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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 尹(持忠)바오로와 權(尙然)야고보 공술서(供述書)의 내용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 尹(持忠)바오로와 權(尙然)야고보 공술서(供述書)의 내용


「罪人 尹持忠 供. 저는 어려서부터 공직(公職)에 나아갈 생각으로 과거(科擧) 준비를 위하여 공부를 하였습니다. 제 오죽잖은 소망(所望)은 다만 임금님께 대한 충성(忠誠)의 의무와 부모님께 대한 효도(孝道)와 형제들에게 대한 우애(友愛)의 의무를 다하기에 힘쓰는 데 있었습니다.


癸卯(1783)년 봄에 저는 진사(進士)가 되었습니다. 이듬해 겨울 서울에 가서 명례방(明禮榜)골에 사는 중인 金範禹의 집에 우연히 들렀더니, 그 집에는 천주실의(天主實義)라는 책과 칠극(七克)이라는 책, 이렇게 두 권이 있었습니다. 그 책을 대충 읽으니, 천주(天主)는 우리 공동의 아버지시오, 하늘과 땅과 천신(天神)과 사람과 만물을 창조(創造)하신 분임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중국 책에서 상제(上帝)라고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람이 태어났는데, 비록 살과 피는 부모에게서 받으나, 사실인즉 天主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한 영혼(靈魂)이 육신(肉身)과 결합(結合)하는데, 그것을 결합시키는 것도 천주이십니다. 임금께 대한 충성(忠誠)의 근본(根本)도 천주의 명령(命令)이요, 부모께 대한 효도(孝道)의 근본도 역시 천주의 명령입니다. 이 모든 것을 중국의 경서(經書)에 실린 상제(上帝)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섬기라는 계율(戒律)과 비교해본 결과 거기에는 같은 점이 많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실행할 것은 십계(十誡)와 칠극(칠극)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십계는 이러합니다.

① 하나이신 천주를 만유위에 공경하여 높여라.

② 천주의 이름을 불러 헛맹세를 하지 말라.

③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④ 부모를 효도하여 공경하라(이 계명의 해석에는 임금은 온 나라의 아버지요, 관   장은 그 고을 백성의 아버지이니, 그들도 역시 공경하여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⑤ 사람을 죽이지 말라.

⑥ 사음을 행하지 말라.

⑦ 도둑질을 하지 말라.

⑧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⑨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⑩ 남의 재물을 부당하게 탐내지 말라.

이 십계는 요컨대 두 가지로 요약되니, 천주(天主)를 만유(萬有)위에 사랑하라는 것과, 모든 사람을 자기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칠극(七克)은 이러합니다.

① 교만을 이기기 위한 겸손(謙遜).

② 질투를 이기기 위한 애덕(愛德).

③ 분노를 이기기 위한 인내(忍耐).

④ 인색을 이기기 위한 희사(喜捨)에 너그러움.

⑤ 탐식을 이기기 위한 절식(節食).

⑥ 음란을 이기기 위한 금욕(禁慾).

⑦ 해태를 이기기 위한 근면(勤勉).


이 모든 것이 덕(德)을 닦는 것을 돕는 데에는 명백(明白)하고 정확(正確)하고 용이(容易)하므로, 저는 그 두 책을 빌어서 소매에 넣고 시골집에 돌아와 베꼈습니다.


