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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2. 그리스도의 어린시절(5)

[그리스도의 생애] - 2. 그리스도의 어린시절(5)


나자렛

이 기사는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소년시절에 관한 유일한 사건이다. 그 후 18년간 그리스도는 나자렛에서 살았다.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 (루가 2, 51)

혹시라도 인격적인 독립을 주장할 만한 어떤 아들이 있다면 (특히 성전에서 강력하게 주장한 후로) 그것은 그리스도다. 그러나 인간적인 순종을 성화시키고 모범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리고 인간의 불순명을 보상하기 위하여 누추한 집에서 부모님께 순종하며 살아오셨다.

이렇다 할 사건이 없던 18년 동안 예수는 나자렛에서 집들의 납작한 지붕들을 고쳐 주었으며 농부들의 수레를 수선해 주었다. 하찮고 천한 일들 하나 하나 모두가 아버지의 일에 속하는 것이었다. 하느님 인간의 인간적인 발달이 마을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조차도 그들 가운데 계시는 그분의 위대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주께서 당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복종하신다는 것은 자기부정이요 무욕이기에 그것은 참으로 자신을 "낮추는" 일이었다. 예수는 목수일을 직업으로 하였다. 18년 후에 이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묻게 될 것이다.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마르코 6, 3)

순교자 유스티노는 성전(聖傳)에 근거하여 우리 주께서는 이 기간 동안 쟁기와 멍에를 만드시며 당신이 평화스럽게 수고하여 만드신 물건들을 통해 의로움을 가르치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지혜가 성장하였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본 바와같이, 신성(神性)에 대한 그리스도의 의식이 성장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셨기 때문에 인간의 성장법칙을 그대로 따르셨다. 인간의 지능과 의지를 가지셨기 때문에 이러한 기능이 인간답게 발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경험적인 지식의 발달은 특히 환경의 영향을 받은 것같다. 그리스도께서 비유법에 사용하신 많은 비교들을 당신이 전에 살던 세계에서 끌어오신 것이다. 부모를 통해서 일상적인 아라메아어를 배웠으며 물론 전례상의 히브리어도 배웠다. 그리스어도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 그 당시에는 어느 정도 그리스어가 갈릴애아에서 통용되고 있었으며, 최소한 그리스도의 친척 가운데 두 사람인 야고보와 유다는 분명히 그리스어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유다는 나중에 그리스어로 서간을 썼다.

그리스도는 훨씬 발달된 인간의 지능을 요하는 목수 일을 배웠다. 나중에 그는 성서와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 때문에 랍비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은 읽어보지 못했습니까?" 라는 말로 토론을 시작함으로써 성서에 대한 지식을 과시하였다. 그리스도의 가족과 회당, 주위 환경, 그리고 자연 자체까지도 그의 인간적인 지성과 의지에 어느 정도 공헌하였다. 그리스도는 인간 지성과 인간 의지를 다 가지고 계셨다.
인간 지능이 없이는 인간적인 실험지식이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며, 인간 의지가 없었더라면 보다 높은 의지에 순종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둘은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지식을 창출하셨고 또한 하느님으로서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셨다. 바로 이것이 요한이 "말씀" 으로 묘사하고 있는 바다. 말씀은 하느님의 지혜나 생각, 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맺고 있는 절친한 관계는 단순히 기도나 묵상으로 얻어지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이런 관계는 누구든지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아버지와의 관계는 하느님과 본성이 동일하다는 데서 나오는 관계이다.

인간의 가장 일반적인 죄는 교만이나 허영심이기 때문에 그러한 교만을 보상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것은 적절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보상을 얻을 목적으로나 아니면 장래의 명성을 쌓기 위해 순종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미 아버지의 사랑을 한껏 누리고 계셨다. 이렇게 아버지의 사랑을 충만히 누리고 있기 때문에 어린이와 같이 순진하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던 것이며, 십자가에 자신을 내주었던 것이다. 올리브 동산의 고뇌에 들어가기 한 시간 전쯤에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세상의 권력자가 가까이 오고 있다.
그가 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대로 실천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 자, 일어나 가자." (요한 14, 30-31)

그리스도의 어린시절의 행실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순종이었다. 그것을 하늘의 아버지에 대한 순종이요 지상의 부모에 대한 순종이었다. 그리스도는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의 기반을 하느님에게 순종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부모들은 자식들도 자기들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게 된다. 그리스도의 전 인생은 순종이었다.
그리스도는 필요하지도 않았지만 요한의 세례를 받았으며, 아버지의 아들이기에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었지만 세금을 내었으며, 제자들에게는 카이사르에게 복종하도록 명하였다. 갈바리아는 베들레헴에 그림자를 드리웠으며, 이제는 나자렛에서 보낸 순종의 세월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하느님이시면서도 피조물에 순종하실 때, 그리스도는 최후의 순종, 십자가의 굴욕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하셨다.

