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증거자 김정득(金丁得) 베드로의 순교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와 같은 날 판결(判決)을 받은 두 번째 증거자(證據者)는 김정득(金丁得)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으나, 이 김정득(金丁得)이라는 사람은,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의 순교(殉敎)와 관련하여 방금 위에서 말한 바 있는 바로 그 김「대춘」베드로임이 확실하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불명예(不名譽)스러운 처벌(處罰)을 받은 죄수(罪囚)들일 때에는, 이렇게 이름을 바꾸는 일이 꽤 흔하다.
김정득(金丁得) 베드로는 내포(內浦)지방 대흥(大興)고을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홍주관아(洪州官衙)로 압송(押送) 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병사(兵使)가 있는 청주(淸州)로 이송되어, 여러 달 동안 자주 혹독(酷毒)한 고문(拷問)을 당하였다. 그는 친척(親戚)인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와 함께 옥에 갇혀 있었다.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와 마찬가지로 그도 형벌(刑罰) 중에 굳건하였고, 자기 신앙(信仰)에 꾸준하였다.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와 함께 서울로 이송(移送)되었다가. 각각 자기의 고향(故鄕)에서 순교(殉敎)의 영관(榮冠)을 얻기 위하여 둘이 함께 그곳을 떠났다. 김정득(金丁得) 베드로는 7월 17일,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가 예산(禮山)에서 참수(斬首)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대흥(大興)읍내에서 참수(斬首)되었다.
3) 전라도(全羅道)의 세 증거자(證據者)와 또 다른 증거자들
ⅰ) 한정흠(韓正欽) 스다니슬라오
위에서 말한 사람들과 같은 날 사형판결(死刑判決)을 받은 전라도(全羅道)의 세 증거자(證據者) 중에 우선 한정흠(韓正欽) 스다니슬라오가 있다. 한정흠(韓正欽) 스다니슬라오는 이 도(道)의 김제(金堤)고을에 사는 가난한 양반 집에 태어났다.
조금 뒤에 말하게 될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의 먼 친척(親戚)이 되는 한정흠(韓正欽) 스다니슬라오는, 늘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의 집에 살면서, 그의 아들의 선생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는 거기에서 천주교(天主敎)의 이야기를 듣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 열심으로 교의 본분(本分)을 지켰다.
그가 3월경에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잡혔을 때, 형벌(刑罰)과 약속(約束)과 유혹(誘惑)으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전주(全州)에서, 다음에는 서울에서 자기의 신앙(信仰)을 당당하게 고백(告白)하였다.
한정흠(韓正欽) 스다니슬라오는, 사람들이 유씨(柳氏) 집안이 꾸몄다고 주장하는 음모사건(陰謀事件)에 조금도 연루(連累)되지 않았고, 오직 천주교에만 고집스럽게 집착(執着)함으로 인하여 단죄(斷罪)된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본 고을에서 사형(死刑)을 당하기 위하여 김제(金堤)로 압송(押送)되어, 7월 18일에, 46세의 나이로 참수(斬首)를 당하였다.
ⅱ) 김천애(金千愛) 안드레아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의 집안 종으로, 그에게서 신앙(信仰)의 중요한 교리(敎理)를 배운 김천애(金千愛) 안드레아는, 자신의 신분(身分)을 초월(超越)하는 고결(高潔)한 마음으로, 신앙(信仰)의 본분(本分)을 지킬 줄을 알았다.
주인과동시에 붙잡혀 결코 자기 목숨을 배교(背敎)로 구하는 데 동의(同意)하지 않고, 전주(全州)와 서울에서의 신문(訊問)을 용감히 받아 사형(死刑)에 처해지게 되었고, 7월 19일이나 20일(8월 27일이나 28일)에 전주(全州)에서 처형(處刑)되었다.
ⅲ) 최여겸(崔汝謙) 마티아
① 최여겸(崔汝謙) 마티아는 무장(茂長)고을의 조그마한 반명(班名)을 가진 부모에게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막연히 듣고, 그것을 알기를 매우 원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는 내포(內浦)지방 남쪽에 있는 한산(韓山)고을에서 결혼(結婚)하였다. 그는 미구에 그 근방에 천주교인들이 많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곧 그들을 찾아가, 그들에게서 복음(福音)의 주요(主要)한 진리(眞理)를 배운 다음, 무장(茂長)으로 돌아와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그것을 실천(實踐)하기 시작하였다.