乙巳(1785)년 봄에 저는 그 책들을 주인에게 돌려보냈습니다. 3년 후부터 그 책들을 연구(硏究)하고 묵상(黙想)하고 나서야, 비로소 저는 그것들을 진지하게 실천(實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년 후에 이 교리(敎理)가 엄금(嚴禁)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 책들을 불사르든가 아니면 물로 지우든가 하여 집에 보존(保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천주교교리를 아무에게서도 배우지 않았고, 누구에게 전해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천주(天主)를 일단 내 아버지로 알아본 뒤에는, 그분의 명령(命令)을 따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양반집에서 관례(慣例)로 되어있는 신주(神主)는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이므로, 제가 그 종교를 따르는 이상 거기서 명하는 것에 복종(服從)하지 않고, 달리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 4계(四誡)가ꡐ우리 부모를 공경하라ꡑ고 명하므로, 만일 사실로 우리 부모들이 그 신주(神主) 안에 계신다면, 천주교를 믿는 사람도 누구나 신주를 공경(恭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주(神主)들은 나무로 만든 것이고, 그것들은 저와는 살이나 피나 목숨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저를 낳고 기르는 수고에 아무런 몫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영혼(靈魂)이 일단 이 세상에서 나가면, 그런 물질적(物質的)인 물건(物件)에 붙어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부모의 명칭은 아주 위대하고, 매우 존경할만한 그 무엇인 만큼, 어떤 일꾼이 만들고 꾸민 물건을 감히 가져다가 제 부모(父母)로 삼고, 또 실제로 그렇게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바른 이치(理致)에 근거(根據)를 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 양심(良心)은 그것을 승복(承服)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로 인하여 말씀하시는 것처럼, 양반칭호(兩班稱號)를 박탈(剝奪)당한다 해도 천주(天主)께 대하여 죄인(罪人)이 되기는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신주(神主)들을 저희 집 땅 속에 묻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불살랐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만, 우리 敎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뚜렷한 명령(命令)을 내리는 것이 없으므로, 누가 그런 비난(非難)을 하였고 누가 그것들을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은 이들이나  그 위패(位牌)에 술과 음식을 드리는 것으로 말하면, 그것도 천주교(天主敎)에서는 금하는 것이니, 이 敎를 따르는 자들은 그 法을 지켜야 합니다. 과연, 조물주(造物主)께서 여러 가지 종류의 피조물(被造物)을 마련하실 때에 물질적(物質的) 피조물은 물질적인 것을 쓰고, 비물질적(非物質的)인 것은 비물질적인 것을 쓰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적(物質的) 양식(糧食)이 육신(肉身)의 음식인 것처럼, 덕행(德行)은 영혼(靈魂)의 음식입니다. 훌륭한 술과 맛있는 음식이 있다 하더라도 비물질적 존재(非物質的 存在)가 물질적(物質的)인 것으로 양육(養育)될 수 없다는 이치로, 영혼(靈魂)을 기를 수는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이ꡐ죽은 이들을 그들이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섬겨야한다ꡑ고 말하였고, 이것이 우리나라 경서(經書)의 근본원칙(根本原則)이라는 것을 인정하십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동안에 그들의 영혼(靈魂)이 술과 다른 양식으로 결코 양육(養育)되지 않았던 만큼, 더구나 죽은 후에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부모에게 대하여 아무리 효성(孝誠)이 지극하다 하여도 주무시는 동안에는 음식(飮食)을 드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잠자는 동안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더구나 그분들이 죽음이라는 긴 잠이 드셨을 때, 그분들에게 음식을 드리는 것은 헛된 일이요 거짓 행동(行動)일 것입니다. 그러니 자식이 돌아가신 부모를 헛되고 거짓된 행동으로 공경(恭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모에게는 참다운 향기(香氣)도 없는 음식을 쓰는 것을 그만두고,  온 힘을 기울여 덕행(德行)을 닦는 데 전심하여 그 결과(結果)를 그분들에게까지 미치게 하고, 동시에 우리 영혼(靈魂)도 기르는 것이 참된 길이요 바른 도리(道理)입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천주교를 신봉(信奉)함으로써 제 양반칭호(兩班稱號)를 박탈(剝奪)당해야 한다 해도, 저는 천주께 죄(罪)를 짓기는 원치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주(神主)를 모시지 않는 서민(庶民)들이 그렇다고 하여 정부(政府)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또 가난하기 때문에 모든 제사(祭祀)를 규정대로 지내지 못하는 양반(兩班)들도 엄한 책망(責望)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여 주십시오. 그러므로 제 낮은 생각으로는 신주(神主)를 모시지 않고 죽은 이들에게 제사(祭祀)를 드리지 않으면서도, 제집에서 천주교를 충실히 신봉(信奉)하는 것은 결코 국법(國法)을 어기는 것이 아닌 듯 합니다.


사람들은 또 제가 부모의 상을 당한 뒤에 문상(問喪)을 금하였다고 고발하였는데, 그런 경우에 문상을 하고 받음은 인간의 본분(本分)입니다. 좋은 집안에 태어난 자식이 어떻게 그것을 반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 말을 못 믿으시겠으면 문상(問喪)하러 온 사람들이 있으니, 조사(調査)를 명령하시기만 하면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진실(眞實)임을 아실 것입니다.


