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1791년 윤지충(尹持忠) 바오로가 순교한 때부터 1801년의 대박해(大迫害)까지 전라도(全羅道)는 매우 평온(平穩)하여, 천주교인이 대단히 많아졌다. 복음(福 音)이 이렇게 빨리 전파되는데 가장 많이 이바지한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였다. 그러므로 그는 박해(迫害)의 대상(對象)에 제일 먼저 낀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3월에 집안 식구 여럿과 함께 붙잡혀, 그는 김달순(金達淳)이 그때 감사(監司)로 있던, 전라도(全羅道)의 수부(首府) 전주영문(全州營門)으로 끌려갔다. 그가 당해야 했던 신문(訊問)의 상세한 내용(內容)은 잘 알 수 없으나, 불행이도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는 배교(背敎)하였던 것 같다.
그의 형제들 중의 하나인 유관검(柳觀儉)은 그보다 훨씬 더 비겁하였다. 그는 고문(拷問)에 굴복(屈伏)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원(官員)들이 그에게 요구하는 모든 밀고(密告)를 하였으며, 그에게 묻는 것 이상의 것을 알려 줄 용의(用意)가 있음을 나타냈다.
② 감사(監司)는 그렇게 좋은 기회를 잘 살려, 이 불행한 사람의 겁을 이용(利用)할 것을 잊지 않았다. 감사(監司)는 그에게 그이 집안의 온 절망적(絶望的)인 상태를 눈앞에 그려 보임과 동시에, 그가 아는 모든 것을 솔직(率直)하게 고백(告白)하는 것이 죽음을 모면하는 길이 될 뿐만 아니라, 조정(朝廷)의 호의(好意)를 얻어 높은 관직(官職)에도 오를 수 있는 길이 되리라는 희망(希望)을 불어 넣어 주었다.
유관검(柳觀儉)은 겁과 야심(野心)으로 눈이 어두워 쉽사리 함정(陷穽)에 빠져 들었다. 그는 우선 자기의 모든 책을 불사르고, 아는 교우(敎友)들의 명(名單)을 길게 적어 놓았다. 그 명단(名單)은 이내 할용(活用)되었다.
며칠 사이에 전주(全州), 금산(錦山), 고산(高山), 영관(靈光), 무장(茂長), 김제(金堤), 그 밖의 고을들을 포졸(捕卒)들의 무리가 샅같이 뒤져, 2백여 명 이상이 옥에 갇혀 무서운 고문(拷問)을 당하였다고 그 당시의 수기(手記)에 적혀 있다.
③ 그들 중 대부분이 하느님에게 충실(忠實)할 용기(勇氣)가 없었음을 확인(確認)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북경(北京)에 보냈던 밀사(密使)들의 왕래에 대하여, 지극히 위험(危險)한 자백(自白)을 한 사람까지 있어서, 이 사건은 야릇하게 복잡(複雜)하여졌다.
특히 유관검(柳觀儉)은 이성(理性)을 잃었던 것 같다. 그의 공초(供招)의 일부를 보면, 그가 영문(營門)에서 다음과 같은 진술(陳述)을 하였다는 말이 있다.
『천주교를 신봉하기 위해서는 신부(神父)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신부가 없으면 칠성사(七聖事)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를 데려와야만 했고, 그가 조선에 있는 것을 을 모든 조심을 다해 감추어야만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세(聖洗)와 견진성사(堅振聖事)를 거행하기 위해서는 성유(聖油)가 있어야 하며, 이 성유(聖油)는 해마다 갈아야 합니다. 따라서 해마다 성유(聖油)를 받아오라고 사람을 북경(北京)에 보내야만 했습니다.
