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3. 지방(地方)의 박해와 배교자(背敎者)들
① 광주(廣州) 고을에는 최창주(崔昌周)마르첼리노와 함께 갇혔던 동료들의 배교(背敎)가 있었고, 홍주(洪州) 고을에서는「성화」집안의 배교가 있었으며, 당진(唐津)고을에서는 배(裵) 프란치스꼬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배교하였다. 최창주(崔昌周) 마르첼리노와 배(裵) 프란치스꼬는 나중에 자기의 피로 그 죄(罪)를 씻었다.
② 내포(內浦) 천주교신자들의 가장 슬프고 가장 창피스러운 배교(背敎)는 그들의 사도(使徒) 李「단원」(存昌) 곤자기의 루도비꼬의 배교였다.
외교인(外敎人)과 천주교인(天主敎人) 모두에게 잘 알려진 그는 박해자들의 함정(陷穽)을 오랫동안 피할 수가 있었다. 그는 공주(公州)에서 붙잡혀 옥에 갇혔다. 그가 어떤 형벌(刑罰)을 받아야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의 마음이 흔들렸던 것은 사실(事實)인 것 같다. 공주감사(公州監司) 박종악(朴宗岳)의 12월 2일자 글에는 왕에게 李「단원」(存昌)의 복종(服從)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그는 아주 분명(分明)하게 배교(背敎)하였고, 요술이 섞인 그 악한 都에 끌려 들어간 것을 원통히 생각한다고 증언(證言)하였으며, 자기가 가르친 모든 사람을 참다운 길로 다시 데려오기 위하여 권고(勸告)하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② 王은 죄인의 회개(悔改)가 아주 최근에 있은 일인 만큼, 그 개과(改過)가 적극적(積極的)이고 완전하게 된 다음에만 석방(釋放)하라고 명령을 내려 보냈다. 그러나 李「단원」(存昌)은 동월 5일에 석방(釋放)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공주감사(公州監司) 의 보고는 엄청나게 과장(誇張)된 것이었다. 李(存昌) 루도비꼬의 잘못이 어떠한 것이었더라도, 그의 나약함이 천주교인들을 배교(背敎)시키겠다고 맹세하기까지에는 이를 수가 없었다. 그 가장 좋은 증거(證據)로는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그는 본분(本文)을 다시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③ 그러나 그가 내포(內浦)에서는 너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새로운 위험(危險)을 덜 당하기 위하여 이사(移徙)를 가기로 결정하였다. 그 해(1791)년12월 30일 밤에 그는 형에게 하직(下直)을 고하였다. 그 곳에 살고 있던 서른 집이 넘는 친척들뿐 아니라, 3백 가구가 넘는 그 동네의 모든 주민(住民)들도 그의 곁으로 모였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알려 준 사람이 그였고, 그들을 입교(入敎)시키고 영세(領洗)를 준 것도 그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각기 아버지나 형이나 친구를 잃는 것 같았다. 그의 출발은 참으로 비통(悲痛)한 광경이었다. 그는 홍산(鴻山) 고을에 가서 자리를 잡았고, 비록 전보다 훨씬 덜 화려(華麗)하게, 덜 드러내놓고 하였지만, 복음전도(福音傳道)의 일을 다시 시작하였다. 우리는 나중에 그의 순교(殉敎)이야기를 하는 기쁨을 갖게 될 것이다.
④ 당신의 은밀한 계획(計劃)으로 이렇게 많은 배교(背敎)를 허락하신 하느님이시지만, 당신 이름의 원수(怨讐)들이 완전한 승리(勝利)를 자랑할 수 있게 되기를 허락(許諾)하지 않으셨다.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충절(忠節)의 본보기가 조선(朝鮮)의 어린 교회(敎會)를 위로(慰勞)하였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