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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3. 십자가를 벗어날 수 있는 세 가지 지름길

[그리스도의 생애] - 3. 십자가를 벗어날 수 있는 세 가지 지름길


복되신 주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후 바로 홀로 은거생활로 들어가셨다. 광야가 모세와 엘리야의 학교였듯이, 이제는 주님의 학교가 된다. 은거란 행동을 위한 준비과정이다. 바오로에게도 광야는 행동을 위한 준비장소였다.
"예수님께서 들짐승과 함께 지내셨을 때" 인간적인 모든 위안을 뒤로하셨으며 사십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악의 세력과의 투쟁이었기 때문에 그분이 처음으로 직면한 것은 인간적인 교사와의 토론이 아니라 우두머리 악마와의 결전이었다.

그 뒤에 예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마태오 4, 1)

세례가 그분의 전교활동을 위한 적극적 준비활동이었다면 광야에서의 유혹은 소극적인 준비였다. 세례를 받을 때는 성령을 받고 그분의 사명이 확인되었지만 유혹을 받을 때는 시련과 단련을 통해 직접 의지가 강화되었다. 아무도 먼저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영광을 얻을 수 없다는 철칙(鐵則)이 있다. 투쟁하지 않는 사람에게 영광은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빙산이 북극의 한류에 떠있을 때는 그냥 빙산이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도 경이롭게 보지 않는다. 그러나 페르시아만의 난류에 빙산이 녹지 않고 떠다닌다면 우리는 경이와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만일 빙산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떠다닌다면 우리는 그 빙산이 인격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선택하는 행동이다.
말로만 사랑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아담이 받았던 최초의 시련을 모든 인간들이 계속 받아왔다.
심지어는 천사들조차도 시련을 당했다. 얼음은 차갑다고 해서 덕스럽다고 칭찬할 수 없고 불은 뜨겁다는 이유만으로 덕스럽다고 칭찬할 수 없는 것이다. 선택의 가능성을 지닌 자만이 그들의 행동에 대해 칭찬을 받을 수 있다. 유혹과 유혹에 의한 긴장에 의해서만 인격의 깊이가 밝혀지는 것이다.

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시련을 이겨 낸 사람은 생명의 월계관을 받을 것입니다. 그 월계관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야고보 1, 12)

저항을 받는 악이 강할수록 영혼의 방어력도 강한 것이다. 유혹이 있다는 것은 꼭 유혹을 받는 자가 도덕적으로 불완전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럴 경우 주님께서는 전혀 유혹을 받으실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악에 대한 내적인 경향성이 유혹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필연적인 조건은 아니다. 우리 주님께서 받으신 유혹은 외부에서만 일어난 것처럼 자연적인 욕구를 그릇된 방향으로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주님의 신적인 사명과 메시아의 활동을 무시하라는 호소였다. 외부에서 오는 유혹이 꼭 인격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유혹을 물리쳤을 때에는 더욱 더 거룩해질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만일 주님께서 인간의 표본이 되신다면 유혹을 이김으로써 성성(聖性)을 얻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셔야 할 것이다.

그 분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 주실 수 있으십니다. (히브리 2, 18)

유혹자는 죄많은 자였지만 유혹을 받으시는 분은 무죄하셨다. 세계의 역사 전체는 두 인물, 즉 아담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아담은 자기가 받은 지위를 지켜야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아담이 진 것은 인류가 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아담이 인류의 머리였기 때문이다. 어떤 통치자가 선전포고를 하면 시민도 스스로 명확한 선전포고는 하지 않았다하더라도 똑같이 선전포고를 한 셈이 된다. 아담이 하느님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인간도 역시 반기를 든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기로(岐路)에 서게 되었다. 아담이 받은 유혹이 반복되었다. 하느님께서 인성을 취하지 않으셨더라면, 유혹을 받으실 수가 없었을 것이다. 비록 한 위격체 안에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었지만, 신성이 인성에 의해 감소되지 않았으며, 인성도 신성과 결합했다 해서 균형을 잃어 버리지는 않았다. 주님께서는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같이 되고자 하셨다면 유혹에 저항하는 인간적인 체험을 하셔야 했다. 바로 이 때문에 히브리서는 주님께서 유혹을 받으심으로써 인간과 얼마나 가깝게 하나가 되셨던가를 깨우쳐주고 있다.

