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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31. 죽음을 준비한 부활

[그리스도의 생애] - 31. 죽음을 준비한 부활


특히 주님께서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했을 때 그리스도의 목숨을 노리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라자로의 부활로 죽음에 대한 지배권을 보여주셨을 때 주님의 죽음은 정식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그 날부터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요한 11, 53)

이전에는 먼저 당신의 죽음을 먼저 이야기하시고 나중에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셨지만 이제는 당신의 적들이 당신의 죽음을 정해놓았기 때문에 부활에 대해 먼저 말씀하셨다. 라자로의 빈 무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자 하는 결심을 자극하였지만, 주님은 빈 무덤을 위해서 십자가를 포기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당신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공생활 초기에 군중들을 먹이시고 당신을 생명의 빵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다른 사람들을 부활시키겠다고 약속하셨다.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나에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그렇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모두 살릴 것이다."
이때 유대인들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못마땅해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니 말이 되는가?" 그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하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내가 살릴 것이다.

예언서에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사람은 나에게로 온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본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온 이밖에는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 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서로 따졌다.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요한 6, 38-55)

이러한 말씀은 당신 자신의 부활에 대한 예언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당신을 믿고 당신의 부활한 생명에 의해 사는 자들은 모두 당신의 능력을 통해 부활하리라는 주장이었다.

이전에 주님은 최소한 두 명을 죽음에서 살려 주셨다. 한 사람은 야이로의 딸이었고 또 한 명은 나임 과부의 아들이었다. 야이로의 딸은 방금 죽었었고 과부의 아들은 관속에 들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라자로였다.

그 당시에 주님께서는 페레아 지방에 있는 요르단 동쪽에서 설교하고 계셨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베다니아 마을이 있었고 베다니아는 예루살렘에서 2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 마을에는 마르타와 마리아라는 두 자매가 있었으며 오빠는 라자로였다. 주님은 종종 그들의 환대를 받으셨다. 라자로가 병들었을 때 마르타와 마리아는 심부름꾼을 예수님께 보내 이렇게 말하였다.

마리아와 마르타는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 하고 전했다. (요한 11, 3)

나중에 두 자매는 예수님을 "주님" 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주님의 신성(神性)과 권한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랑의 원천을 라자로에게 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에게 두고 있었다. 자매들은 주님의 사랑에 호소하며, 모든 것을 주님의 결정에 맡겼다.

주님의 어머니께서도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그렇게 하셨다. 거기서 마리아는 단지 "그들에게 술이 없다." 고만 하셨다. 주님께서는 전갈을 받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 전갈을 받으시고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그것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아들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11, 4)

라자로의 부활과 당신의 부활이 동시에 당신의 마음속에 분명히 떠올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베다니아에 가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라자로를 부활시키셨을 때 주님은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마르타에게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하시자, (요한 11, 40)

주님께서는 메시아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 즉 아버지와 일치하여 계신 분으로서 명예와 영광을 당신 자신과 결부시키신다. 라자로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라자로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의 죽음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두 자매들은 분명히 주님께서 그들의 전갈을 받으시자마자 곧 바로 라자로의 침상으로 달려 오시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전갈을 받으시고도 이틀이나 더 그곳에 머무셨다. 만일 라자로의 죽음에 대해 끝까지 기록된 아주 드문 예에 속하며 주님께서 지체하신 것도 그안에 하느님의 뜻이 숨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주님이 계시던 곳과 라자로의 집 사이는 하루쯤 걸리는 거리였다. 따라서 주님께서 페레아에 이틀을 더 무무르셨다면 거기다 하루 길을 더 더해서 모두 합하면 그 때는 주님께서 소식을 들으신지 4일이 되었을 것이다. 하느님의 지체하심은 신비인 것이다. 슬픔은 슬픔이 오게 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연장되는 때가 종종 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당장 병을 고쳐주시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주님이 사랑하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주님이 결코 쉬지 않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보다 큰 선이 불행에서 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천상의 시계는 우리의 시계와는 다르다. 인간적 사랑은 늦는 것을 참지 못하기 때문에 서두르도록 재촉한다. 주님께서 야이로의 집에 가실 때에도 똑같이 지체하셨다. 주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을 구해주셨다. 여기서도 주님은 서둘러 가시지 않고 귀중한 시간을 내셔서 하혈로 고생하는 여인이 군중들 사이에서 당신 옷자락을 만지셨을 때 그녀의 병을 고쳐주셨다. 악한 일은 종종 서둘러서 하게 된다. 주님께서도 유다에게 "빨리" 더러운 일을 시작하라고 하셨다.

