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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13. 머리를 잘린 사나이

[그리스도의 생애] - 13. 머리를 잘린 사나이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구속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여러 가지 상징과 인물을 통해 계시되었다. 그 중 가장 현저한 것 중 하나는 요한에게 일어날 사건 속에 예고되고 있다. 요한은 아무런 세속적인 영예를 구하지 않았지만 헤로데 안티파스 왕이 그와 교제를 원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예를 얻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주님께서 채 두 살도 되지 않았을 때 그를 죽이려 했던 피에 굶주린 헤로데의 아들이었다. "헤로데는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 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두려워했다," 사악한 자들은 선한 사람들을 두려워한다.
선한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의 양심을 항상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신을 모르는 자들은 죽은 사자나 감옥에 갇힌 사자를 좋아하는 식으로 종교를 좋아한다. 그들은 종교가 모든 속박을 벗어나 그들의 양심을 공격하기 시작할 때 종교를 두려워한다.

헤로데는 "학식있는 종교인" 이라는 사람들을 찾으러 보낸 (펠릭스가 바오로를 찾으러 보낸 것처럼) 전형적인 속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종교가들의 명석함과 말투, 추상적인 지혜를 사랑하지만, 일단 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구체적이며 개인적인 문제와 결부시키기 시작하면 "너무 심하다" 느니 "참을 수 없다" 느니 "나를 개종시키려고 한다" 는 등으로 말하며 즉시 그들을 내보낸다.

항상 새로운 자극과 흥분을 찾고 있던 헤로데는 조정 대신들을 초대하여 그 당시 선풍을 일으키고 있던 흥미진진한 이 설교사의 말을 듣기로 했다. 요한 세례자가 무슨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할까?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은) 형제애에 대해 말할까, 아니면 군대를 필히 줄여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나, 갈릴래아의 경제 개혁이 극히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 말할까? 요한은 이 모든 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요한은 사람들의 양심에 직접 말하기로 했다.

아마도 헤로데는 반쯤 만족의 미소를 띠며 요한을 바라보았을 것이며, 그의 아내 헤로디아는 곁눈질로 노려보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고, 다른 사람들은 호기심은 있었지만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둘 다 이전에 결혼한 적이 있었다. 헤로디아는 헤로데의 동생과 결혼하였었다. 이런 일은 부패하기 시작한 나라에서 보통으로 볼 수 있는 불결하고 타락한 난잡한 일들 가운데 하나였다. 헤로데는 이전에 아럭타의 딸과 결혼했으나 헤로데가 자기 동생 필립보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자 그를 버렸다. 헤로디아는 필립보와 결혼해서 난 딸 살로메가 있었다.

세속적인 눈으로 볼 때 요한이 이 궁전에서 현명하게 피해야 할 한 가지 주제가 있었다면 그것은 이러한 복잡한 결혼문제였다. 그러나 요한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일에 몰두했다. 그는 그러한 욕정에 찬 생활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너무도 착해서 헤로데의 죄를 묵과할 수 없었으며, 도덕적인 건강에 너무도 관심이 많았기에 상처를 못본 체 할 수 없었으며, 너무도 사랑하는 마음이 컸기에 헤로데의 영혼을 구하는 것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요한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결혼은 성스럽고 풀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은 누구도 풀 수 없다." 요한은 명확하고 결정적이며 퉁명스런 말투로 핵심을 찔러 말했다. 황금빛 의자에 앉아 있는 헤로데와 그 아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요한이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누차 간하였기 때문이었다. (마르코 6, 18)

헤로디아는 움찔하였다. 헤로디아는 자기가 헤로데를 유혹했음을 요한이 상기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헤로데는 이미 헤로디아 손에 잡혀 있었다. 그녀가 한 번 눈길만 줘도 헤로데는 꼼짝도 못했다. 요한이 다음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고 경비병들이 요한을 궁전에서 끌고가 컴컴한 지하 감방에 집어 넣었다. 설교가는 감옥에 갇혔으나 그의 말은 그의 목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오래도록 양심 속에서 메아리칠 것이다.