제가 父母를 장사지내지 않았다는 말들도 합니다. 제 어머니는 금년 5월에 돌아가셨는데, 저는 8월 그믐날에 장례를 지냈습니다. 장례(葬禮)와 관(棺)과 곡(哭)과 상복(喪服) 등에 관하여는, 천주교에서 이 모든 것을 갖은 정성(精誠)을 들여 하라고 권고합니다. 저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그렇게 그 예식(禮式)을 하고 적당한 처소(處所)를 택하였습니다. 그때 제집에는 전염병(傳染病)이 들었으므로 타지방 (他地方)사람들에게 연락할 수가 없어서,  친척들과 친구들이 전부 장례행렬(葬禮行列)에 참가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동네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와서 참여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조사해보시면, 퍼져나간 풍문(風聞)이 거짓이고 모함임을 아실 것입니다. 天主敎라는 이 말은 모든 비난(非難)을 제기(提起)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道具)입니다. 이 사람이 저 사람에게 말하고, 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말하여, 한 가지 거짓말이 또 한 가지 거짓말을 퍼뜨리게 하며,  이렇게 해서 차차 제가 관례적(慣例的)인 문상(問喪)을 받기도 거절하고, 제 부모의 장례(葬禮)도 지내지 않는다고 말하기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제가 신주(神主)를 태웠다는 고발(告發)도 함부로 증거(證據)도 없이 한 것이며, 제게 죄를 덮어씌우고, 또 덮어씌우기 위하여 그것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제가 천주교인들의 주교(主敎)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서양나라에는 어디나 주교(主敎)의 품계(品階)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을 아이나 초심자(初心者)에게 주지는 않으며, 더구나 시골구석 궁벽한 곳에서 살아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고, 혼자서 책 두 세권을 읽음으로써 제 개인적인 성화(聖化)에 힘썼으며, 아무에게서도 교수(敎授)를 받지 않고 또 어디서도 이 교리(敎理)를 전파(傳播)한 일이 없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주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주교(主敎)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것이어서, 저는 대답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양반 부모에게서 태어나 마침내 하늘과 사람의 기원(起源)과 임금께 대한 충성(忠誠)과 효성(孝誠)의 계명(誡命)을 대강 알아내게 되었으므로, 제 약한 소망(所望)은 덕(德)을 닦고 천주(天主)를 제대로 섬기기를 힘쓰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 밖에는 더 아뢸 말씀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⑪ 나는 아전(衙前)을 통하여 이 두 공술서(供述書)를 임피(臨陂) 현령에게 제출하였다. 현령(懸令)은 그것을 주의 깊게 읽은 후 소매 속에 넣고, 우리더러 문에서 기다리라는 명령을 하면서 감영(監營)으로 갔다. 대는 오정쯤이었는데 우리는 앉아서 기다렸다. 오래 뒤에 우리를 불러들여 감사는 우선 權(尙然)야고보에게 말하였다.

“네가 참말 위패를 보존하였느냐? 너는 방금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으나,  진산 군수의 보고에 의하면 빈 주독 네 개만을 보았고 신주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이냐?”


 權(尙然)야고보는 대답하였다.

“제가 진산에서 감영으로 올 때에 군수의 보고에 적힌 대로‘모든 것을 고백해야 된다’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제가 너무 많은 말을 하면 이 기회에 군수에게 해가 미칠까 염려하여 순사또에게 주독이 제집에 있다고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사식 신주는 거기에 없습니다. 땅에 파묻었으니까요.”


“어디에다 묻었느냐?” 하고 감사(監司)가 물었다. 權(尙煙)야고보는 장소를 가르쳐 주었으나, 그 뒤 산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에 그 자리를 아마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내 생각에는 그것을 혼자 파묻지는 않았을 것이고 따을 판 사람이 있었을 것이니, 그 사람이 증인으로 나서야 하겠다.”

“그 일을 하는 데에는 누구에게 들키는 것이 두려웠으므로 저는 아무도 오라고  하지 않고, 제 손으로 직접 파묻었습니다.” 감사(監司)는 나를 향하여 말하였다.


“그러면 너는 어떻게 하였느냐?”

