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30. 여우와 암탉

[그리스도의 생애] - 30. 여우와 암탉


주님께서 헤로데의 영적인 갈릴래아에 계셨을 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십자가가 다시 들리운다. 주님을 죽이기로 이미 계획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주님을 자극하고 불안감을 주려고 계획하여 이렇게 말했다.

바로 그 때에 몇몇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자 (루가 13, 31)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주님의 안전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주님을 유대지방으로 불러들이기를 열렬히 바랬다. 거기서 주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산헤드린의 수중에 바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꾸며낸 수작은 물론 아니었다. 왜냐하면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헤로데의 양심은 요한 세례자를 죽이고나서 괴롭기 그지없었다.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모으며 신적인 스승께서 그곳에 계신다는 자체가 헤로데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헤로데가 자기 영토에서 그리스도를 제거하려는 계획에 기꺼이 가담했다. 동시에 그것은 주님을 예루살렘에 데려 와 신속히 처치하고자 하는 그들의 계획을 무르익게 해주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교활한 계획과 거짓 우의를 꿰뚫어 보셨다.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시며 그들을 바로 물리치셨다.

예수께서는 "그 여우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이면 내 일을 마친다'고 전하여라." (루가 13, 32)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을 주님의 포도밭으로 묘사하였다. 메시아의 선구자를 죽인 여우보다 포도밭을 망친 자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사람이 누구겠는가? 주님은 당신의 인기를 힘입어 정치적 음모나 혁명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헤로데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덧붙이셨다. 신들린 자들에게서 악령을 몰아내고 마비된 사지를 고쳐주는 주님의 활동은 계속될 것이다. 주님은 돌아가시고 영광을 받을 시간이 될 때까지 이처럼 무해한 수고를 계속 중단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늘과 내일" 이라는 표현은 호세아 예언서에서와 같이 짧은 기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십자가형을 당하시게 되고 십자가형의 마지막에 당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성취했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 전이 아니고 삼일째 되는 날 마지막에야 주님은 당신의 여정을 마치실 것이다. 주님은 당신이 돌아가실 날을 아시며 아직 그 시간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사악한 동맹을 맺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주님께서 몸소 당신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시기까지는 그들이 찾는 희생물에 손을 대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 당신 목숨을 완전히 당신 마음대로 하신다는 것을, 당신은 자기가 현재 있던 갈릴래아에서 죽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다시 한번 재차 확인해주셨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있겠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13, 33)

헤로데가 아무리 당신을 죽이려 안달해도 주님은 아버지께서 정하신 "시간"을 바꾸지 않으실 것이다. 예루살렘은 독점적으로 예언자들을 죽이는 곳이었다. 바로 이 도시에서 십자가가 세워질 것이다. 당신 목숨을 노리는 위협을 주님은 무시해 버리셨다. 주님이 돌아가실 곳은 헤로데의 지배를 받는 지방이 아니라 본티오 빌라도 치하에 있는 예루살렘이다. "오늘, 내일 그리고 삼 일째 되는 날"이라는 기간은 구세주께서 당신이 계시던 페레아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데 필요한 정확한 시간이었다. 주님께서는 "죽으신다" 고 하시지 않고 오히려 "정점에 이르셨다" 고 말씀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아버지가 주신 신적인 사명과, 설교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인간의 죄를 대신해 하느님의 마음을 녹이기 위해 자신을 봉헌하시는 주님 자신의 뜻을 연결시켜 주고 있다. 주님께서 당신 생애를 마무리 짓는데 대해 사용하신 똑같은 표현을 히브리 인에게 보낸 편지는 두 번 되풀이 해서 말하고 있는데, 한 번은 사람들을 구원에로 인도함으로써 주님의 고통을 영광스럽게 할 때였고 또 한 번은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히브리서 5, 9)

예루살렘이란 말을 들으면 주님은 당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이 도시에 대한 당신의 애국적인 사랑을 떠올리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하고 너희가 말할 날이 올 때까지 너희는 정녕 나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 (루가 13, 34-35)

영원하신 분이 정하신 자리인 이 예루살렘 도시에 대해 스승이신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어떤 조상이 어떤 도시나 지방을 부른 적은 없었다. 이 도시에 하느님의 영광이 머무시며 모든 민족에게 계시를 내려 줄 수단이 될 것이다. 주님의 상상력은 시민의 사랑의 본보기로서 여우에게 암탉으로 바뀐다. 감싸주고 따뜻하게 안아주기 위해 활짝 펼쳐진 암탉 날개의 모습은 구약성서와 예언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비극은 사람들이 주님을 배척하는데 있다. 하느님은 "내가 돌봐 주겠다" 고 하시는데 인간은 "싫다" 고 말한다.