몇 달 동안은 마케루스의 어두운 지하 감방에 갇혀 있었다. 이렇게 어쩔 수 없이 묶인 몸이 되었기에 자기가 말한 메시아와 하느님의 어린 양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을까? 아니면 어두운 지하 감방 속에서 그의 신앙이 흔들렸단 말인가? 아마 하느님의 메시지를 거부한 자들을 하느님께서 벌하시기를 초조히 기다렸는 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주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고 묻게 하였다. (루가 7, 19)

요한이 질문하는 자세를 보면 위대한 메시아의 약속을 믿고 있으며 자기가 묻고 있는 그분을 믿고 있으며 자기가 묻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질문을 받았을 때, 주님은 요한을 감옥에서 풀어 주겠다고 약속하시거나 요한의 적들을 쳐부수겠다고 대답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답변으로 당신이 하시는 치유와 위로와 가르치는 일만을 언급하실 뿐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루가 7, 22-23)

신성(神性)과 그 길은 인간에게 항상 걸림돌이 된다. 구세주께서 가난하고 세속적으로 내세울 만한 신분이 못되었다는 점이 당신 복음에 최초의 방해가 되었다. 이러한 편견은 하느님의 능력과 위엄에 대한 그릇된 관념에서 나온다. 이런 그릇된 관념을 가진 자들은 하느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의 수단을 써야 한다고 본다.

사실 그리스도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일과 당신의 말씀 즉 당신의 기적과 당신의 가르침을 가리키며 이중적인 답변을 하신다. 그리스도의 기적은 단순히 경탄할 일만이 아니고 의롭고 자비로운 하느님 왕국의 표징이 된다. 그리고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능력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자연을 초월한 능력이다. 주님의 가르침은 특히 당신의 신성을 입증해 주는 또 다른 증거가 될 것이다. 즉 가난한 자들이 복음을 듣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점은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가난은 인간의 불완전성과 나약성을 표현하는 또 다른 단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체가 건장한 자들, 지성이 예리한 자들, 이 세상 복을 풍성히 받은 자들은 이 세상에서 그 보답을 받는다. 그러나 가난한 자나 악한 자는 굶주리고 고통을 당할 때가 많다. 하늘 나라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이 있을 거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신다.
하느님은 가난한 자들의 불평등을 보상해 줄 다른 세상을 갖고 계시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를 바라거든 그리스도를 위해서 재물을 버려야 한다고 하는 반면 가난한 자는 그의 피로와 고통과 수고와 실망이 십자가와 결합될 때 내적인 평화와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요한의 심부름꾼들이 물러 갔을 때 주님께서는 요한을 칭찬하기 시작하셨다. 요한은 주님을 증거하였으며, 이제 주님께서 요한을 증거하신다. 주님께서는 한 시간 동안의 재판을 받은 후에 보내온 메시지를 듣고 요한을 판단할 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대답하셨다. 주님께서는 심부름꾼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는 군중들과 요한 자신을 비교하셨다. 군중들의 변덕스러움과 예언자의 꿋꿋한 자세가 대조를 이루었다. 약한 것은 요한이 아니라 군중들의 마음이었다.

요한이 사람을 보내 물어 본 것은 의심해서가 아니며 앞으로 당할 육체적인 형벌이 무서워서도 아니었다. 세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는 요한을 변호하셨다. 첫 번째 비유는 강한 급류로 흐르는 요르단 강가에 자라는 미풍에 나부끼는 갈대였다. 바로 이 요르단강에서 그들은 요한의 설교를 들었다. 두 번째 비유는 헤로데의 궁에 사는 자들이 입고 있는 부드러운 옷이었다. 세 번째 비유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표징이며 어머니 뱃 속에서 나온 모든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 간 뒤에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었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었느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스럽게 사는 사람들은 왕궁에 있다. 그렇다면 너희는 무엇을 보러 나갔었느냐? 예언자냐? 그렇다. 그러나 사실은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보았다. 성서에, '너를 보내기에 앞서 내 일군을 먼저 보낸다. 그가 네 갈 길을 미리 닦아 놓으리라' 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사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 보다 크다." (루가 7, 24-28)

주님은 세 번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나갔었느냐?" 고 물으셨다. 그들의 잘못은 바로 이것이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싶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들은 멋있는 장면이나 광경에 관심이 있었고 사자(使者)의 기적이나 인기를 즐기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누군가를 보러 나갔을 뿐, 그의 말을 들으러 나가지는 않았다. 눈요기를 하러 나갔지 세례자의 극기나 절개를 본받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요한은 여론의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였기 때문이거나, 헤로데궁의 정신(廷臣)들처럼 세속적인 복지를 도모하는 자였기 때문에 감옥에서 그런 질문을 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님께서 군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요한은 대중의 박수갈채 소리에 경박하게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었다.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질책을 가했다. 그는 남에게 엄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는 더 엄하게 대했다. 그는 왕궁에 거할 수도 있었지만 광야를 집으로 삼았다.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요한은 예언자였으며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 즉 메시아와 하느님의 아들의 선구자요 전령이었다.