우리의 사제는 연약한 우리의 사정을 몰라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유혹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 4, 15)


하느님은 당신 섭리에 따라 당신이 사랑하는 자들을 유혹과 고통으로 완전한 자로 만드신다. 누구나 십자가를 지고 감으로써만이 부활에 이를 수 있다. 악마는 주님의 사명 가운데 바로 이 부분에 대해서 공격을 가했다. 유혹의 목적은 희생을 통한 구원사업으로부터 주님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사탄은 인간의 영혼을 구하는 방법으로써 십자가 대신에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세 가지 지름길을 제시하였다. 지름길 중 하나는 경제적인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기적에 바탕을 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오늘날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귀를 믿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마귀가 바라는 바다. 마귀는 자기가 죽었다는 소식을 유포시키는데 항상 협조적이다. 하느님의 본질은 실존이다. 하느님은 자기 자신을 "나는 있는 자다"라고 정의 하신다. 그러나 마귀의 본질은 거짓이며 마귀는 "나는 있지 않는 자다"라고 자신을 정의한다. 사탄은 자기를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이미 자기 편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당하는 유혹은 항상 세 가지 범주 가운데 하나에 속하기 때문에 분석하기가 아주 용이하다. 그러한 유혹은 육(肉)에 속하거나 (육욕과 탐식) 정신에 속하거나 (교만과 시기) 우상적인 물욕 (탐욕) 에 속하는 것이다. 인간은 일생 내내 이러한 세 가지 유혹으로 시달림을 받지만, 연령에 따라 그 유혹의 강도가 다르다. 젊은 시절에는 순결에 대해서 가장 많은 유혹을 받으며 육체에 대한 죄를 짓기 쉽다.

중년이 되면 육체적인 욕구가 점점 쇠퇴해가고, 정신적인 유혹이 지배하기 시작한다. 즉 과시욕이나 권력욕같은 유혹이 강할 때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 소유욕에 대한 유혹이 강하게 드러나는 경향을 보인다. 인생의 종말이 다가오기 때문에 인간은 현세의 재물을 축적하나 경제적인 안전을 배가시킴으로써 영원한 생활의 안전이나 구원에 대한 불안을 제거하려고 애쓴다. 젊은 시절에 육욕에 빠진 사람들이 노년기에는 물욕의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은 일반적인 심리학적 상식이다.

선한 사람은 악한 사람과 똑같은 식으로 유혹을 받지 않는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은 선한 사람과도 다르게 유혹을 받으셨다. 성서에서 말하는 대로 "다시 토해내고자 하는" 알콜중독자의 유혹은 물론 실제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성인이 느끼는 교만의 유혹과는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유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의 세례를 받음으로 죄없으신 분이 죄인과 하나가 되셨을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하신 일을 기억해야만 한다. 세례를 받으신 후 주님은 산으로 올라가시어 사십일 동안 단식하셨다. 복음서는 단식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배고프셨다"고 하는 전형적인 간소한 표현을 쓰고 있다.

사탄은 예수를 도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아주는 척하면서 예수를 유혹하였다. 예수께서 사람들 가운데서 당신의 숭고한 사명을 최선으로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문제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탄은 사탄식의 방법을 제안한다. 즉 죄같은 도덕적 문제나 그에 따른 보속을 무시해 버리고 세속적인 요소에만 완전히 몰두하는 것이었다. 세 가지 유혹 모두 주님께 십자가를 포기하고 따라서 구원을 단념하도록 설득하고자 하였다. 베드로는 나중에 똑같은 식으로 주님을 유혹하려고 하다가 그 때문에 "사탄"이란 말을 듣게 된다.