예루살렘에 관한 예언은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말 그대로 정확히 실현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판사들로부터 사형언도를 받았을 때 독약을 건네준 사형집행관은 울면서 그에게 잔을 넘겨주었다. 주님은 하느님이셨기에 예루살렘의 지배자와 재판관들이 사형을 언도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으며 그들을 위해 우셨다.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는 사형 집행관이 사형수를 위해 눈물을 흘렸지만 여기서 사형집행관들을 위해 우시는 분은 사형을 당하실 그 분이시다. 이것이 철학자와 하느님의 차이다.

자유의 힘은 엄청난 것이다. 인간은 자신 안에 보호하며 구해주시는 하느님의 날개를 거부하던가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신인(神人)이신 분도 예루살렘과 전세계를 위해 당신 목숨을 자유롭게 봉헌할 수 있는 자유를 당신 안에 가지고 계신다. 만일 주님께서 억지로 고통을 당하신다면, 그것은 불의의 극치일 것이며, 아버지께서는 마지못해 봉헌하는 제사를 받아들이시지 않을 것이다. 이전에, 주님께서는 기꺼이 당신의 양우리에 드는 자들을 당신 양떼라고 부르셨으며, 여기서는 그들을 병아리라고 부르신다.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십자가가 주님 앞에 놓여 있지만, 이 십자가는 마무리요, 완성이며 영광이 될 것이다. 다시 한번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연관시키신다. 이 둘은 결코 분리된 적이 없다. 주님은 순교자가 아니라 승리자로서 십자가에 다가가신다. 사람들은 주님께 가시관을 씌워 주고 십자가에 못박겠지만 이 모든 일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이뤄진다. 이런 일을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야 이뤄질 것이다. 이 때 주님과 함께 있던 베드로는 후에 ³오순절 설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의 신적인 측면에 대해 말해 줄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여러분의 손에 넘어간 이 예수를 여러분은 악인들의 손을 빌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 23)

예루살렘은 그 전 일요일에 주님을 받아들였다가 성금요일에 배척할 것이다. 아마도 승리의 입성은 나중에 세상이 끝날 때 예루살렘이 주님을 영접하게 될 상징일 것이다. 스스로를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자라고 일컫는 사도가 재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분을 뵙자 마치 죽은 사람처럼 그분의 발 앞에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나에게 오른손을 얹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존재이다. (묵시록 1, 17-18)

여우와 암탉이 만났다. 지금 여우는 암탉을 죽이기 위해 나중에 빌라도와 공모하듯이 지금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공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의 주님께서는 여우처럼 게걸스럽게 먹는가 아니면 암탉처럼 끌어 모으는가에 따라 모든 사람을 심판하신다. 암탉의 날개밑에 들어오지 않는 자들은 탐욕스런 로마 독수리의 발톱에 채일거라고 경고하셨다.

--------------------------------------------------------------------------------------------------------

3) 오순절 五旬節 : 고대 이스라엘의 연중 순례축제의 하나로서 팔레스티나에서 밀추수 만료기에 거행되는 추수절(출애 23, 16). 고대 농업사회에는 추수한 첫 곡식을 신에게 바치는 습관이 있었다. 히브리인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가나안 관습의 영향으로 추수감사절을 지냈는데 처음에는 그 날짜가 농작물의 추수 시기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으나 과월절을 기념하는 의미가 '누룩 없는 빵의 축제'와 결합하게 되자 첫 곡식을 바치는 축제는 과월절 때 보릿단을 바치고 난 후 50일째 되는 날에 지내게 되었다. 오순절을 펜테코스테 혹은 50일째 날이라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순절의 성격은 추수를 감사드리는 것이므로 누룩 없는 빵을 바치는 과월절과는 달리 일상의 식용으로 쓰는 누룩 있는 빵을 봉헌하며 추수의 마감을 구획하는 것이다. 이 축제가 처음에는 작황에 따라 지방성전에서 각각 거행되었으나 나중에는 야훼가 선정한 (신명 16, 11) 중앙 성전에 모여 일시에 지내게 되어 순례의 기회가 되었다. 오순절의 예절은 (레위 23, 15-22) 새로 구운 빵을 흔들어 바치고 번제제물, 속죄제물, 감사제물이 따른다. 행렬을 하면서 성가를 부르고 시편을 읊는데, 이에 대해 사제의 강복을 통하여 야훼의 축복을 받았다. 70년 성전 파괴 이후 유태인들은 이 축제를 지내면서 시나이산에서 율법을 받았던 사실을 기념하게 되었다. 사도행전 2장은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였다고 하므로 그리스도인은 오순절의 의의를 상기하게 되었으나 성령강림이 오순절에 거행된 어떤 사건을 완성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며 양자는 명백히 구별된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30. 여우와 암탉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