1797년에는 황심(黃沁)이 북경에 갔었고, 그 후에는 고산(高山) 김가(金哥) 중의 하나가 북경(北京)에 갔습니다. … 그러나 이 여행(旅行)이 지극히 어려우므로 사정(事情)은 너무나 불안정(不安定)했습니다. 이런 모든 불편(不便)을 없애기 위해, 조정(朝廷)과 교섭(交涉)을 하여 종교(宗敎)의 자유(自由)를 얻어낼 수 있을 서양의 배를 조선 연안(沿岸)에 불러올 계획(計劃)을 세웠습니다.…』
④ 그런 다음 유관검(柳觀儉)은 이 같은 계획(計劃)을 실행(實行)하는 데 쓰일 비용(費用)을 충당(充當)하기 위하여, 돈을 냈다는 사람들 중의 몇 사람도 밀고하였다.
그 이름 중에는 신부(神父)가 조선(朝鮮)에 들어올 때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천주교를 신봉(信奉)하지 않게 되었던 이승훈(李承薰)의 이름과, 천주교인들과는 일찍이 관계(關係)를 맺은 적이 없는 이가환(李家煥)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필자(筆者)는 유관검(柳觀儉)이, 살아있는 교우(敎友)들을 아끼느라고, 자기가 알거나 혹은 꾸며서 말한 사실(事實)의 가증(可憎)스러운 점을 모두 이미 처형(處刑)된 이 사람들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였든지, 혹은 그보다 더 그럴만한 해석(解釋)으로는 이 나라의 재판(裁判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처럼, 관리(官吏)들이 제 멋대로 근거(根據) 없는 고발(告發)을 강제로 끌어냈든지 한 것으로 생각된다.
⑤ 2월 26일 처형(處刑)된 중요한 교우(敎友)들 중 여러 사람도 이 공초(供招)에 포함되어 있다. 사건(事件)은 이리하여 점점 더 중대한 양상(樣相)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관리(官吏)들은 서둘러 배교자(背敎者)들을 석방(釋放)하거나 귀양보내고, 가정 유력하거나 가장 혐의(嫌疑)가 많은 약간의 피고(被告)는 서울로 보내 의금부(義禁府)의 판결(判決)을 받도록 하였다.
이들 중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 그의 동생 관검(觀儉), 윤지헌(尹持憲), 김유산(金有山), 이우집(李宇集), 한정흠(韓正欽) 스라다니슬라오, 최여겸(崔汝謙) 마티아, 김천애(金千愛) 안드레아 밖에는 알려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세 사람은 외국인(外國人)을 불러오는 음모(陰謀)에 가담한 것 때문에, 기소(起訴)된 것이 아니고, 오직 천주교를 신봉(信奉)한 것 때문에 기소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재판(裁判)은 훨씬 빨리 끝났다. 필자(筆者)는 위에서 이들의 순교(殉敎) 이야기를 한 바 있다.
⑥ 다른 5명의 피고(被告)는 그 밖에도 국가안전(國家安全)에 대한 음모(陰謀)로 기소되었다. 그들의 소송예심(訴訟豫審)은 질질 끌었고, 따라서 공판(公判)과 신문(訊問)이 거듭되었다. 온 국민이 불안한 가운데에 이 중대(重大)한 사건(事件)의 결말(結末)을 기다렸다.
천주교의 적들과 남인(南人)의 적들은 모두가 일을 크게 벌이려고 앞을 다투어 법석을 떨었다. 마침내 피고(被告)들을 역적(逆賊)으로 몰기로 결정되어, 9월 11일이나 12일에 그들의 최후판결(最後判決)이 내려졌다.
그들은 사교(邪敎)를 믿고, 외국인과 통하여 정부(政府)의 의사(意思)를 강요(强要)하기 위히여, 서양의 배를 불러들일 음모(陰謀)를 꾸몄다고 하여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 5인을 모두 그들의 출신 도의 수부(首府)인 전주(全州)로 압송(押送)하여, 백성들 앞에서 처형(處刑)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⑦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와 그의 동생 유관검(柳觀儉)과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꼬는 참수(斬首)되고,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 이 형벌(刑罰)은 머리를 자른 뒤에 4지(四肢)를 잘라내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동체(胴體)와 합하여 여섯 토막이 되는 것이다. 김유산(金有山)과 이우집(李宇集)은 참수(斬首)만 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을 즉시 전주(全州) 읍으로 보냈고, 9월 17일(10월 24일) 감사(監司)는 판결(判決)을 하나하나 그대로 집행(執行)하였다. 뿐만 아니라그들 각자의 가족(家族)들은 법의 보호(保護)에서 제외되었고, 이런 경우의 관례(慣例)를 따라 그들의 집고 재산(財産)은 모두 적몰(籍沒)되었다.
