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당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러 오셨다는, 당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밝혀 주셨다. 유대인들에게는, 당신의 강생에 대한 예언을 성취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계시해주셨지만, 이방인들에게는 구약에 담긴 것과 같은 계시가 없었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자연의 비유를 드셨다.
때는 주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으시기 전 일주일이 채 못되던 때였다. 주님은 라자로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려내심으로 당신이 부활하심을 이미 보여 주셨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위해서는 보잘 것 없지만 승리자로서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고대 예언을 성취하셨다. 이제는 이방인들에게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에 대해 가르쳐주실 때가 되었다. 여기서는 그리스 인들이 이방인을 대표하고 있으며, 나중에는 구약의 믿음을 받아들이고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에디오피아 환관이 이방인을 대표한다.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성전 안에 접근하는 것을 금했지만 넓은 이방인의 마당은 배회할 수가 없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온 세상이 그를 따르고 있다." 고 이미 불평을 털어논 적이 있다. 그리스인들, 즉 양우리에 들지 않는 양들이 착한 목자를 찾아 온 것이 그들의 말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적들이 주님을 없앨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그리스 인들은 주님을 만나 보고자했다. 주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동방의 현자들이 주님의 요람을 찾아 왔었고, 지금은 서방의 현인들인 그리스 인들이 십자가를 찾아 왔다. 동방의 현자들이나 서방의 현자들이나 수치를 당한 사람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베들레헴에서 갓난애의 모습을 한 하느님을 보았으며, 나중에는 십자가 위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고통을 당하는 하느님을 보았다. 당신의 신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표징으로 동방의 현자들에게는 별을 보여 주었으며, 그리스 인들에게는 밀알을 이야기해 주셨다. 심지어는 그들이 물어보는 말도 다소 비슷하다. 그리스 인들은 필립보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갈릴래아 지방 베싸이다에서 온 필립보에게 가서 "선생님, 예수를 뵙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이 말을 하고 두 사람이 함께 예수께 가서 그 말을 전하였다. (요한 12, 21)
동방의 현인들은 이렇게 물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 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태오 2, 2)
이 그리스 인들은 개선장군 같은 예루살렘 입성을 보았으며, 주님의 위엄있는 태도를 보고 틀림없이 감화를 받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에게 가장 감명을 준 것은 주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아버지께서는 이 집을 "만민의 집" 으로 삼으셨다고 말씀하신 사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혁명적인 개념이 그리스 인의 특징인 보편주의 정신을 깊이 자극하였을 것이다.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그리스 인들이 주님을 뵙고 싶어한다는 말을 주님께 전해 드렸을 때,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요한 12, 23)
가나에서 주님은 어머니에게 당신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공적인 전도활동을 하실 때 아무도 주님께 손을 댈 수 없었다. 아직 "당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돌아가시기 며칠 전인 지금은 당신이 영광을 받으실 때가 되었다고 공언하신다.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십자가 위에서 당하시는 치욕의 극치를 가리키며 동시에 승리를 말한다. 주님은 당신이 돌아가실 때가 되었다고 하시지 않고, 영광을 받으실 때가 되었다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제자 들에게 말씀하실 때와 같이 십자가와 당신의 승리를 하나로 보셨다.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루가 24, 26)
주님의 제자들이 볼 때 십자가는 치욕의 극치로 보였지만, 주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영광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리스 인들에게 하신 말씀은 이방인들이 당신 영광의 특징임을 뜻하기도 하였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고 있는 벽은 무너질 것이다. 처음부터 주님은 이방인의 땅에서 자라고 있는 십자가의 완전한 열매를 보셨다.
주님께서 이방인들에게 하신 답변은 매우 적절하였다. 그리스 인들의 이상은 자아포기가 아니라, 아름다움과 힘과 지혜였다. 그들은 극단을 경멸했다. 아폴로는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볼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주님과는 정반대였다.