삼일 동안 행방불명이 된 일이 있은 다음의 18년 동안 우주를 만들었던 그리스도는 나무를 가지고 만드는 목수로 일하셨다. 가게에 있는 낯익은 못들과 대들보가 미구에 자신을 고문하는 형구(刑具)가 될 것이며 나무에 자신이 못박히게 되는 것이다. 삼 년 동안의 짧은 전교활동을 위해 이렇게 오랫동안 준비를 해야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누구나 궁금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성(人性)이 완숙한 나이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완벽한 제물을 바치고자 하심에서였을 것이다. 농부는 밀이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잘라서 방앗간에 보낸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성이 가장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매력의 정점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원숙한 경지에 이른 다음에야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자들의 망치와 살아있는 하늘의 빵을 잘라내는 낫에 자신을 내맡기실 것이다.

갓 태어난 어린양은 결코 제물로 바치지 않는 법이며, 막 피어나려는 장미를 친구에게 축하의 뜻으로 보내기 위해 꺽지는 않는 법이다. 각 사물은 원숙한 상태에 이르는 때가 있는 법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시간을 정할 수 있는 어린양이셨으며, 잘라낼 때를 고를 수 있는 장미였기 때문에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나이와 은총과 지혜가 성장하는 동안 인내와 겸손과 순종 속에서 기다리셨다. 때가 되면 그리스도는 "지금이 당신의 때이옵니다." 고 말하실 것이다. 그러면 가장 잘익은 밀과 가장 붉은 포도주가 가장 훌륭한 제물이 될 것이다.

요한 세례자

삼십 년 동안의 경이로운 침묵의 생활은 단 한 번 성전에서의 단순한 사건으로 깨뜨려졌을 뿐이다. 이제 사생활에서 공생활로 넘어갈 때가 오고 있다. 그것은 세계를 뒤흔들 사건이었기 때문에 루가는 주님의 선구자인 요한 세례자의 출현을 로마의 폭군 티베리우스의 제위(帝位)와 연관지우고 있다. 나중에 로마의 역사가로서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하게 될 플리니(Pliny)는 아직 네 살 먹은 어린이었으며, 나중에 자기 아들 티토와 예루살렘을 정복할 베스파시안(Vespasian)은 아홉 살이었다.
그 당시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은 제르마니꾸스(Germanicus) 딸의 결혼식이었는데, 이 딸은 9년 후에 그리스도 신자들을 크게 박해할 네로를 낳았다. 이렇게 비교적 평화를 누리던 로마시대에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당시에 대사제는 안나스와 가야파였다. 바로 그 무렵에 즈가리야의 아들 요한은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루가 3, 2)

요한은 낙타털로 만든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두르고 광야에서 홀로 살고 있었다. 음식으로는 메뚜기와 야생꿀을 먹었다. 요한의 모습은 엘리야를 닮았으며, 요한은 엘리야의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앞장을 서야 했다. 요한은 극기를 설교하였기 때문에 스스로도 그것을 실천하였다. 요한이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해야 할진대 죄를 회개하는 의식을 깨우쳐주어야 했다. 요한이 극심한 고행주의자가 된 것은 세상의 죄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과 공무원, 농부 및 그의 말을 듣게 될 사람들에게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맨 처음의 경고의 말은 모든 사람에게 생활을 바꾸라는 것이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세속적인 태도를 버려야 하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위선과 독선을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찾아오는 사람은 누구나 회개하여야 한다.

유대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요한이 자기가 선포하는 앞으로 오시게 되어 있는 그분이 정치적 해방자라고 약속했더라면 틀림없이 인기를 끌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속적인 사람이 쓰는 방법일 것이다. 요한은 무력에 호소하기보다는 죄의 보상을 요구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해서는 안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돌에서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나오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 올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하는 말은 아예 하지도 말라. 사실 하느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루가 3, 7-9)

수세기 전에 이사야는 심부름꾼이 메시아보다 먼저 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서, "이제 내가 일꾼을 너보다 먼저 보내니 그가 네 갈 길을 미리 닦아 놓으리라"하였고, 또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하고 선포하였다. (마르코 1, 2-4)

이사야 다음으로 삼백 년 후쯤에 말라기 예언자는 이사야가 예언한 선구자는 엘리야의 정신을 가지고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엘리야가 어른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 자식들의 마음을 어른들에게 돌려 화목하게 하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세상을 모조리 쳐부수지 아니 하리라." (말라기 4, 5-6)

어느 나라나 국가의 원수가 다른 나라를 방문하고자 할 때에는 "미리" 사신을 보낸다. 마찬가지로 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고 그리스도의 통치와 정부의 상태를 선포하도록 파견되었다. 요한은 그에 관한 예언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메시아임을 부인하고 자기는 다음과 같은 사람일 뿐이라고 말했다.

