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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제 4장 계속되는 박해(迫害)와 안타까운 배교자(背敎者)들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제 4장  계속되는 박해(迫害)와  안타까운 배교자(背敎者)들

                               ―  본문, 상권 357쪽  ―

천주교가 조선 남쪽의 첫 번 법정(法廷)에서 이렇게도 영광스럽게 변호(辯護)되고 있을 때, 다른 여러 천주교인들도 서울과 그 인근 지방에서 그들의 신앙(信仰)을 증거(證據)하라고 부름을 받았다. 〕


   1. 안타까운 배교자(背敎者)들


※ 권일신(權日身) 의 배교

① 權(日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는 1785년(秋曹摘發事件)에는 그 용기(勇氣)와 공식성명(公式聲明)에도 불구하고 무사하였다. 그러나 1791년에는 그 敵들의 질투를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이름과 학식(學識)과 끊임없는 노력 (努力)이 새로운 교리전파(敎理傳播)에 얼마나 큰 영향(影響)을 미치는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② 진산사건(珍山事件)을 계기로 하여 홍락안(洪樂安) 육만중(陸萬中) 및 그 밖의 여러 사람이 그를 천주교의 두목이요 지지자라고 지목(指目)하여 고발하였다. 그래서 權(日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는 그해 11월에 체포(逮捕)되어 형조(刑曹)에 넘겨졌다. 관원들은 그의 뜻을 변하게 할 수 없게 되자, 여러 차례 고문(拷問)을 가하였으며, 꾸준한 그의 마음을 이기기 위하여 특별한 형벌(刑罰)을 사용하였다.


③ 그는 형리(刑吏)들의 흉기(凶器)와 태장(笞杖) 밑에서도 분명히 자기의 신앙(信仰)을 고백(告白)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늘과 땅과 천신과 사람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천주를 섬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무엇을 준다 하여도 그분을 배반할 수 없고, 그분에게 대한 저의 의무(義務)를 궐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당하겠습니다.”


형벌(刑罰)로 인하여 그의 몸은 이내 처참하게 되었다. 그러나 (權)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를 알고 있고, 그의 훌륭한 자질(資質)을 높이 평가하던 임금은, 천주교의 원수(怨讐)들이 요구하는데 도불구하고, 그의 결안(結案)에 서명(署名)할  결심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임금은 그가 마음을 돌리기를 원하여,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방법(方法)을 써서 그를 이기라고 명하였다. 임금의 명(命)에  따라 전보다 훨씬 더 위험(危險)한 공격이 증거자(證據者)에게 가하여졌다. 달램,  아첨, 약속, 종용(慫慂) 따위가, 우정(友情)과 동정(同情)이 암시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더불어 차례로 사용되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금 모진 고문(拷問)과 형벌(刑罰)이 가해졌는데, 용감한 증거자(證據者)는 적들의 위험한 달램을 이긴 것처럼, 고통(苦痛)도 이겨냈다.


 權(日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를 사형(死刑)에 처할 결정(決定)을 내리지 못한 임금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제주도(濟州道)로 귀양 보내라는 판결을 내렸고,  제주목사(濟州牧使)는 그 죄수(罪囚)가 굴복할 때까지 한달에 세 번씩 신문(訊問)을 하라는 명을 받았다.


④ 權(日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는 결국 지옥(地獄)같은 이 첫 번째의 무서운 공격을 이겨낸 것이며, 그의 신앙(信仰)에는 아무런 손상(損傷)도 없었다. 그는 감옥에서 나왔는데, 그의 상처(傷處)의 상태가 염려되었으므로, 유배지(流配地)로  떠나기 전에, 며칠 동안 서울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매부(妹夫)인 이윤하(李潤夏)의 집에 가서 머물며, 상처(傷處)를 치료하는 한편, 먼 여행(旅行)을 준비하는데 골몰하였다. 이때 최후로 더 맹렬한 유혹(誘惑)이 그를 습격(襲擊)하려는 것을, 거의 어쩌면 충분히 예측(豫測)하지 못했다.