주님께서 취한 인간의 살은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투쟁을 하기 위해 취하신 것이었다. 사탄은 예수가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일지도 모르는 비범한 인물로 알아보았다. 따라서 사탄은 유혹을 할 때마다 조건부적인 "만일"을 서두에 달고 있다. 만일 사탄이 자기가 말을 거는 분이 하느님임을 확실히 알았더라면 유혹을 하려고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느님이 구원사업을 위해 선택하고 단순한 인간이라면 사탄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하느님께서 몸소 마련하신 길이 아니라 인간의 죄에 빠지는 길로 주님을 이끌고자 할 것이다.

첫 번째 유혹

주께서 배고프신 것을 알고 사탄은 둥그런 빵덩어리와 같이 조그마한 까만 돌맹이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유혹하는 자가 와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마태오 4, 3)

주님이 받으신 첫 번째 유혹은 사회 개혁자가 되어 돌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군중들에게 빵을 주는 것이었다. 정신적 개혁이 없이 사회를 개선시키겠다고 하는 환상은 역사상 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완전히 속아 넘어간 유혹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보실 때는 돌을 빵으로 만드는 것이 아버지를 올바로 섬기는 일이 아니었다. 인간에게는 밀떡보다 더 중요한 욕구가 있으며 든든한 배보다 더 큰 기쁨이 있다.

악령은 이렇게 말하였다. "경제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시작하라. 죄같은건 잊어 버려라!" 악령은 오늘도 같은 말을 다른 식으로 되풀이 하고 있다. "내 사자가 교실에 들어 가서 어린이들에게 하느님께 빵을 달라고 기도해보라고 시킨다. 그들의 기도에 아무런 응답이 없자 내 사자가 그들의 배를 채워준다. 독재자는 빵을 주지만 신은 빵을 주지 않는다. 세상에 신이란 없기 때문이다. 영혼이란 것도 없다. 오직 육체와 쾌락과 성욕과 동물성만 있을뿐이다. 우리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사탄은 여기서 주님께서 스스로 주장하신 신적인 위대성과 자신이 현재 처해 있는 궁핍한 상태가 심각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느끼게 만들려고 하고 있다. 악령은 주께서 치욕스런 인성과 시련과 굶주림을 포기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 능력을 자신의 인성을 구하고 군중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사용하라고 부추기고 있다.

악령은 주님께 인간으로서 그리고 인간의 이름으로 그만 행동하고 자신의 인성에 안락함과 편안함을 주고 시련에서 면제받을 수 있도록 초자연적인 능력을 써보라고 유혹한다.
한 때는 사막에서 모세가 그 백성을 위하여 신비롭게 상을 차려주셨던 하느님께서 굶주리시다니 이보다 더 어이없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요한이 말한 대로 주님께서는 돌멩이에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일으키실 수가 있으신데, 하물며 당신이 필요하시면 돌을 빵으로 만드실 수 없겠는가?
그러한 욕구도 사실이고, 만일 그 분이 하느님이실진대 그러한 능력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인류가 업보로 물려받은 온갖 불행과 고통에 당신의 인성을 예속시키실까?

왜 하느님은 단지 자신의 피조물을 구속하실 목적으로 그러한 굴욕을 감내하시는가?
"네가 주장한 대로 정말로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고 죄로 인한 파멸을 없게하러 왔다면, 우선 네 자신을 구해봐라."
이 말은 그리스도가 십자가형을 당할 때 사람들이 그에게 내뱉을 것과 똑같은 유혹이었다.