“저는 제 공술서에 모든 것을 진술하였으니 그 이상은 묻지 말아주십시오”

“너는 신주(神主)를 그대로 묻었느냐? 혹은 불살라서 묻었느냐? 네가 그것을 불살랐던가 불사르지 않았던가에 따라서 네 죄(罪)가 중하거나 덜 중하거나 할 것이다. 어떻든 며칠간의 여유만 있으면 진상(眞相)은 알 수 있을 것이니, 거기서 네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불살라서 묻었습니다.”

“네가 그것을 부모처럼 공경(恭敬)하였다면, 땅에 묻는 것은 혹 괜찮다 치더라도 그것을 불사르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만약에 제가 그것을 부모(父母)처럼 공경(恭敬)하였다면 어떻게 그것을 불사를 마음을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신주(神主)는 제 부모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알기 때문에 불사른 것입니다. 하기는 그것을 땅에 묻던 불사르던, 먼지로 돌아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행위(行爲)  중의 하나를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⑫ 감사(監司)는 우리에게 형틀에 올라가 앉으라고 명령하고 나서, 우리의 결안(結案)에 서명(署名)하라고 시키고 내게 말하였다.

“너는 죽은 부모의 신주를 불사른 바로 그것 때문에 판결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 하느냐?”


“만일 제가 부모님이 거기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어떤 신주(神主)를 불살랐다면, 형벌(刑罰) 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거기에 부모(父母)의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서 그렇게 한 것이니, 무슨 죄를 범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에 네가 서양(西洋)에 있다면 네 말은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가 우리 나라 안에 있으니 법(法)대로 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5대가 지나면 양반(兩班)들까지도 모두 신주(神主)를 파묻는데,  그것으로 해서 그들을 엄벌(嚴罰)하십니까?”

“성현(聖賢)들의 결정에 따르면, 이 5대가 끝나는 때에 사람에게는 육신(肉身)의본분(本分)도 끝나는 것이다.” 이 말을 하고서 監司는 나를 치라고 명하였으므로 나는 10대를 맞았다. 그런 다음 監司가 말하였다.


“양반인 네가 이 형벌을 당하면서 괴롭지 않느냐?”

“저도 순사또와 같이 육체를 가졌는데 어찌 괴롭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후회(後悔)가 되지 않느냐?”

“천주교에서는 신주(神主)를 불사르라고 명백히 말하지 않으므로, 엄밀히 따지자면 경솔(輕率)하게 한 것을 후회(後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밖에는 후회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監司는 또 다른 형리(刑吏)에게 나를 치라고 명하였고, 나는 또 10대를 맞았다. 그런 다음  監司는 나에게 말하였다. “네가 매를 맞아 죽게 되어도 그 교를 버리지 못하겠느냐?”

“만약에 제가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背反)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갈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네 부모나 임금님이 너를 재촉한다면 그 말씀을 따르겠느냐?” 나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너는 부모도 모르고 임금도 모르는 놈이다.”

“저는 부모님도 임금님도 잘 알고 있습니다.”


⑬ 여기서 尹(持忠)바오로의 수기(手記)는 끝난다. 그가 끝에서 두 번째 질문(質問)에는 대답하지 않은 것을 지적할 수 있는데, 그것은 결코 망설여서 그런 것이 아니고, 국왕(國王)이 화제(話題)에 올랐을 때에는 부정적(否定的)인 대답을 용납(容納)치 않는 이 나라의 관습(慣習)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침묵(沈黙)은 관장(官長)들에 의해 아주 잘 이해(理解)되었다. 그래서 監司는 그에게 또 10대를 때리게 하였으니, 법(法)으로 정하여진 30대가 되는 셈이다.


그런 다음  尹(持忠)바오로와 權(尙然)야고보는 다시 끌려가 옥(獄)에 갇혔다. 벌써 밤이 되었었다. 이 신문(訊問)이 끝난 다음 監司는 왕에게 보고(報告)를 올렸다.


⑭ 조선의 그때 왕은 정조(正祖)였는데, 王은 40세였고, 나라를 다스린 지가 벌써 15년이나 되었었다. 역사(歷史)는 그를 지혜롭고 어질고 슬기롭고, 학문을 사랑하며, 신하들의 공(功)을 옳게 알아주는 임금으로 소개한다. 王은 監司의 보고를 받았으나, 일을 극단(極端)으로 몰고 갈 마음이 조금도 없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천주교의 적(敵)들은 점점 더 위협적(威脅的)인 태도로 나왔다. 사방에서 國王에게 상소(上疏)가 올라오고, 대신(大臣)들에게 청원(請願)이 올라와, 죄인(罪人)들의 처벌과 사회의 모든 기초(基礎)를 무너뜨리는 이 새로운 도리(道理)를 뿌리뽑아주기를 청하였다. 이런 종류의 상소(上疏) 30건 이상이 그해 9월에서부터 12월까지 들어왔다.