이틀 후에, 주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가족에 대해 다시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라자로에게 가자" 라거나 "베다니아로 가자" 고 하시지 않고 "유대아로 돌아가자" 고 하셨다. 그런데 유대아의 수도는 예루살렘이었으며, 그곳에는 주님께 대한 반대세력이 집결되어 있던 곳이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자 즉시 주님의 목숨을 위협하고 예루살렘에서 돌을 던지던 일을 생각하며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백성들의 지도자들에 대해 말했다.

제자들이 "선생님, 얼마 전만 해도 유대인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그 곳으로 다시 가시겠습니까?" 하고 걱정하자, (요한 11, 8)

주님께서는 그들을 시험하고 계셨다. 바로 몇 주 전에 요한은 주님의 적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때에 유대인들이 다시금 예수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몸을 피하셨다. (요한 10, 39)

주님은 여기서 사도들에게 적들 가운데로 돌아가자고 말씀하신다. 사도들은 이런 결정이 전혀 상식에 벗어나고 지혜롭지도 않다고 생각하였다. 사도들은 겁이 난다고는 안했지만, 주님의 안전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안전에 대해서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적들이 주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한다는 것만 언급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답변은 주님의 목숨에 대한 신적인 계획과 아무도 주님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낮은 열 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낮에 걸어 다니는 사람은 세상의 빛을 보기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빛이 없기 때문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하시며, (요한 11, 9-10)

늘상 그러하셨듯이 주님은 하나는 문자 그대로의 뜻과 또 하나는 영적인 의미를 갖는 이중적인 의미를 띈 단순한 진리를 말씀하신다. 이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는 이렇다. 세상에는 자연적인 태양빛이 있으며, 약 열 두 시간 동안 사람들은 일하거나 여행한다. 낮시간 동안 태양은 사람들의 길을 비춰준다. 그러나 밤에 여행을 하거나 일을 한다면, 넘어지거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이렇다. 즉 주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아무도 정해진 낮시간 동안 태양이 빛나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아무도 주님의 사명을 방해하거나 막을 수 없다. 비록 주님께서 유대아지방으로 올라가신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허락하시기 전에는 어떤 불상사도 주님을 침범할 수 없다.

주님의 빛이 사도들을 비춰주고 있는 한 박해자들이 득실거리는 도시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이것은 주님께서 헤로데를 여우라고 하면서 그에게 대답하셨던 것과 똑같은 생각이다. 주님께서 불이 꺼지게 허락하실 때가 올 것이며, 그 때는 주님께서 올리브 동산에서 유다와 그의 적들에게 "지금은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가 세력을 떨치는 때다." 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허락하실 때까지 그의 적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수난 때까지는 낮이며 수난은 밤이다.

"우리는 해가 있는 동안에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 때는 아무도 일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 (요한 9, 4-5)

어느 누구도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정해진 낮 열두 시간 중에 일 초도 주님으로부터 빼앗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주님께서 죽음을 맞이하러 가시는 어둠의 시간 중에서 1초도 앞당길 수 없었다. 마침내 주님께서 제자들이 길을 떠나야 한다고 발표하셨을 때, 비관적이며 우울한 기분에 휩싸인 토마는 동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때에 쌍둥이라고 불리던 토마가 자기 동료인 딴 제자들에게 "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합시다" 하고 말하였다. (요한 11, 16)

예루살렘에서는 반대세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토마는 거룩한 도시에서 함께 죽자고 제안했다. 토마를 어떤 식으로 평가하든 그는 비록 부활은 가장 늦게 인정했을 망정 다른 어떤 누구보다도 주님께서 당하시게 될 죽음을 재빨리 간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께서 기꺼이 죽음을 당하시고자 한다면 토마도 주님과 함께 기꺼이 죽고자 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토마는 항상 어두운 면을 띄고 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라면 토마는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주님께서 베다니아에 도착하셨을 때 라자로는 묻힌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다. 베다니아는 예루살렘에서 두 시간이 못되는 거리에 있었으며 성전이 한 눈에 들어 오는 곳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도착하셨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으며 특히 주님의 적들이 많이 몰려 들었다. 또한 많은 조문객들이 불쌍한 두 자매를 위로해 주러 왔다. 예수님이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듣자 적극적인 마르타는 일어나 예수님을 만나러 갔지만, 마리아는 집에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있긴 했지만 아직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주님께 드린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요한 11, 22)

주님께서 그녀의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마르타는 마지막날 모두가 부활할 때 살아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주님께서 전에 성전에서 하신 말씀을 마르타가 듣지 못했거나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상하다.