신앙(信仰)을 사방에 알게 하고, 자기가 받은 은총(恩寵)을 전해주기 위한 그의 열심(熱心)과 신심(信心)이 대단하여, 많은 외교인(外敎人)들을 입교(入敎)시켰다.
② 고향에서 박해(迫害)가 맹렬히 일어나자, 최여겸(崔汝謙) 마티아는 한산(韓山)에 있는 처가(妻家)로 피신(避身)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수많은 교우(敎友)가 거기에서 붙잡혔고, 그 중에는 그가 입교(入敎)시킨 사람들이 28명이나 끼어 있었다. 그들 중 몇 사람이 배반(背反)을 하여, 관리(官吏)들에게 그가 숨어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그는 4월 13일 붙잡혀 우선 한산관아(韓山官衙)로 끌려가, 본관(本官) 앞에서 신문(訊問)을 당해야 했다. 관장(官長)은 여러 번 그를 고문(拷問)하였으나 소용이 없자, 감사(監司)에게 그의 체포(逮捕)를 보고하였고, 감사(監司)는 그에게 칼을 씌워 무장(茂長) 본관(本官)에게로 압송(押送)하라고 명하였다.
③ 거기에서는 새로운 형벌(刑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그의 용기(勇氣)를 꺾을 수가 없게 되자, 관장(官長)은 어쩔 수가 없어 전라감영(全羅監營)이 있는 전주(全州)로 그를 이송(移送)하였는데, 거기에서 사형선고(死刑宣告)가 내려졌다.
거의 80이 된 어머니가 아직 살아계시므로, 최여겸(崔汝謙) 마티아는 아무런 유한(遺恨)없이 죽기 위하여, 어머니를 한 번 뵈러 갈 허락(許諾)을 청하였으나, 그것은 거부(拒否)되었다.
그를 매질로 죽이겠다고 위협(威脅)함으로, 그렇게 되면 자기의 제헌(祭獻)에 무슨 부족한 것이 없을까 겁이 나서 여러 날 동안을 슬픔에 잠겨있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오래지 않아 당신 종의 소원(所願)을 들어주시어, 그가 충성(忠誠)스런 증거자(證據者) 한정흠(韓正欽) 스다니슬라오와 김천애(金千愛) 안드레아 곁으로 이송(移送)되기를 허락하셨다.
④ 그들이 다시 모였을 때, 최여겸(崔汝謙) 마티아의 기쁨과 그 용맹(勇猛)한 동료(同僚)들의 기쁨은 매우 컸다. 마침내 형조(刑曹)에서 최종적인 선고(宣告)를 내렸고, 최여겸(崔汝謙) 마티아는 자기의 고향인 무장(茂長) 고을 지갑장터로 압송(押送)되었다가, 7월 19일(8월27일) 39세의 나이로 참수(斬首)당하였다.
ⅳ) 또 다른 증거자(證據者)들
여기에 같은 전라도(全羅道)의 몇몇 다른 증거자(證據者)들의 이름을 덧붙이기로 하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자세한 사정(事情)은 남아 있지 않고, 또 그들이 순교(殉敎)한 정확한 날짜도 보존(保存)되어 있지 않으나, 같은 시기에 고통(苦痛)을 당하였을 것이 틀림이 없다. 이들은 아래와 같은 사람들이다.
ⅰ) 이(李)「화백」, 이 사람은 영광(靈光) 고을의 양반(兩班)이요, 최여겸(崔汝謙) 마티아의 제자(弟子)로 자기의 고향(故鄕)에서 참수(斬首)를 당하였다.
ⅱ) 같은 최여겸(崔汝謙) 마티아의 조카로, 흔히「금노」로 불리는 최(崔)「일안」이란 사람은 영광스럽게 신앙(信仰)을 증거(證據)한 후, 전주(全州)에서 죽으니, 나이는 40세였다.
ⅲ) 영광(靈光) 고을 복산지의 양반(兩班)으로 참수(斬首)를 당한 오씨(吳氏)라는 교 우.
ⅳ) 금산(錦山)고을 솔티에서 붙잡혀, 전주(全州)에서 참수(斬首)를 당한 원씨(元氏).
-샤를르 달레 神父 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