, 오후에 감영에 불려나가 아래와 같은 신문(訊問)을 당하였다.


“너희 둘 중에 尹이라는 자가 누구며 權이라는 자는 누구냐?” 우리는 각기 이름을 댔다.

“너희가 늘 하는 일이 무엇이냐?”

“소년시절에는 과거를 보기 위하여 글을 공부하였고, 얼마 전부터는 사람의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하여주는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하였다.

“경서(經書)를 배웠느냐?”

“배웠습니다.”


“네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 경서(經書)가 부족하단 말이냐?  어찌하여 미신(迷信)에 빠진 것이냐?”

“저는 결코 미신(迷信)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래 천주교라는 종교가 미신이 아니란 말이냐?”


“천주는 가장 높으신 아버지시오, 하늘과 땅과 천신(天神)과 사람과 만물(萬物)의 창조주(創造主)이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미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그 도(道)를 간단하게 추려서 말해보라!”

“우리가 있는 곳은 범죄사실을 심의하는데 적당한 자리이지 교리를 설명하는데 적당한 자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것은 십계(十誡)와 칠극(七克)으로 요약됩니다.“

“네 책을 누구에게서 받았느냐?”


 “그 사람을 댈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 사람이 제게 책을 빌려 주었을 때는 임금님의 금령(禁令)이 없었고, 따라서 그것을 빌려준 사람은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엄중(嚴重)한 금령(禁令)이 있으니, 만일 제가 그 사람의 이름을 대면 그는 자기로서는 아무 죄도 없으면서 혹독한 형벌(刑罰)을 당하게 될 것이니, 어떻게 제가 그런 결심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금하는 계명(誡命)을 어기는 것이니, 저는 그를 밀고(密告)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 네가 그의 이름을 대더라도 금령 전에 네게 책을 빌려준 그 사람은 결코 그것으로 인해서 죄가 있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임금님께서는 정확한 보고를 올리라고 명령하셨는데, 네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보고를 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왕명(王命)을 어기는 것이 될 것이니, 두말 할 것 없이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니 실토를 하라! 고문(拷問)하는  것을 기다리지 말고 어서 그 사람의 이름을 대라!“


⑦ 나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 사촌 權야고보가 대답을 하라고 재촉하므로 나는 우선 이렇게 말하였다.

“그것은 오래된 일이어서 잘 기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나서 덧붙였다.


“1784년 겨울에 우연히 중인 계급에 속하는 김범우(金範禹)의 집에 갔다가 그 책들을 보고 빌어다가 베끼고는 책들은 이미 주인에게 돌려보냈습니다. 그 후 國王의 금령(禁令)을 알고는 중국종이에 쓴 것은 불사르고, 조선종이에 쓴 것은 물로 지웠습니다. 십계(十誡)와 칠극(七極)에 대한 책이 제 집에서 없어진지는 벌써 여러 해가 됩니다.“


“임금님의 명령은 책이 있으면 불살라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 네게 다른 책이 있으면 즉시 갖다 바치는 것이 옳다.“

“제 고을 郡守가 제 집을 샅샅이 뒤졌지만, 한 장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너희는 하늘과 땅이 용납될 수 없는 죄를 지었고, 왕명은 사실을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되어 있으니, 이제 질문을 할 터이니 조목조목 솔직하게 대답해라.“ 그리고 나서 감사(監司)는 우리 앞에 문목일람표(問目一覽表)를 내 놓았는데,그 내용(內容)은 대강 이러하였다.


