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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12. 여인 침입자

[그리스도의 생애] - 12. 여인 침입자


공생활 초 갈릴래아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아직 공개적인 적대감이 돌출되기 전에 시몬이라고 하는 돈많은 어떤 바리사이파 사람이 주님을 자기 집에 식사 초대를 하였다. 시몬은 사람들이 주님께 환호를 보낸다는 말을 들었으며 자신이 직접 주님이 참된 예언자인지 혹은 교사인지 확인해보고자 하였다. 이상할지 모르지만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근처에 또 있었으니 그녀의 관심은 훨씬 더 컸다. 그녀는 양심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으며, 자기 죄를 풀어줄 구세주이신 주님을 만나고 싶어 했다. 부끄러운 마음 금할 길 없었지만 그녀는 자기를 비난할 사람들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교사로서의 당신께 관심있는 자와 구세주이신 당신 앞에서 회개하는 또 다른 사람의 사이에 서시게 되었다.

주님께서 도착하셨을 때 시몬은 별다른 성의 없이 주님을 맞아들이며 통상 손님에게 베푸는 예의와 시중드는 일을 생략하였다. 그 당시에는 맨발로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오늘날 모자를 벗지 않고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신발이나 샌들은 문지방에서 벗었다. 집주인은 손님에게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길" 이라고 기원하며 뺨에 입을 맞추며 인사했다. 그리고서 손님은 안락의자로 안내되었으며, 보통은 하인이 물을 가져와 손님의 발을 씻어주고 의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청결하게 해주었다.

다음에는 주인이나 최소한 하인 중에 한 사람이 손님의 머리나 수염에 향기있는 기름을 발라 주었다. 주님이 들어오실 때는 피곤에 지친 발을 씻어 줄 물도 없었고, 당신의 뺨에 환영의 키스도 없었으며, 당신의 머리에 향수도 발라주지 않았다. 고작 식탁의 빈 자리를 가리켜 주는 비의식적인 동작밖에 없었다. 아마도 시몬은 다른 바리사이인들이 자기를 지켜보기 때문에 이러한 예의를 생략해 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 당시 손님들은 식탁에 앉는 것이 아니라 소파에 기대 앉았으므로 신발을 안신은 발이 완전히 쭉 뻗쳐 나왔다.

동양인들 사이에는 손님을 환대하는 법도가 너무도 널리 보편화되어 있었기에 식당에 접근하는 일은 아주 쉬웠다.
식사가 진행되는 도중에 귀찮은 사건이 발생했다. 시몬은 위를 쳐다보고 뺨이 붉어졌다. 주님이 안계시더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을 것이다.

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침입자는 여자였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그녀의 직업은 평범한 창녀였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뒤로 빗어넘기지도 않고 마루를 천천히 가로질러 왔다. 앞으로 늘어뜨러진 머리카락은 바리사이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칸막이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주님의 발치에 서서, 따뜻한 첫 여름 빗방울처럼 많은 눈물을 샌들을 신었던 평화의 선구자인 두 발에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과거의 행실을 부끄러워하며 그녀는 부끄러움을 감추듯 몸을 구부렸지만 눈물의 샘은 멈추지 않았다. 비난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대담해진 그녀는 무릎을 꿇고 그녀의 흩어진 긴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에서 눈물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였지만 그러한 영광은 감히 생각도 못하고 비천하지만 대담하게도 주님의 발에만 기름을 발라드렸다. 베일로 감춰 있던 값진 향유 그릇을 꺼내 한 방울 한 방울 천천히 떨어뜨림으로써 베푸는 자의 관대함을 드러내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릇을 깨뜨려서 몽땅 다 바쳤다. 사랑은 한계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현자에게 경의를 드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분명히 전에 주님을 보았거나 들었을 것이며, 주님께서 그녀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리라 확신했다. 그녀의 대담성에는 사랑이 있었고, 울음 속에는 회개가 있었으며, 기름부음 속에는 희생과 자아헌신이 있었다.

그러나 바리사이인은 스승이라는 사람이 평판이 좋지 않은 창녀를 가까이 오게 내 버려 두고 엄격한 바리사이인들의 전통과는 정반대로 자기 발에 눈물을 쏟아붓도록 내 버려둔다고 혐오감을 가졌다. 시몬은 큰 소리로 말하지는 않고 단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예수를 초대한 바리사이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속으로 "저 사람이 정말 예언자라면 자기 발에 손을 대는 저 여자가 어떤 여자며 얼마나 행실이 나쁜 여자인지 알았을 텐데 !" 하고 중얼거렸다. (루가 7, 39)

시몬은 그녀가 창녀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그는 자신을 판단할 것이다. 시몬이 볼 때 그녀는 죄인이었으며 언제나 죄인으로 간주될 것이다. 시몬이 볼 때 그녀가 만지는 것은 혐오스러운 것이며 그녀의 눈물에는 죄가 깃들어 있고 그녀가 기름을 바른 것은 거짓이었다. 이 바리사이파 사람은 전혀 희망을 두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에 대해 알아 보지도 않았다.
그녀를 파멸로 이끈 것은 타락한 의지거나 허영심, 굶주림이든 아니면 남성들의 욕정이든 그가 볼 때는 모두 똑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양심의 가책에 못견뎌 밤중에 일어나 자기도 평화를 얻지 못할 줄 뻔히 알면서 한 짓에 대해 수천 번 가슴을 치고 아파한들 이 바리사이파 사람이 볼 때는 용서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만일 그가 인간의 성품을 간파하는 통찰력을 갖고 있다면 이 여자가 창녀라는 것을 알텐데.

