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제 4 장 황사영(黃嗣永) 백서사건(帛書事件)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제 4 장

황사영(黃嗣永) 백서사건(帛書事件)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의 순교 - 북경주교(北京主敎)께 드린 그의 편지

- 조선왕이 중국 황제(中國皇帝)에게 보낸 편지와 황제의 답서(答書)

1.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의 순교

①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동료(同僚)들의 처형(處刑)이 있은 지 11일 뒤, 즉 9월 29일, 이미 자주 말한바 있는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이 제천(堤川) 지방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押送)되었다.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은 비록 나이는 젊으나, 그때 조선천주교회의 가장 영향력(影響力)있는 지도자(指導者) 중의 하나로 여겨졌었는데, 그것은 또한 옳 은 일이었다. 그의 출생(出生)과 가문(家門)과 공로(功勞)로, 또한 드물게 보는 그의 재능(才能)과 덕행(德行)으로, 그는 일반의 존경(尊敬)을 얻었었다.

② 그는 반명(班名)과 일가 중의 여러 사람이 자주 지낸 일이 있는 높은 관직(官職) 으로 나라 안에서 유명(有名)하게 된 남인(南人)의 대가(大家) 중의 하나에서 태 어났다. 영혼(靈魂)과 육신(肉身)의 가장 훌륭한 자질(資質)을 타고난 그는, 어려 서부터 문학(文學)과 과학(科學)에 빠른 진보(進步)를 이룩하여, 모든 동료(同僚) 들 중에서 단연 뛰어났었다.

17세 때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왕이 그의 비상한 재능(才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불러들여, 얼마 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크게 후대(厚待)하여, 친애하는 표로 손목을 잡기까지 하였으며, 그를 떠나보내며 이 렇게까지 말하였다.

󰡒네가 20세가 되거든 곧 나를 만나러 오너라.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너에게

일을 시키고 싶다.󰡓

특히 왕이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자기의 가족(家族)이나 국사(國事)를 논하기 위 하여 대신(大臣)들하고밖에는 관계를 갖지 않으며, 우리네 관습(慣習)에서 허용 (許容)되는, 점잖고 고상한 그 친숙(親熟)을 결코 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는, 그 러한 것은 비상(非常)한 특전(特典)인 것이다.

그리하여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은 그때부터 왕의 손이 닿은 영광(榮光)을 가지 이 손을, 보통 사람은 마구 만질 수 없다는 것을 표시하기위하여, 손목을 명주로 늘 감고 다녔다.

③ 그러니까 모든 것이 그의 빛나는 장래(將來)를 미리 내다보게 하였는데, 그때 그 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유명한 가문(家門)인 마재 정씨(丁氏)집 딸과 혼인(婚姻)하여, 처음으로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즉시 열성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였으며, 이후부터는 구원(救援)의 학문 (學問)이 아닌 다른 학문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세속(世俗)과그 위험 (危險)한 쾌락(快樂)들을 버렸으며, 자기가 받은 빛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열성적(熱誠的)인 회장(會長)이 되었다.

외교인(外敎人)인 그의 부모와 친척과 친구들이 그를 꾸짖고 나쁘게 대했으나, 그의 꾸준한 마음을 흔들 수는 없었다. 더욱 높은 야심(野心)에 불타있던 만큼, 왕의 총애(寵愛)와 약속(約束)도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影響)을 주지 못했다.

왕은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의 입교소식(入敎消息)을 듣고 몹시 슬퍼했으 나, 조금도 그를 불안(不安)하게 하지를 않았으니, 그의 드물게 보는 자질(資質) 을 그만큼 존중(尊重)하였던 것이다. 어쩌면 한 젊은이가 이 세상의 영화(榮華) 를 그렇게 영웅적(英雄的)으로 경멸(輕蔑)하는 것을 보고서 감동(感動)하게까지 되었는지도 모른다.

④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은 더 위대한 임금을 섬기기에 마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성사(聖事)를 받을 수 있게 되자 그의 열심은 한이 없었으며, 있는 힘을 다하여 신부(神父)의 성직수행(聖職遂行)과 다른 온갖 착한 일을 도와드렸다.