⑧ 유관검(柳觀儉)은 그때 34세였다. 그가 죽기 전에 자기의 배교(背敎)를 철회(撤回)하고, 자기가 끼친 모든 불행(不幸)에 대하여 용서(容恕)를 비는 행복(幸福)을 가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필자(筆者)는 위에서, 일반적인 견해(見解)에 따르면, 전에 천주교를 신봉(信奉)하고, 온 도내에 그것을 전파(傳播)하는 데 그렇게도 열성적(熱誠的)이었던 사람, 그의 형이며 가장이던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가 맨 처음에는 다른 세 사람과 마찬가지로, 배교(背敎)하는 표를 보여주는 나약(懦弱)함을 가졌었다는 말을 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苦痛)이 무익하지 않아, 마지막 순간에 자기들의 피로 자신들의 죄를 씻는 은총(恩寵)을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는 46세의 나이로 죽었다.
⑨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꼬는 이 나라에서 최초의 순교자(殉敎者) 중의 하나인 윤지충(尹持忠) 바오로의 아우였다. 형이 죽은 다음 그는 고향(故鄕)을 떠나 고산(高山) 고을 제구리로 가서 살면서, 진심으로 천주교를 계속 신봉(信奉)하였다.
재판(裁判)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자기의 책을 감추어 둔 곳을 댔고, 특히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그가 신앙(信仰)에 꾸준하였는지를 의심하게 되었다. 형벌(刑罰)이심하여 그는 유관검(柳觀儉)이 진술한 것처럼, 교우들이 서양의 배를 불러 오려고 하였다는 자백(自白)도 하게 되었다.
그가 처형(處刑)당할 때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그의 아내는 거제도(巨濟島)로 귀양을 가서 1828년에 죽었다. 그의 세 아들도 여러 섬으로 귀양을 갔는데, 그 중 하나는 오늘까지도 살아 있다는 말이 있다.
⑩ 성(姓)과 본명(本名)을 알 수 없는 이우집(李宇集)은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의 집안과 인척(姻戚)간이었다. 그의 생애(生涯)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끝으로 김유산(金有山)응 중인(中人)으로서 유씨(柳氏)집안과 다른 교우(敎友)집안들의 심부름을 하느라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었다. 그는 또 북경(北京)을 왕래하며 편지(便紙)를 가져가기도 하고 가져오기도 한 것 같다. 이것 때문에 그는 소위 음모사건(陰謀事件)에 연루되었다. 그의 본명(本名)은 토마스였던 것 같다. 그가 참수(斬首)당하였을 때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⑪ 이제 이 모든 사건(事件)에 대한 필자(筆者)의 의견(意見)을 말해야 한다면, 필자는 확실(確實)한 근거(根據)위에 무함을 쌓아 올린 것으로 생각한다. 확실한 사실(事實)은 교우들이 서양 그리스도국들의 사신(使臣)을 통하여 박해(迫害)를 멎게 하기 위한 평화적(平和的)인 개입(介入)을 원하고 또 간청(懇請)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 자신이 계획을 북경주교(北京主敎)에게 설명하는 것을 본 바 있다(本稿 70쪽 참조). 사실(事實)과 다른 것은,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와 그와 함께 공범자(共犯者)로 단죄(斷罪)된 사람들이, 외국의 침입을 이용하여 조선정부(朝鮮政府)의 전복(顚覆)을 꾀하였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어떠한 증거(證據)도 절대로 없었고, 목도(目睹)한 증인(證人)들의 입에서 얻은 수많은 상세한 사정도, 이 문제에 대하여 털끝만한 의심도 남겨줄 수 없다. 문제(問題)가 된 돈은 선교사들의 개인비용(個人費用)과, 이따금 북경(北京)으로 파견되는 교우(敎友)들의 비용(費用)에 사용하기로 된 것이었다. 곤장(棍杖)이나 그 밖의 고문(拷問)으로 얻어낸 여러 가지 고백(告白)과 밀고(密告)는 거기에 어떤 가치(價値)를 부여한다는 것이 유치(幼稚)한 일일 것이다.