내 말에 놀라지 말라. 죽은 이들이 모두 그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나올 때가 올 것이다. (요한 5, 28)

마르타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사두가이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의 신앙이었다. 우물가에 있던 여인이 메시아가 오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기가 벌써 메시아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마르타도 부활은 믿고 있었지만 자기 앞에 부활이 서계신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우물가에 있던 여인에게 당신이 메시아라고 말씀하셨듯이 지금은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요한 11, 25)

만일 그리스도께서 "나는 부활이다" 라고만 하시고 영적이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면 계속 심화되는 불행 속에 다시 육화하겠다는 약속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나는 생명이다" 고만 하시고 "나는 부활이다"고 말씀하시지 않으면 계속되는 우리의 불만을 해소해주는 약속밖에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과 부활을 결합시킴으로써 주님은 죽음을 통해 완성되는 생명이 당신 안에 있음을 단언하셨다.
따라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롭고 완전한 생명으로 부활하는데 대한 서곡이다. 죽음은 십자가와 영광을 결합시킴으로써 주님은 죽음을 통해 완성되는 생명이 당신 안에 있음을 단언하셨다. 따라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롭고 완전한 생명으로 부활하는데 대한 서곡이다. 죽음은 십자가와 영광을 결합시키는 새로운 방법이었으며, 당신 인생의 시편을 통해 응답송처럼 흐르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나서 바로 유대땅에 있는 적들 가운데로 일부러 걸어 들어가셨다. 주님께서는 "죽음" 이라는 단어를 쓰기를 꺼려하셨다. 이런 사실을 보면 주님의 생애가 바로 죽음과 싸우는 것이었음을 알 게 된다. 주님께서는 라자로에 대해 말씀하신 것처럼 야이로의 딸에 대해서도 똑같이 "그들은 자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스테파노에 대해 "그는 잠이 들었다" 고 똑같은 단어를 쓸 것이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누구든지 당신을 믿는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다는 것을 믿느냐고 물었을 때, 마르타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요한 11, 27)

육화에 대한 완전한 신앙으로 인해 기적이 일어나게 된다. 마리아가 울면서 나왔다. 주님께서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마리아뿐만 아니라 같이 따라 온 유대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요한 11, 33)

주님은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죄에서 나오는 두 가지 주된 결과인 죽음과 슬픔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끼셨다. 주님은 원해서 배가 고프셨고, 원해서 비탄에 잠기셨고, 원해서 죽으셨다. 세기를 흘러내려 오면서 볼 수 있는 긴 장례 행렬은 주님께서 스스로 지시고자 하는 그 죽음의 엄청난 결과로서, 이를 보고 주님은 십자가의 잔을 마시고자 하신다. 우리의 슬픔을 공감하지 않으시면 주님은 결코 합당한 대사제가 되시지 못할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약한 것처럼 약하셨고, 가난한 것처럼 가난하셨듯이 우리가 슬퍼하는 것처럼 슬퍼하셨다. 주님은 당신이 구원하고자 하신 자들의 슬픔을 일부러 나눠 갖고자 하셨기에 주님은 우셨다.

여기서 사용되는 그리스 단어는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다. 복음서는 주님이 세 번 우셨다고 말한다. 한 번은 예루살렘을 굽어 보시고 백성을 생각하며 우셨고, 또 한 번은 게쎄마니 동산에서 세상의 죄를 보고 우셨고, 이 번에는 라자로를 생각하며 죄의 결과인 죽음에 대해 우셨다. 주님은 그 어떤 눈물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으셨고 당신이 취하신 인성을 위해 흘리셨다. 주님의 인간적인 마음은 어떤 경우에나 열매와 뿌리를 구별할 수 있었으며,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과 그 악의 원인인 죄를 구별할 수 있었다. 참으로 주님은 "사람이 되신 말씀" 이셨다.

라자로의 무덤 주위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저것 보시오. 라자로를 무척 사랑했던가 봅니다." 그러나 슬픔에 겨워 울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원망스런 말투로 이렇게 물었다.

또 그들 가운데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라자로를 죽지 않게 할 수가 없었단 말인가?" 하는 사람도 있었다. (요한 11, 37)

주님께서 행하신 다른 기적들 때문에 사람들은 주님이 메시아이심을 어느 정도 믿고 있었다. 십자가 위에서도, 모든 기적은 인정하면서도,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 오실 수 없다는 사실은 믿지 않았다. 이제 이들은 모든 기적을 기꺼이 믿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정말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라자로가 죽지 않게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으므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들의 조소를 무시하며 라자로가 누워있는 무덤에 도착하시자 주님은 무덤의 돌을 치우라고 말씀하셨다. 마르타는 라자로의 확실한 죽음을 확인하며 주님께 이렇게 말했다.

예수께서 "돌을 치워라"하시자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그가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요한 11, 39)

그녀는 죽은 자의 상태가 너무도 고약해서 그가 살아나리라는 희망은 마지막 날까지 포기하라고 주님께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의 지시에 따라 돌을 치웠을 때 주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를 올리셨다.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목적은 이 기적을 통해 이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요, 아버지께서 당신을 세상에 보내셨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기도를 바치시고 나서,

죽었던 사람이 밖으로 나왔는데 손발은 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11, 44)

무덤에서 나온 라자로는 베로 칭칭 감겨 있었다. 두 자매들은 사랑스러운 손으로 라자로의 얼굴을 덮고 있던 수건을 벗겨주었으며, 이제 죽음의 포로가 되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훤한 대낮에 적대감을 가진 증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죽은지 나흘이나 된 사람이 한 순간에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다.

