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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33. 예루살렘 입성

[그리스도의 생애] - 33. 예루살렘 입성


때는 니산달이었다. 출애굽기의 규정에 의하면 이 달에 파스카양을 골라 나흘 후에 제사지내는 곳으로 끌고 가야 한다. 성지주일에 어린 양(주님)은 예루살렘에서 대중들의 환호속에 뽑혔다가, 성 금요일에 희생되셨다.

주님은 마지막 안식일을 라자로와 그의 두 자매들과 함께 베다니아에서 보내셨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입성을 준비하기 위해 주님은 두 제자를 마을에 보내시어 아무도 타보지 않은, 밧줄로 매어있는 망아지를 찾아오라고 명하셨다. 그들은 그 밧줄을 풀고 주님께 데려와야 했다.

"혹시 누가 왜 남의 나귀를 푸느냐고 묻거든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루가 19, 31)

이 보다 더 큰 역설은 일찍이 기록된 바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주님의 왕권을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의 "가난함"을 말하고 있으니 이는 역설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러한 신성과 의존성, 소유와 가난이 결합되어 있는 것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결과였다. 참으로 부유하신 분이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가 부유하게 되기 위함이었다.

주님은 설교를 하기 위해 어부로부터 배를 빌리셨고 많은 군중을 먹이기 위해 소년에게서 보리빵과 물고기를 빌렸으며, 무덤을 빌리시어 거기서 부활하셨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타고 들어가기 위해 나귀를 빌리신다. 하느님은 종종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먼저 차지하시고 징발하신다. 마치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선물임을 인간에게 상기시켜 주시는 것처럼, 주님을 아는 자들은 "주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신다." 는 말을 듣는 것으로 충분하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도시에 가까이 다가가시자 "많은 군중" 이 주님을 만나러 나왔다. 그들 가운데는 시민들만 아니라 이 축일을 지내러 올라 온 사람들도 있었으며, 물론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있었다. 로마 당국은 대명절 기간동안 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 태세에 있었다. 이전에는 언제나, 주님은 사람들의 허황된 열성을 배척하였으며, 공개적으로 세상사람들의 주목을 받기를 피하셨으며 과시욕을 드러내는 어떤 것도 피하셨다. 한번은,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마태오 16, 20)

야이로의 딸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려내셨을 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마르코 5, 43)

거룩한 변모를 통해 당신의 신성의 영광을 드러내신 후
"사람의 아들이 죽었다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하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마르코 9, 9)

빵을 많게 한 기적이 있은 후 군중들이 주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 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피해 가셨다. (요한 6, 15)

당신의 친척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명절 때 기적을 행하여 공개적으로 사람들을 놀려주자고 주님께 부탁했을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아무 때나 상관없지만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요한 7, 6)

그러나 예루살렘 입성은 아주 공개적이어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까지도 이렇게 말하였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 이제는 다 틀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를 따라 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며 서로 걱정하였다. (요한 12, 19)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이 늘상 취하시던 태도와는 정반대였다. 전에는 그들의 모든 열광을 김빠지게 만드셨는데, 지금은 그들을 열광하게 만드신다. 왜 그러셨을까?

왜냐하면 당신의 "때"가 왔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주님께서 당신의 주장을 마지막으로 공적으로 확인할 때가 되었다. 주님은 이 때문에 갈바리아 산에 오르고 승천하시며 지상에 당신 왕국을 건설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일단 군중들의 찬미를 주님께서 인정하셨기에 예루살렘 도시는 두 가지 길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즉 베드로처럼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던가 아니면 십자가에 못박는 길밖에 없었다. 주님이 그들의 왕이 되던가, 아니면 그들에게는 카이사르 외에 다른 왕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갈릴래아 바닷가나 산꼭대기가 아닌 ⁴과월절을 보내는왕도(王都) 예루살렘이야말로 당신의 최후 선언을 하는데 가장 적절한 장소였다.

