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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제 2장 지방의순교자들 -5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4. 8월의 순교자(殉敎者)들


1) 김종교(金宗敎)의 신앙증거


   8월 중에 처형(處刑)된 증거자(證據者)들 가운데, 그의 어머니의 순교이야기를 할 때에 이미 그 순교(殉敎)이야기를 한 바 있는 강완숙(姜完淑) 골룸바의 전 남편(男便)의 전실(前室) 아들 홍필주(洪弼周) 필립보와 김종교(金宗敎)이다.

   김종교(金宗敎)는 그가 성세(聖洗)를 받은 뒤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생활을 한 까닭에, 교우(敎友)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 의원(醫員)집인 출신이었다. 그는 천주교(天主敎)가 조선(朝鮮)에 퍼지자마자 교에 들어왔다.

   쌀쌀하고 호감(好感)이 가지 않는 얼굴에 숫기가 없고, 게다가 집이 몹시 가난하였으므로, 큰 인물(人物)들과 별로 접촉이 없었으며, 따라서 벼슬자리를 얻을 기회(機會)가 별로 없었다. 그 대신 착실한 공부에 취미(趣味)를 가지고 있어, 이벽(李檗)은 그를 매우 존중(尊重)하고 사랑하여,「치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놀라운 사람이라고 자주 말하였다.

   1791년에는 그는, 그 당시의 거의 모든 교우(敎友)들처럼, 배교(背敎)하여 석방(釋放)되었었으나,  이내 자기의 나약(懦弱)함을 뉘우치고, 더욱 열심하고 부지런하게 천주교의 본분(本分)을 다시 시작하였다.

   1801년 박해(迫害) 때에는, 배교(背敎)하였다가 다시 천주교를 믿는 자로 밀고(密告)되어 옥에 갇혔고, 거기에서 처음에는 용감(勇敢)하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證據)하였다.

   그의 결안(結案)을 믿어야 한다면, 그가 포청(捕廳)에서는 잠간 망설였다가, 형조(刑曹)로 넘어가서는 즉시  먼저의 말을 취소(取消)하였고, 그때부터는 전혀 겁을 내지 않았다. 그는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고, 홍필주(洪弼周) 필립보와 같은 날, 즉 8월 27일 처형(處刑)되었다.


2) 조(趙) 토마스의 죽음


① 양근(楊根)고을의 조동진(趙東진) 유스티노의 아들 조(趙) 토마스가 잡힌 것도 8월 중이었다. 조동진(趙東진) 유스티노는 천주교 때문에 의금부(義禁府)에서 귀양살이 판결(判決)을 받았었는데, 그의 개인적인 원수(怨讐)인 양근군수(楊根郡守)가 그를 죽이지 못한데 화가 나서, 아비가 그의 손을 빠져나갔으니 아들에게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를 하였다.

     조(趙) 토마스가 아버지를 따라 북쪽 멀리 가 있어, 그의 권한(權限)이 미치지 못하는 지방에 있으므로, 그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군수(郡守)는 대신(大臣)에게 여러 차례 청원서(請願書)를 내었고, 마침내 몇몇 권력(勸力)있는 친구의 힘을 얻어, 필요한 권한(權限)을 얻어냈다.


② 조(趙) 토마스는 어려서 천주교인이 되기 전부터, 이미 훌륭한 성격(性格)과 효성(孝誠)으로 뛰어났었다. 그러므로 입교(入敎)한 후 얼마 안 있어, 덕행(德行)과 모든 본분(本分)을 정확히 지키는 것으로, 그곳 교우들의 모범(模範)이 되었다.

   1800년 그의 아버지가 체포(逮捕)되었을 때, 그는 아버지를 따라가 옥에서 10 리 되는 곳에 자리를 잡고, 매일 두 번 씩 읍내(邑內)에 들어가 아버지에게 음식을 갖다 드리고, 힘을 다하여 그를 위로(慰勞)해 드렸다. 조동진(趙東진) 유스티노가 서울로 이송(移送)되자, 조(趙) 토마스는 그의 뒤를 따라가 낮이고 밤이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 뒤 서울에서 북쪽으로 150리쯤 떨어진 그의 유배지(流配地)까지 따라갔다.

   그들이 겨우 도착하자마자 조동진(趙東진) 유스티노는 나이와 상처(傷處)와, 그다지도 힘든 여독(旅毒)으로, 쇠약(衰弱)해져서 중병(重病)이 들었다. 조(趙) 토마스는 항상 그의 곁에 있으면서 말할 수 없는 정성(精誠)으로 그를 섬겨, 고을의 외교인(外敎人)들이 감탄(感歎)하여, 그런 효성(孝誠)을 일찍이 본 일이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하였다.


③ 조동진(趙東진) 유스티노의 병은 나았고, 귀양살이의 고통(苦痛)과 부자유(不自由)를서로 위로(慰勞)하고 있었는데, 그때 8월에 양근(楊根)에서 포졸(捕卒)들이 찾아온 것이었다. 깜짝 놀란 처음의 순간이 지나자, 조동진(趙東진) 유스티노는 아들에게

  ꡒ그래, 너는 어떻게 할 작정이냐?ꡓ

   하고 말하였다. 토마스는 늙으신 아버지를 혼자 버려 둘 수밖에 없었으므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天主)의 명령에 복종(服從)하면서도, 아버지에게 너무 괴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가 않아, 깊은 근심을 나타내보이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ꡒ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발 한 발 따라가는 것 밖에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ꡓ

   이 말을 듣고 유스티노는

  ꡒ좋다. 이제는 네가 떠나는 것을 안심하고 후회 없이 보내겠다.ꡓ

   라고 말하며, 그들 부자(夫子)는 이 세상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별(離別)을 하였다.


④ 조(趙) 토마스가 양근(楊根)에 도착하니, 군수(郡守)가 그에게 말하였다.

  ꡒ네 아비의 죄를 아느냐?ꡓ

   조(趙) 토마스는 대답하였다.

  ꡒ사또께서는 어떻게 인륜(人倫)을 무시하고 그런 질문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제 아버지가 무슨 죄를 지으셨습니까? 지금 아버지가 당히시는 처지는 제

    잘못으로 인한 것이지, 아버지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ꡓ

  군수(郡守)는 화가 몹시 나서 그에게 혹독(酷毒)한 고문(顧問)을 시키며, 배교(背敎)하라고 강요(强要)하였으나, 조(趙) 토마스는 끈기있게 모든 것을 참아 받았다. 그는 근 두 달 동안을 거의 날마다  관아(官衙)에 끌려 나가 신문(訊問)을 당하였으나, 한시도 나약(懦弱)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⑤ 그러나 그의 육체(肉體)는 마침내 반복된 형벌(刑罰)에 견디지 못하였다. 10월 초에 조(趙) 토마스는 감옥(監獄)에서 죽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순교(殉敎)할  마음의 준비(準備)를 하고 있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그가 잡히는 것을 허락(許諾)하신다면, 형벌(刑罰)을 받는데 익숙해지기 위하여, 여러 해 전부터, 혼자 있는 틈을 타서 자기

의 팔다리를 몹시 쳤다고 한다. 아마도 이 용감(勇敢)한 극기(克己)를 상주시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그에게 순교(殉敎)의 영관(榮冠)을 주신 모양이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제 2장 지방의순교자들 -5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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