⑤ 임금의 명에 따라 형조(刑曹)의 몇몇 관리(官吏)들이 그에게 와서, 80세인 그의 노모(老母)가 이제 더 이상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환기(換氣)시켰다. 일단 바다 저편 제주(濟州)에 가면, 어머니를 홀로 외롭게 남겨 두게 되고, 임종(臨終)때에도 지켜보지 못할 것에 대한 가책(苛責)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관리(官吏)들은 이 비통(悲痛)한 광경(光景)을  강조하면서, 배교(背敎)의 말만 꺼내면 언제나 분개하며 거절했던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배교(背敎)하란 말은 하지 않은 채, 다만 감형(減刑)을 얻어 좀더 덜 먼 곳으로 귀양 갈 수 있도록, 임금에게 약간만 굴복(屈伏)하라고 권고(勸告)하였다.


⑥ 權(日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는 이 생각으로 마음이 매우 흔들리고 약하여짐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자기 손으로 굴복(屈伏)하는 표시(表示)를 하였다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같이 있던 사람 중의 하나가 그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서둘러 그의 이름으로 배교(背敎)의 표시(表示)를 하였다고도 주장한다. 또 한 가지 설명은 그가 다음과 같은 불완전(不完全)하고 애매한 글귀를  썼다고 전하다.  「서양인들의 도리는 대단히 다르다. 공자와 맹자의 도리다. 나쁘고 거짓되다.」


사람들은 그 문장 가운데는 그것을 보충(補充)하고 이해(理解)할 수 있게 만드는데 필요한 글자 하나가 빠졌다고 주장한다. (權日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는 “나를 가만 내버려 두시오. 당신들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한다. 사람들은 이내 그 한 글자를 보충하여 그 글귀가 다음과  같은 뜻이 되게 하였다.


 「서양인들의 도리는 공자와 맹자의 도리와 대단히 달라서 나쁘고 거짓되다.」

그 글귀의 내용(內容)이야 어찌되든 간에, 權(日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의 굴복(屈伏)을 王에게 아뢰기 위하여 특사(特使)가 파견되었다. 그의 유배지(流配地)는  즉시 바뀌어, 예산읍(禮山邑)으로 가라는 명(命)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다다를 시간조차 없었다. 길을 떠나자마자 상처(傷處)로 인하여 생긴 병(病) 때문에, 도중에 멈출 수밖에 없었고, 어떤 주막(酒幕)에서 죽고 말았다.


⑦ 필자는 진실(眞實)을 위해서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이 부분의 기록(記錄)은 우리  역사(歷史)에서 없애버리고 싶다. 그의 생애(生涯) 동안 그렇게도 위대(偉大)했고, 또한 형벌(刑罰)을 견뎌내는 과정에서도 그렇게 위대한 모습을 보인 그가,  자기의 최후(最後)의 순간을 그렇게도 비겁(卑怯)과 나약(懦弱)으로 흐리게 하는 것을 보여주었으니 이 무슨 광경인가?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큰 교훈(敎訓)인가?  물론 기록들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굴복행위(屈伏行爲)의 정도를 정확히 평가(評價)할 수없고, 그것을 공공연한 배교(背敎)로 규정지을 수도 없지만, 하나의 승리(勝利)를 이야기하지 못하고, 이 풀 수 없는 의문(疑問)  앞에서 우리는 마음에 슬픔을 안은 채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에 천사(天使)들이 벌써 그의 머리 위에 들고 있던 순교(殉敎)의 영관(永冠)을 거부한 후에라도, 權 사베리오가 진실한 통회(痛悔)를 통하여, 생전에 그렇게도 열성적(熱誠的)으로, 그렇게도 성공적(成功的)으로 그 공경(恭敬)을 전파하고, 그 영광(榮光)을 선양(宣揚)하였던 하느님 앞에서 은총(恩寵)을 얻을 수 있었다면 다행(多幸)스러운 일이다.


⑧ 이것이 부모에게 대한 너무 인성적(人性的)인 사랑으로 빚어진 타락(墮落)으로 나타난 것으로는 두 번째 예가 된다. 우리는 다른 예를 도 보게 될 것이다. 효도(孝道)가 신성한 의무(義務)라는 것은 조금도 의심(疑心)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한 층 더 신성(神聖)한 의무(義務)들이 있는데,  조선 초대(初代) 신입교우(新入校友)들 중에는 많은 사람이 그것을 충분(充分)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제 4장 계속되는 박해(迫害)와 안타까운 배교자(背敎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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