"성전을 헐고 사흘이면 다시 짓는다던 자야, 네 목숨이나 건져라.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 와 보아라" 하며 모욕하였다. (마태오 27, 40)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온갖 결점과 시련과 자기 부정으로 가득찬 인성을 받아들이면서도 하느님이 또한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마태오 4, 4)

이 말은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와 사막에서 유대인들을 먹인 구약성경의 기적사화에서 인용한 것이다. 주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인가 아닌가를 알고자 하는 사탄의 강렬한 호기심을 채워주시기를 거부하셨다. 그러나 하느님은 빵보다 더 위대한 것으로 인간을 먹이실 수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주님은 미구에 십자가에서 내려오기 위해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듯이 스스로 음식을 얻기 위해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굶주릴 것이며 주님은 굶주린 형제들을 결코 멀리 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은 인간이 되셨으며 마침내 당신의 영광의 순간이 도래할 때까지 인간의 모든 고통을 스스로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셨다.

주님은 인간은 배를 채워야 하고 사회 정의를 크게 외쳐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으셨지만 이런 것들이 우선적인 것이라고는 주장하지 않으셨다. 실상 주님은 사탄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너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종교를 가지라고 유혹하고 있다. 너는 내가 구세주가 아니라 빵장수가, 구속자가 아니라 사회 개혁가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너는 내가 십자가를 버리고 사람들의 영혼이 아니라 배나 채워주는 값싼 지도자가 되라고 유혹하고 있다.

너는 내가 안전으로 끝나는 대신에 안전으로 시작하게 하고 싶어한다. 너는 내가 내적인 성화(聖化)가 아니라 외적인 풍요를 가져오게 하고 싶어한다. 너와 너의 물질주의 추종자들은 '인간은 빵으로만 산다'고 말하지만 나는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한다. 물론 빵은 있어야 되지만, 빵까지도 인간에게 영양을 제공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나로부터 받고 있음을 기억하라. 내가 없는 빵은 인간을 해칠 수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이 없으면 진정한 안전이란 없다. 내가 빵만을 준다면 인간은 동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내 잔치상에 개가 맨 먼저 오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나를 믿는 자들은 비록 굶주리거나 힘이 없을 때나 감옥에 갇히거나 채찍질을 당할 때라도 그러한 믿음을 고수해야 한다."

"나는 인간의 배고픔을 알고 있다. 나도 사십일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지내보았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사람들의 배나 채워주는 단순한 사회 개혁가가 되기를 거부한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세상의 굶주림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내가 사회 정의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가난하고 굶주린 모든 인간과 함께 하는 자이다. 그 때문에 나는 단식을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은 배고픔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탄아 물러가라! 나는 한 번도 굶어본 적이 없는 한낱 사회사업가가 아니라 '사람들을 더 거룩하게 만들어 주는 일이 없이 물질적으로 더 부유하게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는 어떤 계획도 거부한다'고 주장하는 자다. 잘 기억하라! '빵만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 나는 사십일간 아무런 빵도 먹지 않았다!"

두 번째 유혹

주님에게 십자가와 구원을 포기시키고 오로지 빵만을 약속하는 "공산주의 대표자"로 만드는데 실패한 사탄은 이제 그리스도의 영혼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주님은 인간은 동물이나 위 (胃) 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를 거부하셨기 때문에 사탄은 이제 주 (主)를 교만과 이기주의로 유혹한다. 사탄은 주님을 인상적인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그의 허영심을 과시하면서 말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 (마태오 4, 6)

그리고 나서 바로 성서를 인용하였다.
"성서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 게 너를 받들어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지 않았소?" (마태오 4, 6)

사탄은 여기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는 기적을 행하는 지름길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피를 흘리고 십자가에 매달리며 멸시와 배척을 받는 길고 지루한 길을 가려고 하느냐? 너는 벌써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단언한 바 있다. 좋다. 네가 정말로 하느님을 신뢰한다면 한번 과감하게 영웅적인 행동을 해봐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갈바리아 산을 어렵게 올라감으로써가 아니라, 아래서 뛰어내림으로써 너의 믿음을 증명해 보아라.