⑫ 다른 사실, 즉 다른 재판(裁判)과 다른 형벌(刑罰)의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지금 이야기하려고 하는 사건(事件)들의 일부분이, 몇 달 뒤에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유씨(柳氏) 집안의 이야기를 보충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는 연세가 매우 많은 어머니와, 아내와 여섯 자녀를 두고 죽었다. 이순이(李順伊) 누갈다와 결혼한 맏아들 유(柳)「종선」중철(重哲) 요한, 얼마 전에 결혼하였으나 아직 시집으로 가지 않은 딸인 둘째, 총각으로 있는 셋째 유(柳)「문철」(文碩) 요한, 그리고 9세, 6세, 3세 된 나머지 세 아이가 있었다.
이 외에 천주교가 조선에 전파(傳播)되기 전에 죽은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의 형의 아들 유중성(柳重誠) 마테오가 있었는데, 이 젊은이는 15세 내지 18세로, 그 때에 강주(康州)도령이라고 불렀었다, 끝으로 유중성(柳重誠) 마테오의 어머니와 유관검(柳觀儉)의 미망인(未亡人)도 있었다.
이 많은 가족들이 천주교에 대한 열성(熱性)과 애착(愛着)으로 모든 가정 중에서 뛰어났었다. 그러나 특히 유중철(柳重哲) 요한의 아내 이순이(李順伊) 루갈다를 지적해야 하겠다. 우리는 가장 귀한 순교자(殉敎者) 중의 하나이며, 이 역사(歷史)의 가장 감동적(感動的)인 인물(人物)들 중의 하나인, 이 젊은 부인(婦人)에 대하여 몇 가지 사정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2. 이순이(李順伊) 누갈다의 순교
① 이순이(李順伊) 누갈다는 서울에서 이 나라의 가장 훌륭한 집안 중의 하나에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윤하(李潤夏)였고, 어머니는 권씨(權氏)였으며, 이순이(李順伊) 누갈다 자신은「유희」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녀는 같은 해인 신유년(辛酉年) 12월에 순교한 이경도(李景陶) 가롤로의 누이동생이요, 이경언(李景彦) 바오로의 누님이었는데, 바오로는 1827년 박해(迫害) 때에, 자기의 형과 누님의 영광스러운 발자취를 따라가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될 것이다.
이순이(李順伊) 누갈다는 강직(剛直)한 성격과, 상냥하고 열정적(熱情的)인 마음과, 비상한 총명(聰明)을 타고 났었다. 한마디로 그녀는 육체(肉體)와 정신(精神)의 모든 자질(資質)을 타고났는데, 그 지의에 알맞은 교육(敎育)으로 인하여 그녀의 자질(資質)은 쉽사리 발전할 수가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아직 어릴 때 죽었는데, 아마 천주교에 대한 말을 도무지 듣지 못한 것 같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보다는 더 행복하여, 천주교 교리(敎理)를 배워 자녀들을 신심(信心)속에서 기르는 데에 일생(一生)을 바쳤다.
② 이순이(李順伊) 누갈다는 덕이 많은 어머니의 보살핌에 충실(充實)히 응하여, 그녀의 모든 생각은 자기 영혼(靈魂)의 구원(救援)에만 집중되었고, 그녀의 마음의 모든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바쳐졌으며, 그녀의 높은 가문(家門)으로 볼 때 쉽게 마련할 수 있었을 영화(榮華)와 향락(享樂)을 조금도 원하지를 않았다.