「참된 길을 다르지 않고 허황된 말을 어리석게 믿는 너희들은 세상을 미혹(迷惑)하게하고, 백성을 타락하게 하며, 오륜(五倫)을 파괴(破壞)하고 왜곡(歪曲)한다. 그런즉 너희들이 어떤 책을 배우며 누구와 함께 배우는지를 말하라. 엄한 금령(禁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감히 크게 방종(放縱)한 사상(思想)을따르며, 더욱더 어리석은 것은 이론(理論)에 실천(實踐)을 더하는 일이니, 그것은 큰 불충(不忠)이다. 그러나 그 죄(罪)는 비교적 가벼운 것이리라. 임금님의 전교(傳敎)에는 너희들이 이제는 제사(祭祀)를 올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뿐이 아니다. 너희들은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죽은 이들에게 그들의 의무(義務)를 다하러 온 손님들을 너희 집에 들이지도 않았다. 끝으로 너희들은 부모(父母)에게 장례(葬禮)도 지내드리지 않고, 그러면서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며, 좋은 마음씨를 도로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런 행동은 짐승이나 할 짓이다. 너희 책들을 곧 바치고, 너희 모든 동교인(同敎人)을 대라. 그뿐 아니라 너희들 가운데는 비밀히 너희를 지도(指導)하며, 그 종교를 전파하는 주교(主敎)들이 있는데, 너희가 그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러니 아무 것도 숨기지 말고 모든 것을 말하라.」


⑧ 나는 이 논고(論告)를 끝까지 읽고나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가 제사(祭祀)를 지내지 않은 것은 사실이고 신주(神主)도 부쉈습니다. 그러나 조상(弔喪)을 하러 오는 손님들은 받아들였고, 그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또 부모에게 대한 장례의식(葬禮儀式)은 다 지켰습니다. 책에 대하여는 방금 어떻다는 것을  말씀드린 것과 같이, 갖다 바칠 것이 도무지 없습니다. 저는 또 일러바쳐야 할 동료도 없습니다. 주교(主敎)로 말하면, 여기서는 그 이름조차도 없습니다. 서양(西洋)에는 이 품계(품階) 가 있고, 그들이 종교의 사무(事務)를 처리(處理)한다고 합니다. 거기에 대하여 물어보고자 하시면, 서양에 물어보셔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 종교에는 여기 사람들이 뜻하는 것과 같은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감사(監司)는 권 야고보 쪽으로 몸을 돌리고 말하였다.

“너는 또 어떤 책을 배웠느냐?”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을 다룬 책을 배웠습니다.’

“그 책은 어디서 났느냐?”

“그것을 빌려온 제 사촌 尹持忠과 같이 읽었습니다.”


‘너도 그 책을 베꼈느냐?’

“베끼지 않았습니다.”

“너도 제사(祭祀)를 안 올렸느냐?‘

‘안 지냈습니다.’

“신주(神主)도 불살랐느냐?”

“郡守가 제 집을 수색하였을 때에 문서에 기록한 주독(主櫝)이 아직 집에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감사는 그에게 여러 인물들과의 친척관계를 물어 본 다음 이렇게 계속하였다.

“서울에 있는 네 친척 중의 한 사람이, 네가 신주(神主)를 불살랐다는 소문을 퍼뜨렸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


“제가 제사(祭祀)를 지내지 않게 된 후로 친척들은 저를 원수처럼 여기고 저 놈은 틀림없이 신주(神主)를 불사르게 될 거야“하고 말하며 저를 나무랐습니다. 이 비난(非難)하는 말이 퍼지면서 풍문(風聞)이 되었고, 이렇게 해 필경 제가 신주(神主)를 불살랐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모양입니다.” 감사(監司)는 다시 나를 향하여 말하였다.

“홍락안(洪樂安)을 아느냐?”

“이름은 들었습니다만, 본 적은 없습니다.”


“홍락안(洪樂安)과 그 친구들이 너에 대한 보고를 정승에게 올려 이 분이 나에게 명령을 내리셨다. 이 사건의 원인(原因)은 이런 것이다. 그러나 네가 부모의 장사(葬祀)를 지내지 않았다고 떠돌아다니는 풍문(風聞)은 어떤 근거(根據)가 있을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있겠느냐?”