⑮ 그런 시위(示威)에 놀란 채제공(蔡濟恭) 정승은, 비록 개인적으로 천주교인들을 적대시(敵對視)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맹렬한 고발자(告發者)들의 견해를 받아들여 尹(持忠)바오로와 權(尙然)야고보를 사형(死刑)에 처하라고 왕을 재촉하였다. 이 처사(處事)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천주교인 중의 중요(重要)한 人物들과 마찬가지로 남인(南人)에 속해 있었고, 게다가 이들 중 많은 사람과 혈연(血緣)이나 우정(友情)으로 맺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임(信任)과 어쩌면 품계(品階)까지도 잃을 것이 겁나고, 자기 재산(財産)과 집안의 재산을 보존(保存)하기를 원하여 박해자(迫害者)가 되었다. 우리는 뒤에 하느님의 정의(正義)가 그의 비겁함을 이 세상에서 벌써 벌(罰)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⑮-1 채제공(蔡濟恭) 정승의 간청에 못 이겨 왕은 尹(持忠)바오로와 權(尙然)야고보를 참수형(斬首刑)에 처하라는 명령에 서명(署名)할 것에 동의(同議)하였다. 그들의 머리는 이웃 주민들에게 겁을 주어 이들로 하여금 새 종교(宗敎)를 따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5일간 효시(梟示)하기로 되어 있었다. 왕의 재가(裁可)를 받은 명령(命令)은 전라감사(全羅監司)에게 발송되었다. 결안(結案)이 내려오자 두 신앙의 증거자(證據者)는 곧 감옥에서 끌려나와 형장(刑場)으로 갔다. 외교인(外敎人)과 천주교(天主敎人)인의 많은 무리가 그들을 따라갔다. 맞은 매로 인하여 쇠약해진 權(尙然)야고보는 이따금씩 예수마리아의 이름만 부르고 있었다. 몸이 더 튼튼한 尹(持沖)바오로는 즐거운 표정으로 나아가며 죽음을 향하여 가는 것을 마치 잔치에 나가는 듯 하였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나 의젓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說敎)하였던지 천주교인들 뿐만 아니라, 외교인(外敎人)들까지도 감탄해 마지않았다.


⑮-2 사형장(死刑場)에 이르자 형집행(刑執行)을 주재하는 관리(官吏)가 그들에게 ꡐ국왕에게 복종하고 조상의 신주(神主)에 상례적인 공경을 드리며, 외국종교를 버리기를 원하느냐?ꡑ고 물었다.


그들이 부정적으로 대답하자, 관리는 나라의 관습(慣習)대로 명패(命牌)에 쓴,  왕이 승인한 결안(結案)을 (尹持忠)바오로에게 읽으라고 하였다. 尹(持忠)바오로는 그것을 받아 큰소리로 읽었다. 그런 다음 그는 머리를 커다란 나무토막 위에 누이고, 여러 번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고는 지극히 침착한 태도(態度)로 망나니에게 치라는 신호를 하였다. 망나니는 단번에 그의 머리를 잘랐다.  다음은 權(尙然)야고보의 차례였는데, 그 역시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의 머리도 그의 사촌과 같이 잘렸다.  때는 辛亥년 11월 13일(1791년 12월 8 일) 오후 3시였다. 尹(持忠)바오로는 33세였고, 權(尙然)야고보는 41세였다.


⑮-3 그러나 王은 채제공(蔡濟恭) 정승의 간청에 진 것을 후회(後悔)하였다. 王은  나라의 풍속(風俗)과 관습(慣習)에 따라 이 첫 번의 행동이 국법(國法)이 되어,  그 뒤로는 새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계속 죽이게 되리라고 내다보았다. 사형집행(死刑執行)을 유예(猶豫)시키기 위해, 특사(特使)가 지급(至急)으로 全州의 감사(監司)에게 보내졌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尹(持忠)바오로와  權(尙煙)야고보는 이미 순교(殉敎)의 영관(榮冠)을 얻은 후였다.  