위대함에는 지상적인 위대함과 천상적인 위대함 두 가지가 있다. 만약 요한의 위대함이 지상적인 것이었더라면 그는 왕궁에서 살았을 것이며, 그의 의복은 화려하였을 것이고, 오늘은 이런 대중철학 내일은 저런 대중철학으로 기우는 갈대와 같이 그의 생각도 남의 눈치를 보며 바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은 신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의 탁월성은 그의 인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변함없는 활동과 사명 즉 하느님의 어린 양을 선포하는 데 있다.

몇 달 뒤 헤로데의 생일에 성대한 잔치를 벌여 축하하게 되었다. 이런 성대한 주연에 헤로데의 모든 영주와 귀부인들, 군인들, 그리고 갈릴래아에서 온 식객들이 초대를 받았다. 때는 저녁이었으며 성에는 은은하게 불이 밝혀졌다. 각자의 얼굴 모습들은 깜박이는 희미한 촛불 속에서 가장 멋있게 보일려고 화장들을 한 모습이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나팔 소리, 술 마시고 떠드는 소리가 돌로 된 마캐루스 성채에 울려 퍼졌다. 이렇게 떠드는 소리는 10개월 동안 요한 세례자가 고초를 겪고 있는 좁고 어두운 지하 감방에까지 들려왔다. 그러나 손님들은 이내 따분해져서 기분전환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틀에 짜인 지루한 기쁨보다 더 지겨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시대의 최초의 거대한 나이트 클럽에서, 헤로데의 목소리가 울리면서, 손님들의 지루한 분위기를 자극할 만한 관능적인 춤을 추게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무희는 첫 번째 남편에게서 난 왕비의 아름다운 어린 딸 살로메다. 살로메는 존귀한 마카베족의 후손이었으나 타락한 어머니의 묵인하에 완전히 부패하고 타락해 버렸다.
이제 그녀가 홀에 나와 춤을 추었다. 주연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살로메의 춤에 매료되었으며 살로메의 우아한 동작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고 바로보던 헤로데는 포도주만이 아니라 그 춤을 보고 흥분하였다. 마지막 동작을 마치고 살로메가 헤로데의 무릎에 뛰어들자 그는 정욕에 북받쳐 무심결에 이렇게 내뱉었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나와서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매우 기쁘게 해 주었다. 그러자 왕은 그 소녀에게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무엇이든지 들어 주마" 하고는 "네가 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겠다. 내 왕국의 반이라도 주겠다." 하고 맹세하였던 것이다. (마르코 6, 22-23)

살로메는 무엇을 청해야 할 지 몰라 어머니에게 물었다. 헤로데는 이미 요한 세례자의 유감스러운 설교를 잊어버렸지만 여자는 그렇게 쉽게 잊지 않는 법이다. 요한이 십 개월 동안 지하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헤로디아의 영혼 속에도 존재하면서 그녀의 영혼을 괴롭히고, 잠을 설치게 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고, 꿈 속에도 계속 나타났다.
그녀는 하느님의 도덕적인 대표자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여생동안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살로메에게 한 마디만 하면 자신의 양심과 남편의 양심을 영원히 잠재울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딸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대답했다.
살로메는 헤로데에게 다가갔다. 시끄럽던 음악이 멈췄다. 온 좌중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어린 소녀가 헤로데에게 다음과 같이 청했을 때 음식맛이 뚝떨어지고 그들의 가슴 속마저 베스꺼웠다.

그러자 소녀는 제 어미가 시키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이리 가져다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마태오 14, 8)

헤로데는 자기가 한 맹세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과거 요한 예언자를 존경했던 일을 기억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자기가 약속을 취하할 경우 손님들이 조롱하고 쑤근대며 흉볼 것을 두려워했다. 하느님과 양심과 자신에게 불성실하고 죄를 범한 것을 부끄러워 하는 것이 아니라 소문을 겁낸 헤로데는 취중에 한 맹세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둘째 마누라의 역정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헤로데는 노예 몇 명을 보냈다. 횃불을 밝히고 노예들이 계단을 따라 점점 밑으로 내려가는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점점 소리가 작아지더니 감옥문의 열쇠를 찾는 소리와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뭔가 털썩 떨어지는 역겨운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계단을 따라 서서히 올라오는 소리가 그들의 심장이 고동치는 리듬에 맞춰 점점 더 크게 들려 온다. 노예들은 유혈이 낭자한 선물을 가지고 헤로디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살로메에게 건네 주고 살로메는 그것을 가지고 무도홀을 가로질러 황금접시에 담겨 있는 수염이 덥수룩한 물의 예언자의 머리를 헤로데에게 주었다.

