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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

" 관상기도를 무시하는 이들의 경고 "

사랑하는 벗이여, 나는 여기서 한 가지 경고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특히 가톨릭이 아닌 전통 속에서 자라난 사람들 가운데는 관상기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두려워하기까지 하는 이들도 없지 않은데, 더러는 사제와 수녀들도 그러합니다. 그들은 사람이 외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기도를 바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팔 흔들기나 노래부르기 또는 이상한 언어, 성서 봉독, 설교 따위를 부단히 계속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사람들 중 몇몇은 (의지는 선하다고 보지만) 무지한 탓에 침묵기도조차 ‘공허한’것이라고 하면서 악마가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위협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공허한’ 것인지 나도 도대체 알지 못합니다. 나는 생각이나 감정적 표현이 없는 관상적 사랑의 어둠과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그대도 알게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나는 ‘공허한’것은 무엇하나 아는 바가 없습니다. 내가 볼 때는 만물에 하느님의 위엄이 가득차 있습니다. 내 눈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는,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는 텅빈 장소, 즉 공허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온 창조계를 두루 채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악마에 대해서라면 나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변할 줄 모르는 일종의 ‘악마 신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듯한 사람들을 인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마치 하느님보다는 악마에게 더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전신주 뒤에서, 침대 밑에서 악마를 찾아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줄곧 악마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악마는 그들의 삶에서 대단한 구실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나는 오히려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에서 - 그러니까 전신주 뒤와 침대 밑은 물론 다른 모든 곳에서도 - 하느님을 발견하고 싶습니다. 끊임없이 악마를 걱정하는 자들에게는 악마를 걱정하도록 놓아둡시다. 무슨 ‘공허’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것을 두려워하도록 놓아둡시다. 사랑하는 벗이여, 나는 그대를 위해서 하느님 은총의 도우심을 받아 꾸준히 사랑의 탐색을 계속해 나갈 것이며,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어떠한 악도 무서울 것 없을”(시편 23편) 것입니다.

(사랑의 탐색/윌리엄 A. 메닝거 지음/성찬성 옮김/바오로딸)