너는 교회나 성당의 뾰족탑 위에서나 십자가 위에서 고상한 진리를 설파해 보았자 너를 따르는 자 아무도 없을 것이다. 대중들은 너를 따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생각은 너무도 차원이 낮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고 기적으로 무장해라. 이 탑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땅 바닥에 닿기 전에 멈춰라. 그러면 그들은 이해할 것이다. 사람들이 항상 권태로와 하지. 그들의 단조로운 삶을 덜어 주고 지쳐빠진 정신에 자극을 주되 그들의 죄의식은 건드리지 말아라!"

두 번째 유혹은 십자가를 잊어 버리고 대신에 손쉽게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면 사람들은 쉽게 주님을 믿게 되리라는 것이다. 복되신 주님께서 성서를 인용하시는 것을 듣고 마귀도 성서를 인용한다. 구세주께서는 첫 번째 유혹에 대해 이렇게 답변하셨다. "하느님께 빵을 부탁드리면 그 빵을 주시겠지만 만일 그것이 나의 신적인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빵을 부탁하지 않겠다."
이에 사탄은 되받아 말한다. "네가 정말로 아버지를 그렇게 신뢰한다면, 한 번 과감한 행동을 해서 아버지가 너를 보호할 수 있는 기회를 드려서 아버지에 대한 신뢰를 입증해봐라." 사막에서는 돌을 빵으로 만드는 기적을 행해보았자 아무도 보아줄 사람이 없다. 그러나 도시에는 수많은 구경꾼들이 있다. 만일 누군가 메시아가 된다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데 이적(異蹟)을 보여 주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이 있겠는가?

이러한 유혹에 대해 답할 수 있는 진리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결코 이성과 모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터무늬없는 모험은 결코 하느님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사탄은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하기를 거부하였던 일을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님을 위해 해주기를 바랐다. 그것은 주님을 특별한 보호의 대상으로 삼아서 이미 하느님의 법칙에 속하는 자연 법칙에서 면제시키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오신 우리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대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수임 받은 신적인 사명을 저 버리는 자까지도 보호하는 기계적이며 비인격적인 섭리가 아니심을 알고 계셨다. 두 번째 유혹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이러 하였다.

악마는 다시 아주 높은 산으로 예수를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 주며 (마태오 4, 8)

주님께서는 나중 공생활중에 똑같은 유혹을 받으시게 된다. 군중들은 주님을 둘러싸고 자신의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기적을 요구하며 기적을 보면 쉽게 믿을 수 있다고 했다.

군중이 계속 모여 들고 있었다. 그 때 예수께서는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하고 탄식하시며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 (루가 11, 29)

만일 주님께서 정말 기적을 행하신다면 모든 사람이 그분 뒤를 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 속에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현대인들이 기적과 이적을 요구하는 데 대해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너희가 과학의 경이로움을 찬탄하며 내가 바로 우주와 그 과학의 창조자임을 잊어 버린다면, 너희는 사탄의 유혹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교정원들이지 대우주라는 책의 저자가 아니다. 그들은 나의 수공품을 보고 탐구할 수는 있지만, 원자 한 개도 그들의 힘으로 만들지 못한다. 너희는 하찮은 시험으로 내가 전능한지 증명해 보이라고 유혹한다.
너희는 나에게 시계를 들이대며 '오분 안에 나를 죽게 해보시오.' 하고 얼르기도 하였다. 너희들은 멋대로 폭탄으로 도시를 망가뜨려 놓고 '왜 하느님은 이 전쟁을 막지 않으신가?' 하고 외치면서 나를 유혹한다. 너희가 시킨 대로 능력을 보여 주지 않으면 내가 능력이 없다고 하면서 너희는 나를 유혹한다. 너희가 혹시 기억하고 있다면 사탄이 광야에서 나를 그런 식으로 유혹했다는 것을 너희는 알 것이다."