어두운 그날 밤 헤로데는 간음녀의 딸의 요구에 따라 그리스도의 선구자를 살해했던 것이다.
그 후로 헤로데는 네로가 자기가 살해한 어머니의 유령 때문에 괴로워했듯이 두려움으로 줄곧 괴로워했다. 갈리귤라 황제 역시 자기가 죽인 희생자들의 얼굴 모습이 계속 떠올라 잠을 못잤다. 역사가 수에토니는 말하기를 "갈리귤라는 밤 늦도록 잠을 못자거나" 날이 새기를 기다리며 궁전의 긴 주랑(主廊)을 걸어 다니곤 했다고 한다.

헤로데는 얼마 후 주님에 대해서 말을 듣고는 그가 죽었다가 살아난 요한 세례자라고 생각하였다. 헤로데는 내세를 믿지 않았으며, 관능적인 사람은 누구도 내세를 믿지 않는다. 불멸에 대한 믿음도 장래 심판을 무시하며 사는 자들은 쉽게 잃어 버린다. 내세는 생각으로 부인하기보다는 생활태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헤로데는 죽을 때 생명의 문은 닫히는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이 설교하신다는 말을 듣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회의(懷疑)는 나쁜 태도를 정당화하려는 자세라기보다는 확고한 지적인 자세이기에 회의 자체에 대해 결코 확신하지 못한다. 사두가이파 사람처럼 헤로데는 내세를 거부했다. 그래도 그는 그의 양심을 두려워했다. 주님의 기적과 기이한 업적에 대해 들은 "헤로데는 주님을 만나 보고 싶어 했다." 헤로데는 사실 주님을 만나 보았다. 2년쯤 후에 빌라도는 주님을 헤로데에게 보낸다.

그러자 온 무리가 일제히 "그 사람은 죽이고 바라빠를 놓아 주시오!" 하고 소리질렀다. (루가 23, 18)

헤로데는 예수님의 마지막 때에야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전에는 한번도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이제 그 때가 오자, 주께서는 그에게 말하기를 거부하셨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가 있은 후,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던 사도들은 엘리야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엘리야는 이미 정신적으로 그들 가운데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외로이 떨어진 곳에 거주하고 있는 요한을 보았다. 그는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있었으며 아주 적은 음식으로 살고 있었다.

그 때 주님은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십자가를 다시 언급하셨다. 주님께서는 요한 세례자의 죽음이 당신 자신의 죽음의 예시임을 가르쳐주셨다. 요한을 본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았듯이, 그들은 주님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엘리야는 벌써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알아 보지 못하고 제 멋대로 다루었다. 사람의 아들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마태오 17, 12)

요한의 운명에 대한 평을 통해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의 죽음과 고통을 예언하셨다. 예수께서는 지배하는 메시아만이 아니라 죽음을 당하는 메시아에 대한 생각을 사도들의 마음 속에 심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사람들은 요한 세례자가 회개하는 엘리야의 정신으로 왔을 때 그를 맞아들이지 않고 몰라 보았듯이, 메시아께서 그들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 나무 위에서 죄값을 대신 치르러 그들 가운데 오셨을 때도 그들을 몰라 볼 것이다. 사람의 아들의 운명이 그렇게 예언되었다고 사도들은 들었다.

예수께 "율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마르코 9, 11)

시편과 예언서들이 사람의 아들인 그의 고통에 대해 언급하였다. 주님께서 요한 세례자를 포악한 헤로데로부터 구해주지 않으셨듯이, 바로 그 헤로데로부터 당신 자신도 구하지 않으실 것이다. 사자(使者)가 그가 사명을 띄고 일해 준 그분 때문에 운명을 당했다. 심부름꾼이 그가 전해 준 전갈 때문에 폭력을 당했다.
또 다시 갈바리아산이 이번에는 영광스러운 변모의 산기슭 계곡을 가로질러 굽어 보고 있다. 요한의 잔인한 죽음을 포함해서 주님의 생애에 속하는 모든 일들이 주님의 십자가에 대해 말해 준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13. 머리를 잘린 사나이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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