요한은 그제야 "나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오" 하고 대답하였다. (요한 1, 23)

요한은 자기 사촌인 메시아를 만나기도 전에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선포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마르코 1, 7-8)

요한은 주님의 신발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치 못한 자라고 생각하였지만 주님은 요한보다 더 겸손하게 사도들의 발을 씻어 주실 것이다. 요한의 위대성은 왕의 행차를 앞서 가며 "그리스도가 오셨다" 고 외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다.

요한은 말만이 아니라 상징도 사용하였다. 죄를 없애는 중요한 상징은 물로 씻어주는 것이었다.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베풀고 있었지만, 그의 세례로 죽은 영혼을 살리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요한은 자기가 주는 세례와 나중에 그리스도께서 베푸실 세례는 다르다고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세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드시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마태오 3, 12)

요한과 예수께서 요르단 강에서 만나던 날, 요한의 마음 속에는 충심으로 존경하는 겸손이 일어났다. 요한은 구세주가 필요함을 느꼈으며 주께서 그에게 세례를 베풀어달라고 부탁하였을 때 요한은 마지못해 세례를 주었다. 요한은 회개를 고백하고 죄사함을 약속해주는 의식을 주님께서 따르심은 부당하다는 것을 즉시 알았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십니까?" 하며 굳이 사양하였다. (마태오 3, 14)

어찌 죄없는 그분에게 세례를 줄 수 있었겠는가? 요한이 예수께 세례를 베풀기를 거절한 것은 예수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은 예수께서 하자시는 대로 하였다. (마태오 3, 15)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목적은 예수께서 태어나신 목적과 동일한 것으로서 죄많은 인간과 하나가 되시기 위함이었다. 그분은 "죄인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고 이사야가 예언하지 않았던가? 사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대로 세례를 베풀어라. 너에게는 옳지 않게 보이겠지만, 실은 내가 온 목적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셨지만 개인적인 위격(Person)으로서가 아니라 죄많은 인류의 대표자로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요한을 찾아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각기 자기 죄를 고백하였지만, 주님은 그러한 죄고백을 하지 않으신 것이 분명하며 요한도 예수께서 그럴 필요가 없으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해야 할 죄가 없었으며 씻어야 할 죄도 없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죄인과 자신을 동일시하였다.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러 요르단 강으로 들어가셨을 때 스스로 죄인과 하나가 되셨다.

무죄한 자는 죄인의 짐을 나눠질 수가 있다. 만약 어떤 남편이 죄를 지었는데 그 부인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거나 그녀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개인적인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셔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도 불합리한 소리다. 만일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 (人子)라고 부를만큼 인간과 하나가 되고자 하셨다면 인간의 죄까지도 같이 나누셔야 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준 세례의 의미였다.

오래 전에 예수께서는 반드시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신다. 그것은 인류의 구원이다. 그리스도는 당신 백성과의 관계, 즉 그들을 위해 파견되셨음을 말씀하신다. 열두 살 때 성전에서는 당신의 기원(起源)에 대해 강조하였고, 이제 요르단 강에서는 당신 사명의 본질을 강조하신다. 성전에서는 신적인 위임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요한의 손으로 깨끗이 씻김을 받으신 예수께서는 인류와 하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신다.

나중에 복되신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요한때까지는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였다.
그 이후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데 누구나 그 나라에 들어 가려고 애쓰고 있다." (루가 16, 16)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오랜 세월이 메시아의 오심을 충실히 증거해 왔으나,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려 새로운 장 (章) 이 기록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제부터 예수께서는 죄많은 민중들과 하나가 되실 것이다. 이제부터 그분은 죄의 희생자들 가운데서 생활하시며 그들에게 봉사하실 것이다. 비록 아무런 죄가 없으시면서도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죄인으로 고발을 당하실 것이다. 마치 당신의 본성이 죄에 물들어 있기나 하는 것처럼 어렸을 때 할례를 받으셨으며, 지금은 조금도 정화가 필요없으시면서도 세례를 받으신다.

구약시대에는 세 가지 유형의 "세례"와 유사한 의식이 있었다. 첫 번 째 의식은 물의 "세례"였다.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을 장막의 문으로 데려와서 물로 씻어 주었다. 그 다음에는 바로 기름의 "세례"가 있었다. 모세는 그들을 축성하기 위해 아론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부어주었다. 마지막 세례는 피의 "세례"였다. 모세는 봉헌할 숫양의 피를 가지고 아론의 오른쪽 귀와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 발가락에 묻혔다. 이 의식은 점진적인 축성을 뜻하였다. 이 세 세례와 상응하는 것은 요르단과 변모와 갈바리아이다.