“참말이지 저는 그 풍문(風聞)의 원인을 모르겠습니다. 장례(葬禮)를 지낼 때에는 제 집에 전염병(傳染病)이 있어서 친척과 친구들이 오지 않았고, 또  타 지방 사람과 연락을 할 수가 없어서 모든 장례식절차(葬禮式節次)를 동네 사람들하고만 지켰습니다. 그 때문에 그 소문이 퍼졌을까요? 참말이지 그 원인(原因)을 모르겠습니다.“

“너희 중에는 의논을 하고 문의를 하는 선생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게 누구냐?”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주교회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습니다. 하물며 책 몇 권 읽는 일 밖에는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이 나라에서, 교리를 가장 깊이 연구했다고 자랑하고 선생(先生)으 자처(自處)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배우지도 않고 안다니, 도대체 너는 얼마나 놀라운 인물이냐?”

“제가 글자를 좀 알므로 책을 펴서 읽기만 하면 됩니다.”

“네가 진사(進士)를 하였느냐?”

“했습니다.” 

“어느 해에 하였느냐?”

“1783년 봄에 했습니다.”

그런 다음 여러 사람들과의 내 친척관계를 묻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교(敎)에서는 고통(苦痛)과 형벌(刑罰)을 좋아하고 칼 아래 죽기를 좋아한다니, 그것을 믿을 수가 있단 말이냐?“


“살기를 원하고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은 모드 이의 공통된 심정입니다. 어떻게 순사또의 말씀과 같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를 내보내서 감옥(監獄에 왔을 때는 벌써 밤이 되었었다


⑨ 11월 1일 새벽에, 우리 고을 郡守가 우리를 불러 문간 같은 곳에 앉히고, 한 아전(衙前)을 시켜 우리에게 ꡐ십계(十誡)와 칠극(七克)을 외우라ꡑ고 하기에 그것을 외웠더니, 우리에게 관한 말을 써서 감사(監司)에게 보냈다. 조금 후에 그 郡守가 우리를 다시 불러 몇 마디 권고를 하고나서 말하였다.


 “어제 너희들이 말한 것은 진실이 아니고 또한 판결을 내리기에 충분치 않다. 그리고 도 이교(敎)에는 십계(十誡)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王과 臣民의 관계는 들어 있지 않다. 이것이 임금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임금을 업신여기는 도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는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임금님은 온 나라의 어버이시고, 관장은 그 고을의 어버이입니다. 그러므로 그분들에게는 충성의 본분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제 4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 4계에 그런 뜻의 주(註)를 달아서 내놓아야 할 것이다. 서양 사람들의 교(敎)는 우리 눈으로 볼 때에는 미신(迷信)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들이 그 敎가 옳다고 믿기 때문에 그것을 따르고, 또 그 敎가 부모와 임금을 무시하는 불도와 같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따른다면, 어찌하여 신주(神主)를 모시지 않고 부모에게 제사(祭祀)도 올리지 않는 것이냐?  음식(飮食)은 바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희 효성(孝誠)을 드러내는 다른 방법 있지 않겠느냐? 이 모든 것이 너희들에게 있다면 그것을 자세히 지적해 야 한다. 뿐만 아니라 너는 어제, 살기를 원하고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共通)된 심정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깊이 생각하고 또 네가 진술을 할 때에, 임금께 대한 충성(忠誠)과 효성(孝誠)의 원칙을 내세움으로써, 목숨을 보존(保存)할 방도를 찾는 것이 옳겠다.”


⑩ 사건의 심리를 맡은 임피(臨陂) 현령(縣令)도 내게 외서 조용한 말투로 충고하는 식으로 말하였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또께서 제게 말씀하신 것은 모두 하고 싶습니다. 다만 말로는 모든 것을 명백하게 설명할 수가 없으니, 제게 아전 한 사람과 붓을 주시면 모든 것을 자세 히 쓰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나를 다른 방으로 들여보내며, 공술을 써서 바치라고 명령하 였다. 나는 앉아서 아래와 같이 불러주었다. (이렇게 하여 작성된 供述書는 지금까지의 문초(問招)와 거의 같은 내용이다.  그리고 이 供述의 내용은 전라도(全羅道) 관찰사(觀察使) 정민시의 장계(狀啓)에 요약되어 있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尹(持忠)바오로가 기록한 글》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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