"나는 한 번도 고원(高遠)한 신적인 진리를 따르는 제자들을 많이 가져본 적이 없다. 예로써 나는 지식인 계급을 제자로 가져본 적이 거의 없다. 나는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곡예를 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그들은 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십자가 위에 있을 때에야 정말로 사람들을 나에게 끌어들이게 된다. 나는 시험관이 아니라 내 피로써, 물질적 힘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가 아니라 이성과 자유의지를 올바로 사용함으로써 나의 제자를 구해야만 한다. 이 세대에게는 요나의 기적외에는 아무런 기적도 없을 것이다. 요나의 기적이란 밑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자의 기적이지 탑꼭대기에서 아래로 몸을 던지는 자의 기적이 아니다."

"나는 내가 보호하지 않을 때에도 나를 믿는 그런 자들을 원한다. 나는 내 형제들이 갇혀있는 감옥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잔인한 공산주의의 낫과 로마의 제국주의 사자들을 가로막지 않을 것이며, 나의 성전문을 때려 부수는 공산주의의 망치를 붙들지 않겠다. 나는 나의 전교사들과 순교자들이 내가 고통을 받으며 그들을 사랑하였던 것처럼 감옥과 죽음을 통해 나를 사랑하기를 바란다. 나는 내 자신을 구하기 위하여 어떤 기적도 행한 적이 없다! 내가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해서도 기적을 거의 행하지 않을 것이다. 물러가라, 사탄아! 네 하느님 주님을 결코 시험하지 말라.!"

세 번째 유혹

마지막 공격은 산마루에서 이뤄졌다. 이번에는 선과 악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게 유혹함으로써 주님께서 십자가를 단념하도록 유혹하는 세 번째 시도를 한다. 주님께서는 희생당할 어린양이 되시어 지상에 왕국을 세우러 오셨다. 사탄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훨씬 빨리 당신 왕국을 세울 수 있는 방법을 주님께서는 왜 택할 수 없었을까? 그 조약을 체결하기만 하면 그가 바라는 모든 것 즉 십자가를 제외한 이 세상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를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잠깐 사이에 세상의 모든 왕국을 보여 주며 다시 말하였다.
"제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저것은 내가 받은 것이니 누구에게나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수 있소. 만일 당신이 내 앞에 엎드려 절만 하면 모두가 당신의 것이 될 것이오." (루가 4, 5-7)

사탄의 말은 대단히 과장된 것처럼 보인다. 세상의 모든 왕국이 정말로 사탄에 넘겨졌는가? 주님께서는 사탄을 "세상의 왕"이라고 부르셨지만,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어느 왕국도 사탄에게 넘겨주신 적이 없으며,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설사 사탄이 속물(俗物)들의 동의에 의해 지상의 왕국을 실제 지배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 마음에 드는 자에게 왕국을 멋대로 내줄 권한은 그에게 없다. 사탄은 주님을 유혹하여 지름길을 택하여 십자가를 포기하도록 하고자 거짓말을 하고 있다. 사탄은 주님께 한 가지 조건만 이행하면 세상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 조건이란 사탄에게 경배하는 것이다.

경배란 물론 봉사를 뜻한다. 여기서 봉사란 이런 것을 의미한다. 즉 세상의 왕국은 죄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에 주께서 일으켜 세우실 새로운 왕국을 옛 왕국은 계승해 가야만 한다. 간단히 말해서, 왕국을 개혁하지만 않겠다고 약속하면 세상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을 구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기만 하면 인류를 다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유혹을 나중에 사람들이 주님을 세상의 왕으로 삼고자 하였을 때 주님께서 직면하시게 되는 그런 유혹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 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피해 가셨다. (요한 6, 15)

빌라도 앞에서 주님은 새로운 왕국을 세우실 것인데 그것은 사탄이 제안하는 그런 왕국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빌라도가 주님께 "네가 왕이냐?"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 (요한 18, 36)

사탄이 제안한 왕국은 세속적인 것이었으며 영적인 왕국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전히 사악한 왕국이며 그 백성들의 마음은 새로워진 게 없다.