그리스 인들에게 구원의 본 의미를 가르쳐주기 위해, 주님께서는 자연에서 한 예를 드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 게 될 것이다. (요한 12, 24-25)
주님은 종종 씨앗과 씨부리는 것에 관한 많은 비유를 이용하셨으며, 자신을 씨앗이라고 부르셨다. "말씀은 씨앗이다." 어떤 비유에서 주님은 당신의 사명을 여러 가지 토양에 떨어진 씨에 비유하셨으며 당신 은총에 대한 각 영혼의 반응을 설명해주셨다. 이제 주님은 당신 생명이 죽음을 통해 가장 큰 힘을 발휘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자연에는 십자가의 도장이 찍혀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조건이다. 주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으셨더라면 제자들은 주님을 그들의 일생이라는 편협한 곡물창고 속에 씨앗으로 간직하고 말앗을 것이다. 새로운 생명을 주기 위해 주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으면, 주님은 몸뚱이 없는 머리요, 양떼없는 목자요, 나라없는 왕이 되고 말 것이다.
주님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안 그리스 인들이 닥쳐 올 참혹한 운명을 피하기 위해 아테네로 가자고 제의했을지도 모르며, 예루살렘이 주님을 죽일 작정이라고 경고했을지도 모른다. 아테네는 위대한 교사들 가운데 소크라테스 한 사람만 죽였을 뿐이고, 그 후로 계속 그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하여튼 주님께서는 당신은 단순한 교사가 아니시며, 설사 그리스 인들에게 가신다 하더라도, 그것은 플라톤이나 솔론을 대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명확히 말씀해 주셨다. 아테네로 가시면 목숨을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주님이 오신 목적은 목숨을 내놓는 것이었다.
인간 본성은 시와 예술로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겪음으로써 위대해진다고 주님께서 그리스 인들에게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밀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당신이 생명의 빵이심을 나타내고자 하심인 것 같다. 구약성서와 같은 초자연적인 것은 아니지만, 구약성서와 같은 하느님의 책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손가락은 자연과 구약성서 두 군데서 똑같은 교훈을 찾아내신다.
씨앗은 부패하여 식물이 된다. 주님은 자연법칙을 이용하시어, 당신이 계속 살으신다면 당신 생명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다고 그리스 인들에게 말씀하셨다. 주님은 도덕가가 아니라 구세주가 되기 위해 오셨다. 주님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첨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다. 그러나 갈바리아 산이 없이 어떻게 씨앗이 새로운 생명을 줄 수 있겠는가? 성 아오스딩의 말처럼 "주님은 죽어서 번성하는 씨앗이시다.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죽음을 당하시고 만민의 믿음으로 번성하는 씨앗이시다."
두 번째의 교훈이 바로 이어진다. 그들은 주님의 죽음의 본보기를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요한 12, 26)
어떤 선도 선을 행한 자에게 희생과 고통을 끼치지 않고 이루어진 적은 없다. 구약성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법적으로 불결한 것들처럼, 정화와 세정의식은 피와 더불어 이루어졌다. 자명한 이치나 본능의 맹목적 추종이 그리스 인들에게 주신 이러한 권유로 치명타를 당했다. 실생활에서의 십자가는 자기수양이며 교만과 정욕과 탐욕의 절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렇게 함으로써만 이 완고한 마음이 부서지고 거친 성품이 평화롭게 될 것이다.