그녀기 14세가 되었을 때, 얼마 전에 조선에 들어온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그때 교우(敎友)들은 일반적으로 신앙교리(信仰敎理)를 별로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순이(李順伊) 누갈다가 처음에는 너무 어려서 성사(聖事)를 받을 수 없을 것으로 보았으나, 그녀는 이미 이 천상은혜(天上恩惠)의 가치(價値)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흘 동안을 방에 들어앉아 온전히 성사(聖事)를 준비(準備)하는 데에만 전념하였고, 신부(神父)는 그녀가 성사(聖事)를 받을 자격(資格)이 있다고 판단(判斷)하였으므로, 이순이(李順伊) 누갈다는 자기의 원을 채울 수가 있었다.
그때부터 그녀가 마음을 쓴 것은 오직 성체(聖體)의 효과(效果)를 보존(保存)하는 것이었고, 그녀의 유일(唯一)한 원은, 자기의 영혼(靈魂)을 모든 덕행(德行)으로 꾸미는 것이었고, 얼마 후에는 그녀의 천상배필(天上配匹)의 은총(恩寵)을 남김없이 끌어오기를 염원(念願)하여, 그분에게 자기의 동정(童貞)을 바치기로 결심(決心)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가로 놓여 있었다.
③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조선(朝鮮)에서는 어떤 사회계급(社會階級)에서도 처녀(處女)를 시집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듣지 못하는 일이다. 특히 품위(品位)있는 계급의 집안의서는 그것은 하나의 범죄(犯罪)에 가까운 일이며, 이 점에 있어서 일반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위험(危險)한 일이다.
구세주(救世主)께서 친히, 당신의 사랑하시는 여종(女從)을 도우러 오셔서 그녀에게 마음에 드는 남편(男便)을 마련하여 주셨다. 문제를 익히 검토(檢討)한 후에 이순이(李順伊) 누갈다의 계획(計劃)을 승인(承認)한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역시 하느님께 자기를 온전히 바치기 위하여 동정(童貞)을 지키기를 원하는 한 젊은이를 알고 있었다.
그는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의 맏아들 유중철(柳重哲) 요한이었다. 유중철(柳重哲) 요한의 집안은 비록 양반(兩班)이었고, 매우 부유(富裕)하였으나,
그래도 이순이(李順伊) 누갈다의 집안에 비하면 훨씬 낮았다. 게다가 전라도(全羅道) 전주(全州) 부근 초남(草南), 즉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큰 양반들이 별로 자리잡지 않는 지방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주문모(周文謨) 신부는 혼배(婚配)라는 외관(外觀) 속에 이 두마음을 결합시켜, 그들 서로의 뜻대로 남매(男妹)로 지내는 것을 허락(許諾)할 수 있도록 일을 마무리하는데 성공(成功)하였다. 과부(寡婦)인 이순이(李順伊) 누갈다의 어머니가 기꺼이 동의(同意)하여 혼인(婚姻)은 결정되었다.
④ 그런 다음 유관검(柳觀儉)은 이 같은 계획(計劃)을 실행(實行)하는 데 쓰일 비용(費用)
을 충당(充當)하기 위하여, 돈을 냈다는 사람들 중의 몇 사람도 밀고하였다.
그 이름 중에는 신부(神父)가 조선(朝鮮)에 들어올 때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천주교
를 신봉(信奉)하지 않게 되었던 이승훈(李承薰)의 이름과, 천주교인들과는 일찍이 관
계(關係)를 맺은 적이 없는 이가환(李家煥)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필자(筆者)는 유관검(柳觀儉)이, 살아있는 교우(敎友)들을 아끼느라고, 자기가 알거
나 혹은 꾸며서 말한 사실(事實)의 가증(可憎)스러운 점을 모두 이미 처형(處刑)된 이
사람들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였든지, 혹은 그보다 더 그럴만한 해석(解釋)으로는 이
나라의 재판(裁判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처럼, 관리(官吏)들이 제 멋대로 근거(根據) 없
는 고발(告發)을 강제로 끌어냈든지 한 것으로 생각된다.
⑤ 2월 26일 처형(處刑)된 중요한 교우(敎友)들 중 여러 사람도 이 공초(供招)에 포함되어
있다. 사건(事件)은 이리하여 점점 더 중대한 양상(樣相)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관
리(官吏)들은 서둘러 배교자(背敎者)들을 석방(釋放)하거나 귀양보내고, 가장 유력하
거나 가장 혐의(嫌疑)가 많은 약간의 피고(被告)는 서울로 보내 의금부(義禁府)의 판결
(判決)을 받도록 하였다.