요르단의 세례는 당신께서 나중에 말씀하실 수난의 세례의 전주곡이었다. 이 후 당신의 세례에 대해서는 두 번 언급하셨다. 첫 번째 언급은 요한과 야고보가 주님의 왕국에서 주님의 좌우에 앉을 수 있는지 물었을 때였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그리스도는 당신이 받으실 세례를 받을 각오가 되었느냐고 물으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물의 세례는 피의 세례를 예고하고 있다. 요르단 강물은 갈바리아의 붉은 강물로 흘러 들어간다. 두 번 째로 당신 세례를 언급하신 것은 사도들에게 말씀하실 때였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 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 (루가 12, 50)

요르단의 강물 속에서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하나가 되셨으며, 죽음의 세례를 받으실 때는 인간들의 죄의 짐을 전부 지신다. 구약성서에서 시편작가는 "깊은 물 속에 들어감"을 고통의 상징으로 말하고 있다. 고통과 죽음을 적절하게 세례로 묘사하였다.

이제 십자가는 그의 생각 속에 점점 더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음이 틀림없다. 십자가는 예수께서 나중에 생각해낸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요르단 강물 속에 잠시간 잠기신 것은 다시 물속에 떠오르기 위해서였다. 마찬가지로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시어 무덤에 묻히심으로 잠기신 것은 영광스럽게 부활하시어 다시 떠오르기 위해서였다. 예수께서는 열두 살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을 선포하였지만 지금은 자신을 봉헌할 준비를 하신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시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오시는 것이 보였다. (마태오 3, 16)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인간성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유대가 된다. 예수를 영원한 아버지의 사랑스러운 아들이라고 선포한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새로운 사실을 선포하거나 복된 주님의 새로운 친자성(親子性)을 선포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영원으로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바야흐로 하느님과 인간의 중개자로 공적으로 드러나게 될 친자성의 엄숙한 선포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스 원어로 부정(不定) 과거시제로 되어 있는 아버지의 기쁨은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스럽게 관조하는 영원한 행동을 나타내는 것이다.

창조할 때와 대홍수가 끝난 후에 물에서 땅이 솟아나오듯이, 모세와 그의 백성이 홍해의 물로부터 빠져 나왔던 것처럼 물에서 나온 그리스도는 비둘기 형상으로 나타난 성령에 의해 영광을 받으신다. 하느님의 영(靈) 이 비둘기 형상으로 나타난 것은 이 대목 뿐이다. 레위기에 의하면 봉헌자의 사회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은 수소를 바쳤고, 좀 가난한 사람은 어린양을 그리고 극히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를 바치는 특권을 받았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주님을 성전에 데려왔을 때 봉헌한 것은 비둘기였다. 비둘기는 온순과 평화의 상징이지만 특히 가장 미천한 사람들이 드릴 수 있는 희생제물이었다. 히브리인들은 어린양이나 비둘기를 생각할 때마다 곧 바로 죄에 대한 희생제물을 연상하였다.

따라서 주님 위에 내리신 성령은 그들이 볼 때 순순히 희생제물이 되는 상징으로 보았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고통의 바다 속에 잠길 것을 예상하는 세례를 통해 이미 상징적으로 인류와 하나가 되셨지만 지금은 성령의 강림으로 그리스도는 영광을 받으시고 희생제물로 봉헌되고 축성되셨다. 요르단 강물은 그리스도와 인간을 결합시켰으며,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해주고 희생제물로 봉헌하였으며, 하늘에서 들려 온 목소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영원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구약시대에 뿌려진 삼위일체 교리의 씨앗이 여기에서 계시되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씨앗들은 점점 더 명료해 진다. 즉 아버지는 창조자며, 아들을 구세주요, 성령은 성화자(聖化者)시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너는 내 아들이다"고 하신 말씀은 천여 년 전 메시아에게 예언적으로 언급한 말씀으로 두 번 째 시편에 실려 있다.

나를 왕으로 세우시며 선포하신 야훼의 칙령을 들어라.
"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 (시편 2, 7)

복되신 주님은 나중에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요한 3, 5-6)

요르단 강의 세례로 주님의 사생활이 끝나고 공적인 전교생활이 시작된다. 주님께서 물속에 들어가실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 단순한 마리아의 아들로서였으나, 물에서 나오실 때는 영원으로부터 계시던 분, 즉 하느님의 아들임을 밝혀 주고자 하셨다. 그리스도는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점에 있어서 인간을 닮은 하느님의 아들이셨다. 성령은 가르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에게 기름을 부으셨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2. 그리스도의 어린시절(5)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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