그리스 인들이 "예수님을 뵙고자 합니다." 하며 주님을 찾아온 것은 아폴로의 제자인 그들이 높이 준중해마지 않던 위엄있고 아름다운 용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갈바리아 산위에서 찢겨지고 부숴진 자신을 가리키시며 삶속의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새로운 생명속에 영혼의 아름다움이 깃들거라고 덧붙이셨다. 수난에 대한 무서운 두려움과 "죄를 뒤집어 쓰고", 배신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버림을 받는다는 두려운 걱정에 영혼이 사로잡혀 있을 때 주님은 잠시 쉬셨다. 당신의 성심 깊은 데서부터 다음과 같은 말씀이 우러 나왔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 주소서' 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요한 12, 27)
이 말씀은 나중에 게쎄마니 동산에서 하신 것과 거의 똑같은 말씀이었다. 당신께서 세상의 죄의 짐을 지신다는 사실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말씀이었다. 주님은 완전한 사람이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갈등을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주님을 괴롭힌 것은 육체적인 고통만은 아니었다. 예수님도 스토아학파나 철학자들, 어느 시대의 사람들처럼 엄청난 육체적 시련 앞에서 초연해지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슬픔은 고통에 있다기보다는 이러한 고통을 요구하는 이 세상의 죄에 대한 의식에 있었다. 당신이 몸값을 대신 지불해 줄 사람들을 사랑하면 할수록 주님의 번민은 점점 더 커졌다. 사람들의 마음을 슬픔에 가득 차게 만드는 것은 적이 아니라 친구들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십자가를 피하도록 설득하는 사도들을 꾸짖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구해달라고 부탁하시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두 가지 상반되는 것들이 주님 안에 결합되어 있었으며, 말로 나타낼 때만 분리되어 있었다. 즉 십자가에서 풀려나기를 바라는 열망과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순종이 그것이었다. 당신의 영혼을 털어 놓으심으로써 주님은 자기 희생이 쉽지 않다고 그리스 인들에게 말씀하셨다. 죽고싶어 안달하는 광신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자연은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박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겁하게 겁을 먹고 십자가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경우 언제나와 같이, 극도의 슬픔이 극도의 희열로 바뀐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없다. 악이 지배하는 "시간"이 하느님이 승리자가 되시는 "날"로 신속하게 변한다.
주님의 말씀은 독백과 같은 것이었다. 이 시간에 주님이 의지 할 수 있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야말로 구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나를 구원의 사명을 띄어 보내신 아버지만이 나를 붙들어주고 구하실 수 있으시다. 아버지께 나를 풀어 달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바로 이 고난의 때를 위해 시간이 만들어졌다. 아벨과 아브라함과 모세가 이 때를 가리키고 있다. 나는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왔을 뿐이다."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오셨다고 말씀하시자,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그 때에 하늘에서 "내가 이미 내 영광을 드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 하는 음성이 들려 왔다. (요한 12, 28)
십자가의 사명이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는 두 가지 경우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주님께서 죄를 위해 희생되실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나타나신 세례 때와, 빛나는 영광으로 둘러 쌓여 있는 모세와 엘리야에게 당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던 거룩한 변모 때였다. 지금 들려온 목소리는 강변이나 산꼭대기가 아니라 성전 위에서 들려왔으며 그리스의 대표자들도 명확히 들었다.
"내가 이미 드러냈다" 는 말씀은 주님께서 돌아가실 때까지의 아버지의 영광을 말하였을 것이며, "앞으로도 드러내겠다" 고 하신 말씀은 부활과 승천 후의 열매를 언급하셨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유대인의 성전 구내에서 이방인들에게 말씀하고 계셨기 때문에, 첫째 부분은 유대인에게 보여 주신 계시를 말하고 둘째 부분은 오순절 후 이방인들에게 보여 주실 계시를 말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 세 번 나타나셨을 때마다 주님은 아버지께 기도를 바치고 계셨으며, 당신이 겪게 될 고통이 확연하게 보였다. 이번에는 주님의 대속 죽음의 효과가 선포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 들려 온 음성이다.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게 되었다." (요한 12, 30-31)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사명의 목적 - 또 하나의 법전을 세상에 주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것 -을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납득시켜주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주님의 구속사업이 이미 완성된 것처럼 말씀하신다. 세상에 내린 판결 곧 심판은 주님의 십자가다.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의해 심판을 받을거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그리스 인들에게 십자가에 오르도록 말씀하신 것처럼, 십자가 위에 있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주님을 십자가에 목박은 자들처럼 십자가 위에 있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처럼 십자가 밑에 있는 사람들로 나뉘어 질 것이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의 도덕상태를 밝혀 줄 것이다.
한편으로 십자가는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악의 본성을 밝혀 드러내주고, 다른 한편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심판을 받은 것은 주님이 아니라 세상이며, 내쫓긴 것은 주님이 아니라 사탄이었다. 십자가만이 중요하며, 그 밖의 가르침이나 기적, 예언의 성취등 모든 것들은 갈바리아 산의 겨울을 지나 생명의 빵이 되는 밀알과 같이 되기 위한 주님의 지상 사명에 부수적인 것들이다. 나중에 성 바오로는 살기 위해 죽는 씨앗을 주제로 삼아 고린토 인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죽으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 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세속적인 표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Ⅱ고린토 5,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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