태양이 진흙을 비추면 진흙이 굳고 밀납을 비추면 밀납이 느굴느굴해지듯이 주님의 이 위대한 기적도 어떤 사람의 마음은 더 굳어지게 해서 믿지 않게 만들고 어떤 사람의 마음은 누그러지게 해서 믿게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믿었지만, 전반적인 결과는 주님을 죽이고자 하는 결의로 기울었다. 많은 사람들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보고하였다.

그래서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의회를 소집하고 "그 사람이 많은 기적을 나태내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대로 내 버려 두면 누구나 다 그를 믿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백성을 짓밟고 말 것입니다." 하며 의논하였다. (요한 11, 47-48)

죽은 자를 부활시켰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어떻게 그리스도가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인기를 얻지 못하게 막느냐 하는 것이었다. 주님은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기적을 통해 명백히 보여 주셨다. 그러나 기적이 믿음을 갖게 하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매일 죽음에서 부활한다하더라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추론은 아주 흥미있다.

"그대로 내 버려 두면 누구나 다 그를 믿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백성을 짓밟고 말 것입니다." (요한 11, 48)

그들의 말 뜻은 만일 그가 그런 기적을 계속 행하고 그런 능력을 보여 준다면 백성들은 그를 왕으로 받아들일 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자기 나라를 점령하고 있는 로마인들에게 적대감을 유발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의도는 로마인들에게 희생되기 전에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예언하신대로 그들이 두려워하던 바가 실제로 이루어졌다. 티토 치하의 로마인들이 예루살렘 도시를 파괴하고 성전을 불살랐으며 나라 전체를 수치스러운 포로상태로 전락시켰다.

대사제 가야파도 이 의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모두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의견이 분분할 때 간교한 가야파는 모두들 꾸짖으며 자기 생각보다 더 큰 진리를 담고 있는 해결책을 하나 제시했다.

이 말은 가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사제로서 예언을 한 셈이다. 그 예언은 예수께서 유대 민족을 대신해서 죽게 되리라는 것과 (요한 11, 51)

"우리가 아니라 로마가 그의 죽음을 결정하게 하자" 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백성들이 열렬히 따르던 한 사람을 죽인데 대한 책임을 모면하게 되고 로마인들이 그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로마 당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위대한 속죄양이 되시게 되었다. 이 사나이의 십자가 처형이 카이사르의 마음을 누르러뜨릴 것이고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해 반항한다는 의심을 없애 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가야파는 한 사람이 민족을 위해 죽는 것이 전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낫다는 자기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다. 수세기 전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우물 속에 집어 넣고 노예로 팔아 먹은 동기는 약하였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계획을 성취한 것이었다. 나중에 요셉이 형제들에게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요셉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에게 못할 짓을 꾸민 것은 틀림없이 형들이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을 좋게 꾸미시어 오늘날 이렇게 뭇 백성을 살리시지 않았습니까?" (창세기 50, 20)

여기서도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살인이 이뤄지지만, 하느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리스도가 유대 백성과 모든 백성들을 위한 희생제물임을 가야파는 자기도 모른채 인정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적(代贖的)인 것이며 그리스도의 목숨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희생제물인 것이다. 고대의 대사제는 예언능력을 갖고 있다고들 믿었는데, 복음서는 이 악한의 진술이 참된 예언이라고 논평한다.

이 말은 가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사제로서 예언을 한 셈이다. 그 예언은 예수께서 유대 민족을 대신해서 죽게 되리라는 것과 민족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 죽는다는 뜻이었다. (요한 11, 51-52)

주님께서 인생의 황혼녘에 접어 들었을 때, 부활을 믿지 않는 무뚝뚝한 사두가이파 한 사람이 천사가 주님께서 탄생하실 때 주님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며 공표했던 것을 이렇게 해서 확인하였다. 천사의 말은 이러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하고 일러주었다. (마태오 1, 21)

가야파는 새로운 일치와 새로운 계약을 선포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자신을 바침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신 분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죄많은 인류를 위한 몸값으로 당신 목숨을 바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가야파도 같은 말을 했지만, 그는 자기가 한 말을 모르고 있었다. 착한 목자는 "한 양떼와 한 목자" 가 되게 하기 위해 돌아가실 것이다.

한 사람의 부활로 주님은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돌이 무덤에서 굴러 치워지고 죽은 자가 불려나와 살아났기 때문에, 이제 당국은 주님의 무덤 앞에 돌을 굴려 막으라고 선언한다.

그 날부터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요한 11, 53)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31. 죽음을 준비한 부활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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