주님은 두 가지 방법으로 당신의 왕권에 주목을 끄셨다. 첫째는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한 가지 예언의 성취를 통해서고, 두 번째는 주님께서 당신 것으로 받아들이신 신성에 대한 찬사를 통해서다. 마태오는 장엄한 행렬은 수년 전에 즈가리야가 예언한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시온의 딸에게 알려라. 네 임금이 너에게 오신다. 그는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타시고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마태오 21, 5)

예언은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께로부터 나왔지만, 이제 하느님이 몸소 그 예언을 성취시키신다. 즈가리야의 예언은 주님의 위엄과 겸손을 대조시키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아시리아나 바빌론의 조각된 고대 석판이나, 에집트의 벽화들, 페르시아의 무덤, 로마 원추기둥들의 조각물을 볼 때, 위풍도 당당하게 말이나 전차를 타거나 때로는 땅에 엎드려 있는 적들의 몸 위를 밟고 있는 왕들의 위세를 보고 놀란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기 개선장군처럼 오시는 분은 나귀를 타고 오신다. 만일 빌라도가 그 일요일에 성 밖을 내다보았더라면 왕으로 추대된 한 남자가 추방의 상징인 동물 위에 앉아있는 기이한 모습을 보고 아주 재미있어 했을 것이다. 이 동물은 사지(死地)로 들어가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탈 것이었다. 만일 주님께서 정복자와 같이 왕처럼 화려하게 도시에 입성하셨더라면 당신을 정치적 메시아로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택하신 상황은 당신 왕국이 이 세상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이 가난하기 짝이 없는 왕이 카이사르의 적수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백성들의 환호는 주님의 신성에 대한 또 하나의 인정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옷을 벗어 주님 앞에 깔아드렸으며, 어떤 사람들은 올리브나무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를 꺽어 길에 뿌렸다. 요한 묵시록은 승리의 종려 나무를 손에 들고 어린 양의 옥좌 옆에 수많은 사람들이 서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시몬 마카베우스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와 같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승리를 상징해오던 종려나무는 이제 주님께서 잠시 패배를 당하시기 전에 주님의 승리를 증거한다.

주님을 따르면서 메시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위대한 힐렐에서 인용한 몇 구절을 군중들은 외쳤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이여, 찬미받으소서. 하늘에는 평화, 하느님께 영광!" (루가 19, 38)

그들은 주님이 하느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베들레헴의 천사들의 노래를 그대로 되풀이 한다. 주님께서 가져오신 평화는 하늘과 땅의 화해이기 때문이다. 동방박사들이 구유에 누워계신 주님께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인사드린 말도 되풀이되고 있다.
그리고 앞뒤에서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울렸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 (마태오 21, 9)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를 맞으러 나가,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
찬미받으소서!"
하고 외쳤다. (요한 12, 13)

주님은 약속된 다윗 혈통의 왕이셨으며 신적인 사명을 띠고 오신 분이셨다. 호산나는 원래 기도였었는데 여기서는 구세주 왕께 드리는 승리의 환영가가 되고 있다. 그들은 주님이 왜 파견되셨으며 주님이 가져오실 평화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주님이 신적인 분이라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환호에 동참하지 않은 자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 뿐이었다.

그러자 군중 속에 끼어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선생님, 제자들이 저러는데 왜 꾸짖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루가 19, 39)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주님께서 군중들의 경의를 받아들이시는 것을 보고 혐오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께 간청했다는 것은 예사 일이 아니었다. 아주 엄숙하게 주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잘 들어라. 그들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루가 19, 40)

만일 인간이 입을 다문다면 대자연이 외치며 주님의 신성을 선포할 것이다. 딱딱한 돌마저 환호를 외친다면 자기 앞에 벌어지는 하느님의 자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의 마음은 얼마나 더 딱딱하겠는가! 제자들이 조용한다하더라도 주님의 적들은 얻는게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산과 바다가 목소리를 낼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입성은 개선입성이라고들 하지만 "호산나"를 외침이 곧 "십자가에 못박아라"는 외침으로 바뀌며 종려나무가지가 창으로 변하게 될 것을 주님은 알고 계셨다. 군중들의 환호소리 가운데서 유다의 모의하는 소리와 빌라도 궁전 앞에서 외치는 분노의 목소리를 들으실 수 있었다. 주님께서 환호 속에서 추대된 옥좌는 십자가였으며 주님의 대관식은 십자가 처형이 될 것이다.