언젠가 산자와 죽은자의 영혼을 읽으신 것처럼 주께서는 시몬의 생각을 읽으시고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
시몬이 대답하였다.
"예,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주께서는 계속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을 진 사람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이 두사람이 다 빚을 갚을 힘이 없었기 때문에 돈놀이꾼은 그들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느냐?" (루가 7, 41-42)

이 이야기의 내용은 하느님은 채권자시며 우리에게 당신 재산을 맡기시고 날을 정해 당신 빚을 갚고 우리가 재산관리를 어떻게 했는지 보고하게 하셨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빚을 더 많이 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죄를 더 많이 지었기 때문에 빚이 많고 또 다른 사람들은 더 큰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빚이 적다. 어떤 사람은 10 달렌트를 받았고 어떤 사람은 5 달렌트, 그리고 어떤 사람은 1 달렌트를 받았다. 아마도 이 여인의 죄는 은화 5백냥쯤되는 빚을 진거나 같고 시몬의 죄는 은화 50냥쯤의 빚을 진거나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둘 다 빚진 자들이며 둘 다 빚을 갚을 수 없었다.

비유의 의미는 명백하다. 하느님은 채권자로서 부와 지성과 영향력의 은사를 사람들에게 맡기셨다. 그러나 빚을 갚아야 할 날짜는 정해졌다. 엄밀히 정의에 입각해서 볼 때 죄를 지어 하느님께 빚진 것을 갚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크건 작건 모든 채무자들을 기꺼이 용서해 주신다. 엄밀히 정의에 입각해서 볼 때 이러한 용서에는 어떤 대가가 필요한지 주님은 이 자리에서 다루시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은 죄사함을 베풀기 위해 오셨음을 시몬이 이해하도록 그의 마음을 준비시키신다.

주께서는 이제 이렇게 물으신다.
시몬은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겠지요" 하였다. 예수께서는 "옳은 생각이다" 하시고 그 여자를 돌아 보시며 시몬에게 말씀을 계속하였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 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을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내 발을 닦아 주었다. 너는 내 얼굴에도 입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 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맞추고 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라 주었다. (루가 7, 43-46)

주님께서 시몬에게 "이 여자를 보아라" 고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이 말씀은 시몬이 이 여인을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하고, 과거의 그러했던 여자나 그가 생각하는 그런 여자로밖에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시몬은 주님이 예언자라면 이 여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텐데라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이제 주님은 이 말을 돌려 시몬에게 물으신다.

"시몬아, 이 여인을 보느냐?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너희 족속들의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악하니까 너희가 의롭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너는 결코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너는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너희는 잘못은 항상 남에게 있고 자신에게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어서 주님은 그가 무시한 평범한 예의를 나열하시며, 이 여인이 그러한 예의를 베풀어 주었다고 말씀하신다. "이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닦았다." 때가 많이 낀 옷은 많이 물을 붓고 심하게 문지르지 않으면 때가 깨끗하게 빠지지 않는다. 죄로 심하게 오염된 경우는 물로 씻을 뿐만 아니라 통회의 눈물로 푹 담궈 적셔야만 한다. 그리고 그녀는 주님의 발을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진실한 통회를 할 때는 항상 죄를 위해 악용되던 것들이 하느님을 위해 사용되게 되는 법이다. 참회자가 판단할 때는 신체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도 가장 하찮은 봉사를 드리기에 과분한 것이었다.

이제 방문객이신 주님께서는 시몬이 세속적인 차원에서 빠뜨린 예의를 보다 숭고한 예의와 은총의 차원과 비교하신다. 존경의 표시는 그 마음을 보아야 한다. 그녀는 용서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존경을 드린 것이다. 삶에 있어서 모든 인습적인 예의범절의 근원에는 사랑과 애정이 깃들어 있다. 시몬은 목수의 아들을 식사에 초대함으로써 그에게 충분한 예의를 표시했다고 생각했으나, 주님은 그 여인의 사랑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신다.

잘 들어 두어라. 이 여자는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루가 7, 47)

그렇다고 죄인이 용서를 더 많이 받기 위하여 죄를 더 많이 짓던가 더 큰 빚을 지는게 좋겠다고 연역하여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여기서 주는 교훈은 극악무도한 죄인일수록 자기가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도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보다 쉽게 알 게 된다는 것이다. 이 여인의 사랑은 죄를 용서받은 데 대해 감사할 만큼 커졌다. 뉘우치는 이 여인이 큰 사랑을 보여준 것은 자기가 범한 죄의 양이 아니라면 죄를 알고 있었으며, 그 죄를 용서해 준 자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많은 것을 용서받았기 때문에 그만큼 많이 사랑했다.