王이 예측(豫測)한 대로 천주교의 적(敵)들은 그때부터 늘 이 판결(判決)을 빙자하여 천주교인(天主敎人)들에 대한 사형선고(死刑宣告)를 국법(國法)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첫 번 의 공식(公式) 사형집행이, 그 뒤에 이어진 사형집행에 대다수의 중요한 원인(原因)으로 이용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유일(唯一)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⑮-4 천주교인들에게 겁을 주기 위하여, 처형장소(處刑場所)에는 시신(屍身)을 밤낮으로 지킬 책임을 맡은 포졸(捕卒)들을 배치하였다. 9일 만에 王에게서 그들을 장사지낼 허락을 받은 친척들과 그들의 장례식(葬禮式)에 왔던 친구들은, 두 시신(屍身)이 조금도 부패(腐敗)한 흔적이 없이 그날 참수(斬首) 당하기나 한 것처럼, 붉고 녹신한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그들의 머리를 놓고 자른 나무토막과  결안(結案)이 쓰였던 명패(命牌)가, 마치 바로 전에 흘린 것 같은 물고 신선(신鮮)한 피에 젖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⑮-5 조선(朝鮮)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12월(양력)에는 추위가 너무 심하여 그릇에  담은 모든 액체(液體)가 얼던 때인 만큼, 이러한 사정(事情)은 그만큼 더 놀라와 보였다. 외교인(外敎人)들은 매우 감탄하여 재판관(裁判官)들의 불공정(不公正)에  항의(抗義)하고, 두 증거자(證據者)의 무죄(無罪)를 주장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자세히 조사한  이 기적(奇蹟)에 감동하여 입교(入敎)까지 하였다.


천주교(天主敎)인들은 기쁨의 눈물을 글썽이며 주를 찬미(讚美)하였다. 그들은  많은 손수건을 순교자(殉敎者)들의 피에 담가 그 몇 조각을, 그동안 일어난 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와 함께, 북경주교(北京主敎)에게 보냈다.  신입교우(新入敎友)들은, 의사(醫師)들이 손을 놓고 포기한 채로 거의 죽어가던 한 사람이 피에 젖은 명패(命牌)를 담갔던 물을 마시고 난 뒤에 눈 깜짝할 사이에 나았다고 주장(主張)한다.

그들은 또 죽어가는 사람 여럿에게 그 피가 묻은 손수건을 만지게 한 결과 당장 나았다고 한다.


⑮-6 尹(持忠)바오로와 權(尙然)야고보의 모범(模範)은 조선의 초대천주교인(初代天主敎人)들에게 놀라운 영향(影向)을 미쳤다. 그들은 유명(有名)해졌고, 특히 尹(持忠)바오로는 오늘까지도 신자(信者)들 사이에 크나큰 존경(尊敬)을 받고 있다.  그에게는 13세의 딸이 있었는데, 그는 임시로 자기 아버지의 제자(弟子)였던 아전(衙前) 金토마스의 집에 가서 숨었다. 그는 낮에는 후원에 숨었다가 밤이면 집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그는 자기 처지에 따라 공주(公州) 지방 숯방이의 宋씨 집으로 시집갔다. 그의 어머니는 딸을 따라서 사위집으로 가서 천주교를 계속 신봉(信奉)하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천주교인들은 이 집안과 접촉(接觸)이 끊어졌다.


⑮-7 尹(持忠)바오로와 權(尙然)야고보의 처형(處刑)이 있은 며칠 후 조선정부는 백성(百姓)을 무섭게 하고 새로운 입교(入敎)를 막기 위하여, 그들의 결안(結案)과 사형소식(死刑消息)을 모든 읍내(邑內)와 모든 촌락(村落)에 붙이게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원수(怨讐)들의 계획(計劃)을 실패(失敗)로 돌리기를 즐기신다. 이 공시(公示)는 두 증거자(證據者)의 재판(裁判)에 대하여 매우 큰 반향(反響)을 불러일으켜, 이름조차도 모르던 많은 사람에게 천주교(天主敎)를 알게 하여, 복음(福音)의 전파(傳播)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조선에서나 어느 곳에서나 이 말은 항상 진리(眞理)이다. “순교자들의 피는 교우들의 씨앗이니라.”

 

-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 尹(持忠)바오로와 權(尙然)야고보 공술서(供述書)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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