지금은 주님의 밑에 수많은 옥들이 깔려 있지만, 성금요일에는 당신 옷까지도 빼앗기실 것이다. 주님은 처음부터서 인간의 마음을 알고 계셨으며 인간 영혼의 구원이 현란한 말의 축제로 성취될 수 있다고는 한번도 암시하신 적이 없었다. 주님은 왕이셨으며 이제 사람들이 당신을 그들의 왕이신 주님으로 인정은 하고 있지만, 당신을 왕으로서 환영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갈바리아 산이라고 주님은 알고 계셨다.

주님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것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구하러 오셨으나, 주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 위에 임박한 불행을 보고 우셨다. 예루살렘 도시를 굽어 보시며,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러 그 도시를 내려다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루가 19, 41-42)

주님께서는 티토의 군대가 내려온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정확히 내다 보셨지만 미래를 훤히 꿰뚫어 보시는 그 눈이 눈물로 거의 안보이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죄인들을 당신 날개 아래 모음으로써 화를 피하게 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하고자 했으나 그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모든 시대의 위대한 예언자로서, 주님은 당신의 고통을 초월하여 보시며 사랑을 거부한 도시에서 눈을 떼지 않으신다.

악을 보면서도 인간의 완고함 때문에 그것을 고쳐주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일이다. 사악함을 보시면서도 악을 행하는 자들의 고집 때문에 어쩔 수가 없으셔서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신 것이다. 아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아버지의 마음은 번민으로 맥이 풀린다. 주님의 눈물을 재촉한 것은 보려고 하지 않는 눈과 들으려고 하지 않는 귀였다.

개인의 생활이나 개개민족의 삶에는 세가지 시기가 있다. 우선은 축복의 형태로 하느님께서 찾아 오시거나 특권을 누리는 때와 신적인 것을 잊어 버리는 거부의 때와 파멸과 재앙의 때가 그것이다. 심판 (혹은 재앙) 은 인간이 내린 결정의 결과이며 하느님께서 세상을 인도하고 계심을 입증해준다. 예루살렘 도시를 보시고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인간에게 은총을 주시면서도 그 은총을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결코 파멸시키지 않는 역사의 주님이심을 보여 준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 따르지 않을 때, 인간은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것이며, 주님을 찔러 죽일 때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것이며, 주님을 부인할 때 그들은 자기 도시와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왕이 십자가를 향해갈 때 흘리신 눈물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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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과월제(過越祭) : 과월제, 유월제, 혹은 빠스카라고 한다. 과월제는 유태인들의 3절기(節氣) 중 봄의 철기[春節]인 과월절에 지내는 축제, 혹은 제사를 말한다. 과월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Pesah는 '통과하다'(보고도 그냥 지나치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처음에는 가축의 맏새끼를 잡아서 바치던 유목민족의 축제였는데, 여기에 가나안 농경민족의 축제 풍습인 누룩 넣지 않은 빵을 먹는 관습이 결합하였다는 것이 출애굽 이전의 과월제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이다. 여기에 다시 출애굽의 과정을 거치면서 의미가 부과된다.

즉 야훼가 이집트민족의 모든 장자(長子)들을 멸하실 때 이스라엘민족의 집을 통과했다는 역사적 의의가 첨가되면서 이집트에서 해방된 출애굽을 기념하는 중요한 축제로 되었다.
니산(nisan, 정월)의 10일에 그 해 태어난 흠없는 양을 고르고 14일에는 그것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引榜)에 바른다. 고기는 수족(手足)과 내장 까지 모두 구워서 누룩없는 빵, 쓴 나물과 함께 먹는다. 그리고 식탁에 앉은 사람은 모두 허리띠를 두르고, 신을 신은채, 지팡이를 가지고 급히 음식을 먹는다. 아침이 될 때까지 집안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다. 식사 도중 지명된 아들이 의식상 질문을 한다. "왜 오늘 밤은 다른 밤과 구별되는가"라는 물음에 이집트에서 해방되던 이야기와 현재의 로마 지배 하에서 해방되어야 함을 기도형식으로 대답한다.

즉 과월제는 하느님의 구속사업에 대한 거룩한 축하행사다. 또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해방을 염원하는 행사이기도 하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과월제를 지키고, 이날에 성찬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마르 14, 10-16). 이와 함께 과월제 양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나타내는 전조(前兆)로 되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성취되고, 성체제정(聖體制定)의 만찬과 과월제는 결합(요한 19, 36)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진실한 과월제의 고양이 되었다(Ⅰ고린 5, 7)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33. 예루살렘 입성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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