죄를 고백하는 것만큼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갖도록 해주는 것도 없다. 어떤 친구가 자신의 성공담을 이야기 할 때 우리 마음과 그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눈물을 흘리며 자기 죄를 고백할 때, 그는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이다. 사실 어떤 사람이 자기 죄를 알고 있을 때는 자기 죄가 은화 5백냥의 범주에 속하는지 아니면 50냥의 범주에 속하는지 구별하지 않는다.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사실이다.

성 바오로는 자기를 죄인 중에 제일 큰 죄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완고한 신앙과 박해한 것을 빼고는 그렇게 대죄인은 아니었다. 죄를 가볍게 보는 사람은 용서도 가볍게 볼 것이다. 실제로 위급한 상처를 우습게 보는 사람은 의사의 능력에 대해 고마워할 줄 모를 것이다.

시몬은 뭔가를 배우고 싶었기에 교사를 초대했으며, 이 여인은 뭔가 용서를 받고 싶었기 때문에 결국은 그녀의 구세주가 되신 채권자 하느님께 참회의 눈물을 쏟아 부었다. 시몬은 죄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죄인인 여자를 보자 자기는 상대적으로 무죄하다고 생각했다. 죄란 사랑을 깨뜨리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죄란 그리스도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심각성이 더 명확히 떠오른다. 십자가에 가까이 서서 죄를 보상하기 위해 돌아가셔야만 했던 주님의 고뇌를 느낌으로써 바오로는 바리사이파 사람 가운데 바리사이파 사람이었던 자신을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 이라고 불렀다.

이제 가르침은 끝났고 이 여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들으며 떠났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네 죄는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7, 48)

시몬이 교사일 거라고 생각했던 이 사람은 공식적인 법전을 만들지 않았다. 그는 죄를 용서하였다. 그러나 하느님 외에 누가 죄를 사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식사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자 예수와 한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인데 죄까지 용서해 준다고 하는가?" 하고 수군거렸다. (루가 7, 49)

이것은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던진 질문이었다. 이러한 자리는 19세기 후에 죄없는 세계의 상징으로 재등장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교묘히 변명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영혼들은 이 여인의 내적인 기쁨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이 여인은 예언자보다 위대한 분이 자기에게 하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7, 50)

이 여인은 하느님께서 순결과 선, 거룩함을 쫗아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를 그러한 거룩한 상태로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그분이 자기 앞에 서 계신다. 그러나 그러한 평화를 얻기 위해 주님께서 지불해야 할 대가는 악과의 전투를 벌인 후에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녀가 받은 용서는 그냥 "편히 가라" 는 것만이 아니라 정의가 완전히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 식사에 같이 참석하고 있던 베드로는 그러한 용서를 얻기 위해 지불된 대가를 나중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분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 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매맞고 상처를 입으신 덕택으로 여러분의 상처는 나았습니다. (Ⅰ베드로 2, 24)

식탁에 같이 있던 손님들은 어떻게 주님께서 죄를 용서할 수 있는지 의아해했다. 하느님 외에 아무도 죄를 사할 수 없다는 그들의 생각이 옳지 않은가? 주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다시 한 번 밝혀진다. 즉 주님은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심으로 죄인으로 취급받으셨으며,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으므로 죄인들과 구별되시며, 따라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죄인으로 취급 받으셨고,

그래서 '그는 악인들 중의 하나로 몰렸다.' 하신 말씀이 나에게서 이루어져야 한다. 과연 나에게 관한 기록은 다 이루어지고 있다"하셨다. (루가 22, 37)

다른 한편으로는 죄인들과 완전히 구별되셨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거룩하고 순결하고 흠도 죄도 없고 하늘보다 더 높으신 대사제가 필요합니다. (히브리 7, 26)

이상 두 가지는 상호 보완적인 진리다. 첫 번째 진리는 이 여인의 경우와 같은 죄를 용서하기 위해 지불하여야 할 대가를 가리키고 있으며, 두 번째 진리는 당신의 고통에 무한한 가치를 부여해 주는 주님의 신적인 생명을 가리키고 있다. 주님 앞에 서있는 이 여인은 자기 죄의 빚을 완전히 탕감받았지만, 주님께서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시는지 전혀 몰랐다. 이 죄많은 여인이 주님께 보여 준 모든 사랑의 표시들을 주님은 다른 식으로 또 받게 되실 것이다.
키스는 유다로부터 받게 되실 것이며 당신의 발을 닦아 준 것은 거꾸로 주님께서 몸소 수건을 허리에 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것으로 바뀔 것이며, 주님의 머리에 발린 기름은 가시관이 되어 당신 피에서 나오는 향기를 내뿜을 것이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12. 여인 침입자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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