사탄의 말은 사실 이런 것이다. "오 그리스도, 너는 이 세상을 얻으러 왔지만 이 세상은 벌써 내 것이다. 네가 타협을 하고 나를 경배하면 이 세상을 너에게 주마. 너의 십자가나 하늘나라는 아예 잊어 버려라. 네가 세상을 원한다면 그것은 네 발치에 있다. 너는 예루살렘이 역대 그 어느 왕에게 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큰 환호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거스르는 십자가의 고통과 슬픔을 면하게 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고통을 통해서만이 이러한 왕국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에 사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마태오 4, 10)

이렇듯 간단 명료하고 비타협적인 말은 사탄에게 이렇게 들렸을 것이다. "사탄아, 너는 경배를 받고 싶어하지만 너를 경배하는 것은 너를 섬기는 것이고 너를 섬기는 것은 노예살이를 하는 것이다. 너의 세상이 엄청난 죄의 짐을 지고 있는 한 나는 그런 세상을 원하지 않는다. 네가 너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왕국에 사는 시민들의 마음은 여전히 네가 줄 수 없는 뭔가를 바라고 있다. 그것은 영혼의 평화와 사심없는 사랑이다. 나는 사실상 네 것도 아닌 너의 세상을 원하지 않는다."

"나의 어머니께서 찬미의 노래(Magnificat)에서 부르신 것처럼 나 역시 혁명가다. 나는 세상의 왕인 너에게 반기를 든다. 그러나 나의 혁명은 칼을 내뻗어 무력으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고 죄와 인간들 사이에 전쟁을 야기시키는 모든 것들에 대항하는 것이다. 나는 먼저 인간들 마음 속에 있는 악을 정복할 것이며 그런 다음 세계는 자연히 정복될 것이다. 너의 부정직한 세리들과 그릇된 판관들과 인민위원들의 마음 속 깊숙히 파고 들어가 너의 세계를 정복할 것이다. 그들을 죄와 죄의식으로부터 구원하여 깨끗한 마음으로 무장시켜 그들을 직업전선에 다시 내보낼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만일 불멸의 영혼을 잃으면 온 세상을 얻는다 하더라도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라고 말해주겠다. 너는 당분간 네 왕국을 부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혼 하나를 잃느니보다 네 왕국 모두 즉 온세상을 잃는 게 훨씬 낫다 ! 세상의 왕국들이 하느님의 왕국으로 고양(高揚)되어야지 하느님의 왕국이 세속 왕국의 수준으로 끌어내려 질 수는 없는 법이다. 이 세상으로부터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은 십자가를 세울 만한 장소밖엔 없다. 그곳에서 네가 관장하는 세상의 교차로 앞에서 나의 사지를 쫙 펼쳐 예루살렘과 아테네와 로마 도시의 이름으로 나를 못박도록 놔두겠다.

그러나 나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할 것이며, 내가 아침의 날개를 타고 승리의 행진을 할 때, 정복자인 줄 알았던 네가 패배하고 말았음을 알 게 될 것이다. ! 사탄아 너는 나에게 반(反)그리스도가 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런 불경스러운 요구 앞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의노(義怒)를 느낀다. 내 앞에서 썩 꺼져 버려라. 사탄아."

우리 주께서는 산에 오르실 때와 마찬가지로 가난하게 산을 내려오셨다. 이 세상 삶을 다하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주께서는 다른 산 위에서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열 한 제자는 예수께서 일러 주신 대로 갈릴래아에 있는 산으로 갔다. 그들은 거기에서 예수를 뵙고 엎드려 절하였다. 그러나 의심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오 28, 16-20)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3. 십자가를 벗어날 수 있는 세 가지 지름길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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