이들 중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 그의 동생 관검(觀儉), 윤지헌(尹持憲), 김유산
(金有山), 이우집(李宇集), 한정흠(韓正欽) 스라다니슬라오, 최여겸(崔汝謙) 마티아, 김
천애(金千愛) 안드레아 밖에는 알려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세 사람은 외국인(外國人)을 불러오는 음모(陰謀)에 가담한 것 때문
에, 기소(起訴)된 것이 아니고, 오직 천주교를 신봉(信奉)한 것 때문에 기소된 것이었
다. 그러므로 그들의 재판(裁判)은 훨씬 빨리 끝났다. 필자(筆者)는 위에서 이들의 순
교(殉敎) 이야기를 한 바 있다.
⑥ 다른 5명의 피고(被告)는 그 밖에도 국가안전(國家安全)에 대한 음모(陰謀)로 기소되
었다. 그들의 소송예심(訴訟豫審)은 질질 끌었고, 따라서 공판(公判)과 신문(訊問)이
거듭되었다. 온 국민이 불안한 가운데에 이 중대(重大)한 사건(事件)의 결말(結末)을
기다렸다.
천주교의 적들과 남인(南人)의 적들은 모두가 일을 크게 벌이려고 앞을 다투어 법석
을 떨었다. 마침내 피고(被告)들을 역적(逆賊)으로 몰기로 결정되어, 9월 11일이나 12
일에 그들의 최후판결(最後判決)이 내려졌다.
그들은 사교(邪敎)를 믿고, 외국인과 통하여 정부(政府)의 의사(意思)를 강요(强要)
하기 위히여, 서양의 배를 불러들일 음모(陰謀)를 꾸몄다고 하여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 5인을 모두 그들의 출신 도의 수부(首府)인 전주(全州)로 압송(押送)하여,
백성들 앞에서 처형(處刑)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⑦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와 그의 동생 유관검(柳觀儉)과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
꼬는 참수(斬首)되고,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 이 형벌(刑罰)은 머
리를 자른 뒤에 4지(四肢)를 잘라내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동체(胴體)와 합하여 여섯
토막이 되는 것이다. 김유산(金有山)과 이우집(李宇集)은 참수(斬首)만 당하게 되어 있
었다.
그러므로 이들을 즉시 전주(全州) 읍으로 보냈고, 9월 17일(10월 24일) 감사(監司)는
판결(判決)을 하나하나 그대로 집행(執行)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 각자의 가족(家
族)들은 법의 보호(保護)에서 제외되었고, 이런 경우의 관례(慣例)를 따라 그들의 집고
재산(財産)은 모두 적몰(籍沒)되었다.
⑧ 유관검(柳觀儉)은 그때 34세였다. 그가 죽기 전에 자기의 배교(背敎)를 철회(撤回)하
고, 자기가 끼친 모든 불행(不幸)에 대하여 용서(容恕)를 비는 행복(幸福)을 가졌는지
는 알 수가 없다.
필자(筆者)는 위에서, 일반적인 견해(見解)에 따르면, 전에 천주교를 신봉(信奉)하
고, 온 도내에 그것을 전파(傳播)하는 데 그렇게도 열성적(熱誠的)이었던 사람, 그의
형이며 가장이던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가 맨 처음에는 다른 세 사람과 마찬가
지로, 배교(背敎)하는 표를 보여주는 나약(懦弱)함을 가졌었다는 말을 한 바 있다. 그
러나 그들의 고통(苦痛)이 무익하지 않아, 마지막 순간에 자기들의 피로 자신들의 죄를
씻는 은총(恩寵)을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유항검(柳恒
儉) 아우구스띠노는 46세의 나이로 죽었다.