1798년과 1799년에 서울로 올라와서 왜오개(서울 아현(阿峴)지방)라는 동네 에서 살았다. 거기에서 그는 교우집 젊은이 몇 명에게 글을 가르치고, 신심서 적(信心書籍)을 베끼는 일을 하였다. 그는 자주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집에 모 셨었는데, 그것은 그를 숨기기 위함이기도 했고, 다른 신자(信者)들에게 성사 (聖事)를 받게 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박해(迫害) 초부터 이름이 지적되어 고발(告發)을 당하자 그는

󰡒당신들이 박해를 당하거든 다른 읍내로 피하시오.󰡓

하신 구세주(救世主)의 권고(勸告)를 생각해내고,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하였다. 그는 발각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선 길고 보기 좋은 수염(鬚髥)을 잘랐는데, 이런 수염은 조선(朝鮮)에서는 꽤 드문 남성적(男性的) 장식(裝飾)이어서, 그런 수염을 가진 사람들은 자연히 그것을 매우 아낀다. 그는 변장(變裝)하는 데 아주 안성맞춤인 상복(喪服)을 입었다. 그런 다음 이런 주의(注意)도 부족한 것을 깨 닫고는 2월 보름쯤에 서울을 떠났다.

⑤ 그는 얼마동안 경상도(慶尙道) 예천(醴泉) 고을에 머물렀다가, 강원도(江原道) 접 경(接境)으로 옮겼고, 마침내 제천(堤川)고을 배론 동네 옹기점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일꾼들은 모두가 교우(敎友)들이었다. 그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일종의 지하실(地下室)을 만들고, 그리로 통하는 길은 그 옹기점(甕器店)에서 만드는 큰 옹기그릇으로 덮었다.

동네에 있는 천주교인들까지도 그가 와 있는 것을 오랫동안 알지를 못했다. 오직 집주인과 그의 아내, 그리고 한(韓) 그레고리오의 어머니만이 비밀(秘密)을 알고 있었고, 이 부인(婦人)이 그를 만나러 자주 왔었다.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은 김한빈(金韓彬) 베드로와 황심(黃沁) 토마스라는 믿을만한 두 사람을 데리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이리저리 다니며 소식(消息) 을 알아다가 박해(迫害)의 추세를 그에게 알려주고, 교우집단(敎友集團)에 관계 되는 중요(重要)한 사건(事件)들을 그에게 보고(報告)하였다.

김한빈(金韓彬) 베드로는 내포지방(內浦地方) 홍주(洪州) 고을 출신으로,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군인(軍人) 노릇을 하였고, 그것 때문에 김포수(金砲手)라는 별명 을 가지게 되었으니, 어떤 때에는 그를 이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8월에 그는 한 번 포졸(捕卒)에게 붙잡혔으나, 탈출(脫出)에 성공하였다.

황심(黃沁) 토마스는 내포지방(內浦地方) 덕산(德山) 고을 용머리 사람이었다. 양가(良家)의 자손이며, 1799년에 순교(殉敎)한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코의 누 이와 결혼(結婚)한 황심(黃沁) 토마스는, 온전히 신부(神父)의 시중을 드는데 헌 신(獻身)했던 것 같다.

그는 여러 번 북경(北京)을 내왕(來往)하여,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시키는 여 러 가지 심부름을 늘 조심성 있고 충실(忠實)하게 하였었다.

⑦ 배론의 은신처(隱身處)에서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은 북경주교(北京主敎)께 드 리는 긴 편지(便紙)를 썼다. 모든 면으로 귀중(貴重)한 이 문헌(文獻)은 다행히도 보존(保存)되었다.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은 이 편지(便紙)에서 우선, 이번 박해(迫害)의 첫 번 째 순교자(殉敎者)들의 내력(來歷)을 자세히 기록(記錄)하였는바, 그의 정보(情 報)는 일반적으로 정확(正確)하다. 그러나 몇 가지 점에 있어서는 그 자신이 충 분한 정보(情報)를 얻지 못하였다고 고백(告白)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筆者)는 이 역사(歷史)를 쓰면서, 그것을 검토(檢討)하고 다른 문 헌(文獻)과 비교하여 본 후, 그가 풍문(風聞)만 가지고 너무 경솔(輕率)하게 제시 한 사실(事實)들은 버려야만 하였다. 그의 편지 후반부(後半部)에서 그는 조선 천주교회의 비참(悲慘)한 현실(現實)을 설명하고, 주교(主敎)께 웅변적(雄辯的)인 호소(呼訴)를 하여, 그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조선교회(朝鮮敎會)를 그 폐허 (廢墟)에서 끌어내도록 힘써 주십사고 청하였다.

필자(筆者)는 여기에 그 편지(便紙)의 꽤 긴 부분을 소개(紹介)하는 바인데, 이 것은 박해말경(迫害末境)에 천주교인들이 처하여 있었던 물질적(物質的) ․ 정신 적(精神的) 가치(價値)를 알게 해 줄 것이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제 4 장 황사영(黃嗣永) 백서사건(帛書事件)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