⑨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꼬는 이 나라에서 최초의 순교자(殉敎者) 중의 하나인 윤지충
(尹持忠) 바오로의 아우였다. 형이 죽은 다음 그는 고향(故鄕)을 떠나 고산(高山) 고을
제구리로 가서 살면서, 진심으로 천주교를 계속 신봉(信奉)하였다.
재판(裁判)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자기의 책을 감추어 둔 곳을 댔고, 특히 이러한 사
정으로 인하여 그가 신앙(信仰)에 꾸준하였는지를 의심하게 되었다. 형벌(刑罰)이 심
하여 그는 유관검(柳觀儉)이 진술한 것처럼, 교우들이 서양의 배를 불러 오려고 하였다
는 자백(自白)도 하게 되었다.
그가 처형(處刑)당할 때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그의 아내는 거제도(巨濟島)로 귀양
을 가서 1828년에 죽었다. 그의 세 아들도 여러 섬으로 귀양을 갔는데, 그 중 하나는 오
늘까지도 살아 있다는 말이 있다.
⑩ 성(姓)과 본명(本名)을 알 수 없는 이우집(李宇集)은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의
집안과 인척(姻戚)간이었다. 그의 생애(生涯)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끝으로 김유산(金有山)응 중인(中人)으로서 유씨(柳氏)집안과 다른 교우(敎友) 집안
들의 심부름을 하느라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었다. 그는 또 북경(北京)을 왕래하며 편
지(便紙)를 가져가기도 하고 가져오기도 한 것 같다. 이것 때문에 그는 소위 음모사건
(陰謀事件)에 연루되었다. 그의 본명(本名)은 토마스였던 것 같다. 그가 참수(斬首)당
하였을 때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⑪ 이제 이 모든 사건(事件)에 대한 필자(筆者)의 의견(意見)을 말해야 한다면, 필자는 확
실(確實)한 근거(根據)위에 무함을 쌓아 올린 것으로 생각한다. 확실한 사실(事實)은
교우들이 서양 그리스도국들의 사신(使臣)을 통하여 박해(迫害)를 멎게 하기 위한 평
화적(平和的)인 개입(介入)을 원하고 또 간청(懇請)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 자신이 계획을 북경주교(北京主敎)에게 설명하는
것을 본 바 있다(本稿 70쪽 참조). 사실(事實)과 다른 것은,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
와 그와 함께 공범자(共犯者)로 단죄(斷罪)된 사람들이, 외국의 침입을 이용하여 조선
정부(朝鮮政府)의 전복(顚覆)을 꾀하였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어떠한 증거(證據)도 절대로 없었고, 목도(目睹)한 증인(證人)들의 입에서
얻은 수많은 상세한 사정도, 이 문제에 대하여 털끝만한 의심도 남겨줄 수 없다. 문제
(問題)가 된 돈은 선교사들의 개인비용(個人費用)과, 이따금 북경(北京)으로 파견되는
교우(敎友)들의 비용(費用)에 사용하기로 된 것이었다. 곤장(棍杖)이나 그 밖의 고문
(拷問)으로 얻어낸 여러 가지 고백(告白)과 밀고(密告)는 거기에 어떤 가치(價値)를 부
여한다는 것이 유치(幼稚)한 일일 것이다.
⑫ 다른 사실, 즉 다른 재판(裁判)과 다른 형벌(刑罰)의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지금 이
야기하려고 하는 사건(事件)들의 일부분이, 몇 달 뒤에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여기
에서 유씨(柳氏) 집안의 이야기를 보충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는 연세가 매우 많은 어머니와, 아내와 여섯 자녀를 두고
죽었다. 이순이(李順伊) 누갈다와 결혼한 맏아들 유(柳)「종선」중철(重哲) 요한, 얼마
전에 결혼하였으나 아직 시집으로 가지 않은 딸인 둘째, 총각으로 있는 셋째 유(柳)
「문철」(文碩) 요한, 그리고 9세, 6세, 3세 된 나머지 세 아이가 있었다.
이 외에 천주교가 조선에 전파(傳播)되기 전에 죽은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의
형의 아들 유중성(柳重誠) 마테오가 있었는데, 이 젊은이는 15세 내지 18세로, 그 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